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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꿈꾸며

어떤 사람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 박희승 안양지원장
미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이자 ‘위대한 반대자’로 칭송받는 홈즈는 1919년 Abrams v. U.S.A 판결에서 ‘진리의 가장 궁극적인 선은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달성될 수 있다’라고 설시하였고, 이 법리는 소수의견에서 출발하였지만 현재 미국 헌법이론을 대표하는 판시가 되었다.

 

현재의 정치지형도에서 충청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필자 생각으론 다양성이라고 본다. 여당과 야당이 번갈아가면서 당선되는 충청에서는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야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니, 인구도 늘고 정부지원도 집중되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사건이 헌재에 계류 중일 때에는 결론이 어떻게 날 것 같으냐면서 은근 슬쩍 의견을 떠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엔 북한을 이롭게 하는 정당은 마땅히 해산되어야 한다고 자기의견을 피력했다. 그 후 헌재에서 해산결정이 난 뒤 자기견해가 맞았다고 만족스러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해산결정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의 1심에서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법원이 그럴 수 있느냐며 듣기에 민망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1심 재판장을 잘 아는 나로서는 마치 무슨 죄인이라도 된 양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항소심 재판에서 1심과 다르게 유죄가 선고되자 그러면 그렇지 라면서 법원이 정의를 바로 세웠다는 사람도 많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아직 대법원 결론이 남아 있다.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법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점에서 고마운 일이지만, 실제 재판하는 법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 하는데도 여론에 따라 그 결론이 좌우된다면 누가 그 재판을 신뢰하겠는가.

 

재판은 용광로에 비유할 수도 있다. 재판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다. 법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법관들이 그 의견들을 심사숙고하여 결론을 냈다면 일응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결론에 수긍을 못하면 항소를 하며, 또 이에 대해서 불복이 있으면 상고를 하면 된다. 입맛에 맞는다고 칭찬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비판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를 흔드는 일이다.

 

법관 3명이서 합의부 사건을 처리할 때 쟁점이 많이 부딪치는 사건에서 내가 생각하는 결론과 다른 견해가 나오지 않을 때는 왠지 불안하다. 오히려 반대의견이 제시되어 치열한 난상토론을 거치고, 하나의 통일된 의견으로 결론이 날 때 그 결론이 단단하고 제대로 되었음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란 없다. 종중 구성원의 자격을 성년 남자만으로 제한하는 종래의 관습법을 변경하여 여성의 종중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나 호주제도의 위헌성을 들어 폐지를 이끌어낸 헌재의 결정 등은 시대가치의 변화에 따라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변한 사례이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견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고, 무언가가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힐러리 클린턴의 얘기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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