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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부안 유천리 출토 청자매병 - 천하제일 비색 품은 고려청자

고려청자를 보고 고려의 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그의 시에서 "푸른 자기 술잔을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라고 하였고, 중국 송나라 문신인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고 하며, 근래에 들어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송나라의 태평노인은 "고려의 비색자기는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가 바로 바로 전북이다. 줄포만에 인접한 고창 용계리와 반암리, 부안 진서리와 유천리는 전남 강진만의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와 함께 양질의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던 곳이다. 부안 일대의 청자요지에서는 음각, 양각, 투각, 상감, 철화, 퇴화, 철채 등 다채로운 기법으로, 구름과 학, 파도와 물고기, 국화, 모란, 연화, 넝쿨무늬, 포류수금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긴 청자를 만들었다. 주된 형태는 대접, 발, 접시, 잔과 잔받침, 병, 매병, 의자, 향로, 장구, 주자 등이 있다. 진서리에서는 양질의 청자 외에도 약간 질이 떨어지는 일상 용기들이 주로 생산된 반면,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는 양질의 세련된 청자가 생산되었다. 양질의 유천리 청자는 왕실에도 납품되었는데, 고려 명종(재위 1170~1202)의 지릉에서 출토된 청자와 유천리 청자가 유사한 점이나 유천리 특유의 흑백퇴화문 청자접시가 희종(재위 1204~1211) 석릉에서 출토된 점, 고려 국왕의 행궁으로 추정되는 파주 혜음원(1122년 창건) 유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특히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는 70~90cm에 달하는 대형의 매병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매병 두 점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손에 꼽을 수 있는 대형 매병이다. 매병은 아가리가 좁고 짧으며, 어깨는 넓고 밑이 갸름한 형태의 병이다. 표면은 상감기법으로 모란과 용무늬를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고려청자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특별전이 12월 16일까지 열리고 있다. 만약 거리와 시간의 제약 때문에 서울에 가지 못하는 분이라면, 국립전주박물관을 찾기를 바란다. 국립전주박물관 미술실에는 이 두 점의 매병 이외에도 부안 유천리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는 물론 고려백자, 고창 용산리의 분청사기 등 전북 지역의 도자문화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1000년 전 하늘빛을 조우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될 것이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12.14 23:02

