하지만 조선시대에 신발 장인 갖바치는 천민 대접을 받았다. 유교와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기술자, 기능인은 푸대접을 받았고, 글 읽는 양반 사대부 등 계층만 인간 대접을 받았다.
대한제국 말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 한반도를 점령하는 즈음에 일본 경제인들이 조선 강토 각지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고베항에서 출항한 상선은 전북 군산항을 빈번하게 오갔고, 쌀과 면, 금융 관련 산업들이 군산항을 중심으로 번창했다.
고베에서 군산에 온 것 중의 하나가 신발산업이었다. 1920년대 무렵, 서울에서 친척 찾아 군산에 내려온 이만수는 고무신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조선의 산물인 가죽신, 나막신, 짚신에 비해 고무신은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비올 때나 눈올 때도 상관없이 신을 수 있었고, 잘 헤어지지도 않았다. 장사가 잘되니, 이만수의 신발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해방되면서 미군정청은 일제 기업을 한국인들에게 불하했다. 이만수는 미군정의 적산불하(敵産拂下) 당시 군산의 신발공장을 확보하게 되는 데, 바로 경성고무다. 경성고무는 만월표 신발을 생산, 크게 성장해 갔다. 하지만 경성고무는 화재 등으로 흔들렸고, 경영주의 의지 부족으로 표류했다. 결국 SK에 넘겨진 경성고무는 1985년 해체되고 말았다. 현재 경성고무가 자리잡았던 옛 군산역 앞 부지에는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뒤돌아 보면 아쉬운 일이다. 일제시대부터 군산과 함께 신발산업 중심지였던 부산과 경남에서는 아직도 신발기업들이 살아 지역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신발 산업은 무한히 번창할 수 있는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쌍방울, BYC, 태창 등을 낳은 섬유산업은 그나마 유지, 다행스럽다.
지난 24일 전북도민의 날을 맞아 자랑스런 전북인대상을 수상한 해피상사 강영진 사장은 아동복에 주력하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지역 섬유산업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당장 큰 돈이 되지 않아도 꾸준히 밀고 나가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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