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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 - 유강희 '오리막'

억만 천둥으로 살아 있는 검은 눈빛의 서정

시시시……,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창문을 열어보니 밤이 깊다. 어둠 속으로 비가 쓴 시들이 흘러간다. 흘러가서 저 먼 곳에 고여 있던 시집 한 권을 기억처럼, 혹은 추억처럼 끌어온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강희 시인의 시집 『오리막』. 첫 시집 『불태운 시집』 이후 10년 만에 펴낸 이 시집은, 참 보기 드물게 서정성의 시세계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어 마음이 훈훈해졌던 기억이 난다.

오랜 서울살이를 접고 내려와 김제 밤골에서 때까우와 기러기와 토끼, 닭, 강아지와 함께 생활하며 쓴 60편의 시편들. 때문에 언어들이 모두 맑고, 순결하고, 진실한 울림이 있다.

이제 와서 다시 이 시집을 꺼내들게 된 건,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서러움이 깊게 배어 있어서일 것이다. 그 서러움은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키고, 짠하게 하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감성과 통한다.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기보다 한없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것.

오리, 강, 살구나무, 장날, 대나무, 토란……. 마주하는 풍경 하나하나에 얽힌 내면을 투영시킴으로써 서정성은 더욱 깊어진다. 그만큼 시인의 눈빛도 깊이의 결을 갖는다.

두레박을 힘차게 우물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그 두레박이 한 마리 물고기처럼 첨벙 소리를 낸다는 것을,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 시원한 물 한 입 베어 물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눈빛. 조금은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세상살이를 다 아는 것도 같은 눈빛.

시인은 그런 눈빛을 갖게 된 것이 애초 어린 날을 보낸 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시 ‘토란’에서 고백하고 있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다른 데로 시집가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내 서늘한 눈빛의 토란

-‘토란’부문

 

때문에 더욱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눈빛은, 어느 새 ‘제 젖은 무릎을 가리기 위해 저리 넓은’ 토란잎을 닮아간다. 그리고 때로는 그 토란잎 위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알간 시가 나보다 서럽게 맺혀 있’는 걸 보며 또 한 뼘 넓어진다.

시인은 넓어진 눈으로 농촌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들 곁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다.

 

따뜻한 빛살로만

사람 그림자 오려 붙이는

외딴집 저쪽 담벼랑에

깻대가 익어 절로 터진다

그리로 가서 귀 막고 쭈그려 앉은 바람

-‘바람’ 전문-

 

문청 시절, 보리 싹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새벽에 보리밭에 나가 귀 기울여본 적이 있다는 선배가 있었다. 눈송이가 댓잎 위에 얹히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밤새 시누대숲 앞에 서 있어 본 적도 있다고.

날아가는 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이 뜨고 질 때는 어디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 시는 참 많은 궁금증과 물음을 가지고 다가들었던 것이다. 피붙이에 대하여, 시대에 대하여, 세상과 우주에 대하여 궁금증을 떠안고 살았고, 그렇게 시를 썼던 문청 선배 중 하나였던 유강희 시인.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들은 단순히 체념이나 넋두리, 이미지만을 따라가는 그림자놀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진실한 울림과 공감의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결국 시인이 ‘잃어버린 시의 우물을 찾아서’ 발버둥 쳤던 것은 시대의 물음이라거나, 세상에 대한 고뇌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데 대한 애석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인의 시 ‘귀신사 검은 대나무’가 그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신사 앞마당에서

아우가 옮겨다 심은 검은 대나무

그 검은빛이 무섭도록 날 쏘아보네

정한 믿음 하나 세워 돌아가자고

지난여름 잠깐 스친 애기 비구니의

정금 같은 눈빛도 억만 천둥으로 살아 있네

사노라면 뼈마디가 모두 숯검정이네

----(중략)----

저녁이면 구렁이처럼 몸을 비틀어 우는

그 검은 눈이 무섭도록 날 노려보네

-‘귀신사 검은 대나무’; 부문

 

‘정금 같은 믿음 하나 세워 돌아가자고’ 억만 천둥으로 살아 있는 검은 눈빛. 어쩌면 서정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섬뜩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나팔꽃 작은 손이 빗방울을 털며 무어라고 고시랑거리는 저녁 무렵’(‘오리막’부문)처럼 친근감 있는 시대, ‘너 요즘 시 쓰니?’(‘귀뚜라미’부문)라고 물어봐주는 시대, ‘여보시게, 뜨끈한 밥 한 술 뜨고 가시게나’(‘할매의 까치밥’부문) 하고 뜨뜻한 말이라도 놓아주는 시대, 때로는 ‘쓸쓸한 세상의 저녁 따뜻한 아랫목도 되’(‘참깻대’부문)는 시대를 우리는 ‘서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서정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전통 서정시가 자연을 관조하여 얻어진 것을 밑천으로 할 때,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고 흔한 소재를 끌어옴으로 해서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시집, 『오리막』.

올 여름, 한 번쯤 그 시집 속으로 두레박을 넣어 서정을 한껏 끌어 올려볼 만하지 않은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사랑, 믿음, 그리고 정의와 신의라고 불렀던 그 이름들까지 다시금 살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차고 서늘한 우물 속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힘차게 자맥질하는 것이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걸 느끼게 될 지도.

아무래도 오늘밤은 한밤 내 비가 내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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