23. 완주 갈동유적 출토 청동거울 - 청동기시대 기술의 결정체

지난 2006년 문화유적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던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의 도로 건설 예정 부지. 고고학자들이 부르는 이름은 완주군 갈동유적이다. 앞서 실시된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2100년 전 갈동의 지배자들이 묻혔던 이곳에서 매우 정밀한 문양을 지닌 청동거울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유적에 대한 보고서가 발간된 지금, 이 갈동 출토 청동거울 2점은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이 거울들의 정확한 명칭은 다뉴세문경, 우리말로는 잔무늬거울이다. 작은 손잡이가 여러 개 달려있고 문양이 세밀하여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이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품이기 때문에 지금의 빛깔은 거무튀튀하지만, 제작 직후엔 은이나 놋쇠처럼 밝고 맑은 색을 냈을 것이다.거울이 발굴된 곳은 갈동유적의 5호 무덤과 7호 무덤인데, 이 중에서 보다 밀집된 무늬를 자랑하는 5호 무덤 출토품의 지름은 14.6cm, 무게는 447g이다. 둥글고 납작한 거울의 한쪽 면은 아무런 문양이 없이 매끄러워 무언가를 비추어 보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개성 넘치는 문양들이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다. 문양이 있는 뒷면을 '경배'(鏡背)라고 한다. 단면이 반원형인 경연(鏡緣)이 거울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가고, 경배의 안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있다. 경배를 장식한 문양들에 주목하자. 얇은 선으로 빽빽하게 채운 톱니무늬가 어지럽게 베풀어져 있지만, 천천히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2개의 톱니무늬가 서로 마주보며 결합하여 하나의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무늬의 조합이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개 구역 각각의 문양 구성은 동일하고, 다만 톱니의 날카로운 부분이 향한 방향이 다를 뿐이다. 7호 무덤 출토품은 4개의 영역으로 구별되지만, 톱니무늬의 조합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후기 청동기시대인들이 이토록 정교하게 새긴 무늬에 관한 미감과 정확하게 표현해낸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그 제작기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복잡하지 않은 무늬일 때에는 돌을, 갈동 출토품과 같이 복잡한 무늬를 새길 때에는 밀랍(蜜蠟)을 소재로 삼았을 것이라고 한다. 새길 때에는 컴퍼스의 원리를 이용하여 반듯한 원을 그리고 여러 차례 구획하여 그 안을 짧은 선으로 채웠을 것이다.만약 우리가 돌에 문양을 새겨 넣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거푸집이니 비교적 간단하다. 하지만 밀랍이라면 그 공정이 더 복잡하다. 우선 굳힌 밀랍으로 거울 모양을 만든다. 무늬를 꼼꼼히 새겨 넣는 것은 물론이다. 다음에는 밀랍을 점토로 두툼하게 감싼다. 이것을 불에 달구면 미리 뚫어놓은 구멍을 따라 녹은 밀랍이 흘러나오고, 남는 것은 단단하게 구워진 점토 거푸집이다. 다시 한쪽 구멍을 막고 남은 구멍으로 청동 녹인 물을 부은 후 충분히 식힌다. 이제 거푸집을 제거하고 숫돌로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으면 우리 눈에 익숙한 잔무늬거울이 완성된다. 이러다보니 밀랍 주형(鑄型)은 일회용이 되며, 점토 거푸집은 거울을 꺼내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만다. 잔무늬거울 중 똑같은 무늬를 가진 게 한 쌍도 없으며, 그 거푸집도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제작방법에서 찾고 있다.청동거울은 그 시절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였고, 제작을 위해 들어가는 자원과 공력을 감안했을 때 최고의 지배자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명품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은 거울을 목에 걸고 의식을 주관하는 시베리아 샤먼(주술사)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삼아 미래를 점치고 영혼을 들여다보았던 청동기시대 제사장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곤 한다.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2.07 23:02

22. 청동 은입사 용무늬 대야 - 고려 불교문화 깃든 금속공예품

국립전주박물관 미술실에는 지름이 78cm에 이르는 커다란 청동 대야가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국왕이나 지체 높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은빛 찬란한 용과 넝쿨무늬가 새겨진 이 청동 대야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에서 거행되는 아기 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의식이다. 관불의식(灌佛儀式)이라 부르는 이 의식은 불경에 묘사되어 있는 석가모니가 탄생했을 때 용왕이 공중에서 향수를 솟아나게 하여 신체를 씻겨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청동 대야는 아마도 관불의식에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대야에 새겨진 용은 석가모니부처 탄생 후 향수를 솟아나게 한 용왕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이 대야의 용이나 넝쿨의 모습, 입사기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12~13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입사'는 어떤 기법일까? '입사'란 금속기물에 문양을 파고 이물질인 금·은 등을 넣어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금사와 은사로 장식한 청동기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래된 장식기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기법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전해져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칼 등에 입사장식이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입사기법의 금속공예품은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는데, 향로와 같은 불교미술품이 주를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기술은 퇴보하였지만 촛대·담배합 등 여러 생활용품에까지 확대되었다. 입사기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는 기물에 문양을 그리고 그 문양을 그대로 홈을 파서 금사나 은사를 넣는 상감 방법이다. 두 번째는 정으로 바탕을 가로와 세로로 쫀 후 여기에 문양대로 금사와 은사를 박아 넣는 쪼이게 하는 방법이다. 특히 입사기법의 상감 방법은 도자기에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 탄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1.30 23:02

