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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세계적 지휘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아닐까 싶다. 클래식 마니아 중에는 그의 음반으로 클래식에 입문한 사람이 적지 않고 ‘20세기 음악의 황제’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그의 궤적은 뚜렷하다. 세계적인 성악가로 우뚝 선 소프라노 조수미를 발굴해 유럽음악계에 널리 알린 것도 카라얀이다.

 

그는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이다. 모차르트는 생전에 잘츠부르크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박대를 당했지만 작고한 후에는 오히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로 인해 먹고 사는 도시가 됐다. 카라얀 역시 모차르트를 기리기 위해 시작된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페스티벌을 통해 데뷔했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대에서 공부했다. 카라얀은 1938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인연을 맺은 이후 베를린을 제 2의 고향으로 삼았지만 고향 잘츠부르크를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는 1955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 감독을 맡아 세계적인 음악축제로 만들어놓았다. 잘츠부르크가 음악도시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바탕에는 그의 역할이 큰 셈인데, 그래서인지 잘츠부르크에서 그의 존재는 지금도 모차르트와 함께 빛난다.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세계적 음악축제의 예술 감독과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일 해온 궤적이 굵지만 그래도 가장 빛났던 것은 지휘자로서의 행보다. 그 역시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듯 한데 자신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은 나치 가담도 결국은 독일 아헨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은 80년대 CD붐을 타고 대중들과 더 가까워졌다. 레코딩에 열정을 보였던 그가 80세 되던 1988년에 나온 자료에는 900장의 음반을 만들어 1억 2000만 장을 팔았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가 작고한 후에도 해마다 18억 원의 로열티를 벌어들인다니 카라얀 음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3월 18일 전주시향의 204회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지난 2월 취임한 최희준 상임지휘자의 첫 번째 무대다. 전에 없이 객석의 평이 좋다. 전주시향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팬들도 적지 않다.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의 신뢰와 존중이 가져온 결과일 터다. 새 지휘자를 맞은 전주시향의 연주역량이 주목받고 있다. 음악 장르의 편식이 심한 전주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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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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