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5 23:29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조정래 소설 <아리랑>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서 벼가 싹을 틔운다. 하늘의 숨결을 느끼고, 땅의 속삭임을 들으며 생명이 자란다. 인간이 공손히 손을 모으면 그 마음이 스미어 천지감동의 순간이 인다. 그때 벼가 여문다. 모든 생명의 처음과 끝인 쌀의 기원.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이어가는 아리랑 가락처럼 쌀 한 톨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은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진 들판’, 징게 맹갱 외에밋들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왜놈 돈 20원 받아먹고 팔려 갈 신세에 처한’ 방영근과 그 어미가 김제에서 군산으로 가는 풍경을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라고 적었다.

소설은 이곳을 배경으로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초를 겪는 민중과 애국지사의 삶,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은 친일파의 실상을 그린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땅마저 빼앗긴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국내·외로 떠돌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눈물 나는 역사. 그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민초의 숱한 고난과 끝없는 좌절과 눈물겨운 투쟁의 여정이다. 책장을 넘기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행과 간이 지평선처럼 아슴아슴하다.

광활 갯벌과 동진농장은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시린 역사를 단적으로 일러준다. 1924년 일제는 김제 동진농장 간척지 개간을 위해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다. 간척지의 염기를 제거하고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섬진강을 막아 운암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까지 길고 긴 수로를 연결했다. 이듬해 그 벌판에 전국의 이주민을 쏟아냈다. 정읍, 여산, 백구, 태인, 옥구, 익산… 이 땅 구석구석에서 땀과 눈물로 키운 쌀들은 가마니 채 징용되듯 끌려와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 쌀을 싣고 일본으로 떠나는 배들은 눈물 꽤나 흘리며 뱃고동을 울렸을 것이고, 군산 앞바다 물결은 운반선을 가로막으며 철썩철썩 가슴을 쳐댔을 것이다. 떠나가던 쌀들은 농부들이 부르던 아리랑 가락이 목에 걸려 가슴이 아리고 저렸을 것이다. 그 가락은 태산이고 파도이면서 애간장 타는 속울음이고 천 리 밖의 넋을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천지간에 다 아는 노래다. 때와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가락을 달리하며 부를 수 있는 신통한 노래이며, 제각기 가사를 엮어가며 새록새록 신명을 돋울 수 있는 가상한 노래다. 차례로 가사를 엮을 때면 논마지기가 더 있고 없고, 집칸이 더 크고 작고, 인물이 더 잘나고 못나고 하는 따위가 없다. 아리랑 가락은 누가 시작하든 곧 합창이 된다. 서러움이 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픔도 달래고 힘겨운 것도 이겨낼 수 있게 한다.

광복 75주년, 쌀은 여전히 이 땅 곳곳을 떠돈다. 쌀에 얽히고설킨 분하고 억울하고 야속한 일들은 농심을 성나게 하고, 벼 가마니를 방패 삼은 야적시위로 이어졌다.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고 엉덩이가 씰룩거리도록’ 아리랑을 더 크고 재미지게 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