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초록바위 진혼제
지난 6월 7일부터 10일까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이하 전주대사습놀이)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주한옥마을과 경기전, 국립무형유산원 등지에서 전통예술의 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전주대사습놀이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일, 한옥마을 인근 풍남문 광장에서 다른 색깔의 공연이 올려졌다. 제4회 초록바위진혼제. 과거 초록바위에서 죽어간 민초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공연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연구자로 참관하였고 초록바위진혼제에는 공연자로 참여했다. 같은 오늘, 다른 역사가 느껴졌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그 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이 있으나 전라감영의 통인들과 전주부의 통인들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점은 공감을 얻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전주 통인청 대사습이 명창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했고 그 전통을 고증하여 오늘날의 전주대사습놀이로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인은 조선 시대에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을 말하며, 통인청은 이들이 일을 보던 관사다. 통인은 최근 모 지상파 방송의 동학관련 드라마에서 ‘백가네 거시기’로 묘사되기도 했다. 극적인 전개 상 악인으로 설정된 점은 고려해야 하겠지만 관아에서 통인들의 지위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참고삼을 만하다.
전주 통인청 대사습은 경연대회 성향을 가진 서민 중심의 판소리 감상회였던 것 같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주대사습을 조사한 홍현식의 면담자료에는 전주 통인청 대사습을 직‧간접 적으로 경험한 전주 노인들의 증언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양반들은 경연장에 오지는 않고 행사가 마무리된 후 명창들을 자신의 집에 따로 불러 판소리를 듣곤 했다는 증언이 있다. 양반들이 있었나, 없었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된 관객층은 서민들이었던 것 같다. 또한 분명한 건 전주의 통인청대사습이 관아에서 주관한 행사였다는 점이다. 국문학자 유영대는, 전주 대사습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주에서 이방이나 통인들이 판소리 명창을 초청하여 일종의 소리잔치를 했던 역사는 300년이 더 되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기를 떠올려 보면 전주에 아로새겨진 또 하나의 역사와 중첩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초록바위는 전주천 싸전다리 부근에 있다. 정확하게는 동완산동 곤지산 자락에 있는 바위언덕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효수하던 곳이었고, 동학농민군과 천주교 신자들도 이곳 초록바위에서 처형당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이 초록바위 근처 서교장에서 참수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초록바위에서 전주천 물속으로 떠밀려 죽어간 15세의 두 소년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력을 개혁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역사의 기운이 핍박당한 상징적인 곳이다.
칸타타 형식의 이번 초록바위진혼제에서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이형로 씨를 만났다. 공연 며칠 후였다. 초록바위진혼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그가 초록바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 전 한옥마을에서 서학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초록바위의 사연을 접하고 초록바위가 있는 곤지산 자락을 여러 번 올라갔다고 한다. 수풀만 우거져 역사의 흔적은 사라지고 찾아볼 수 없었다.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많은 의견도 나누고 행정에 찾아가 길도 정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진혼제도 열어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행정에서 길을 정비해주고 서학동 주민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진보적 예술단체의 힘이 모아져 4년 전에 초록바위진혼제를 시작했다고 한다.
첫 회 때는 초록바위 정상에서 직접 풀을 깎고, 전기를 끌어오고, 악기를 짊어지고 가서 했고, 2회 때는 장소가 여의치 않아 인근 동물병원 주차장에서 했다고 한다. 3회 때는 국립무형유산원 야외 마당에서, 4회는 풍남문 광장에서 열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일인 음력 4월27일을 기념하여 그 인접한 날에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진혼제를 준비한 주민과 예술가들이 더욱 힘을 모아서 시민들의 잔치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했다. “과거를 용서하는 것이 현재의 위로가 될 수 있고, 현재의 위로가 내일의 문화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초록바위진혼제가 “봄에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듯이 전주에 뜻있는 봄의 문화행사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통인청 대사습을 주관했던 통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관의 역사와 민의 역사가 부딪히는 현장 어디쯤에 그들은 있었을까? ‘백가네 거시기’처럼 역사의 넓은 스펙트럼을 유영하며 파란만장한 행보를 했을까?
전주대사습놀이와 초록바위진혼제가 필자에게 다른 결의 역사로 다가온 건 이런 모습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관의 역사로 다가왔고 초록바위진혼제는 민의 역사로 다가 왔다. 전주대사습놀이는 통인청 대사습 이전에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에서 유래로 소개하고 있는 숙종, 영조 대의 사습놀이, 영조 대의 지방 재인청 및 가무 대사습청 설치와 소리광대에 대한 벼슬 제수, 명창 칭호 하사 등에서도 관과 닿아 있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초록바위진혼제는 동학농민이나 천주교 신자와 같이 관에 맞서거나 그 뜻을 거스르다 죽어간 민초들을 위한 진혼제다. 민의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두 행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간은 모두 서민, 백성이라는 점이다. 통인청 대사습의 소리판을 가득 메우고 명창의 탄생을 좌우했던 것도 결국은 서민들이었다. 초록바위의 애끓는 사연들도 백성들의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전주에서 시민의 예술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색깔은 달라도 서로 공감하면서 말이다. 다른 역사지만 공감의 예술을 품고 있는 곳, 전주를 말할 때 이런 점도 꼭 빠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세훈(문화인류학 연구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