역사의 상흔 간직 … 145년 만에 고국 품으로

19세기 중엽 조선은 출몰하는 서양 선박과 이들의 통상 요구로 대외 정세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청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는 결국 천주교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탄압으로 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수천 명의 신도들이 처형당했다. 1866년(고종 3) 10월,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여 이른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으나 조선군 분전으로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프랑스군 강화도의 장녕전.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면서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종 340여 책과 기타 자료 등을 약탈했다. 이들의 외규장각에 대한 방화로 조선 왕실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외규장각의 귀중한 왕실 관련 자료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됐다. 프랑스군에 의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관된 외규장각 도서는 중국 도서로 분류되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5년 이곳에서 일하던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1991년 서울대학교는 정부에 외규장각의궤 등 297책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정부는 그 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반환을 추진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과 프랑스 간의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綬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1책을 전달하고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할 의사를 밝혔으나 반환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협상이 연기되거나 반환 방식에 견해 차이를 보이는 등 지루한 과정을 거쳤고 국내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서라도 무조건 반환시켜야한다고 주장하는 학술·시민단체의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운동이 확산되었다. 2010년 3월 협상은 다시 재개되었고 그 해 11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중 합의를 이뤄내 2012년 2월7일 양국 정부 간 합의문이 체결됐다. 이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 296책은 지난해 4월14일부터 5월27일까지 총 4회에 걸쳐 국내에 들어왔다. 이로써 1993년 돌아온 1권을 포함함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인 2011년에 고국에 돌아옴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외규장각 의궤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국에 머물러야 했던 역사적 상흔이기도 하나 또한 국민 모두의 염원과 각계 각층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루어낸 가슴 벅찬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의궤는 단지 한 때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세에 걸쳐 행하는 제도인 것이다."('세종실록'권41, 세종 10년(1428년) 9월4일 기사) 라는 500여 년 전의 기록처럼, 외규장각 의궤가 고국의 품에서 우리 후손들에게 만세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1.23 23:02

20. 의궤의 속 그림 기록, 도설과 반차도 - 조선 왕실의 행사 진행 한눈에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조선 왕실의 의궤는 그 내용이 문자로만 기록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궤에는 문자로는 풀어내기 어려운 사항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도설(圖說)과 반차도(班次圖)다. 도설은 행사에 사용되는 각종 상징물과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 제기, 악기, 가구 등의 기물, 행사 때 착용하는 특별한 복식 등을 그린 것이다. 도설은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으나 기물의 명칭, 그림과 함께 기물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분량·크기·장식 방법 등 설명을 같이 기록한 경우도 나타난다. 이러한 그림은 기물의 모습을 더 자세히 묘사하기 위하여 채색을 한 경우도 있었다. 반차도는 왕실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반차(班次)'라는 말은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도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궤 속의 반차도는 보통 이동하는 행렬도 형식으로 행렬의 중심이 되는 장면을 표현한다. 의궤 속의 반차도는 행사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주제로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왕실 혼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는 국왕이 왕비를 궁으로 모셔오는 모습을 그린 '친영반차도'(親迎班次圖)가, 국가의 장례가 기록된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에는 왕의 시신을 왕릉까지 모시고 가는 행렬인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가 수록되었다. 이 외에도 책봉의식이나 왕실 어른의 덕을 기리며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 사용되는 인장(印章) 교명(敎命·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국왕이 내리는 문서) 등을 궁으로 모시고 오는 반차도도 있다. 반차도는 손으로 직접 그린 것도 있으나 반복되는 인물이나 기물과 같은 경우 목판으로 외곽선을 찍고 색을 덧칠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색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목판으로 찍어 놓은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그림을 그리지 않고 행차의 각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직위와 성명을 적어 놓은 사례도 있는데 이 경우는 반차식(班次式)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의 실제 진행 모습을 그림에 담은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그림으로 배치하여 왕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 받고 몇 차례 예행연습을 하여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하였다. 즉,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직책, 의장물의 수와 모습, 배치 등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도상연습용 자료였다. 행사의 결과를 수록하는 의궤에서 반차도만큼은 앞으로 진행할 행사를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와 같이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기록이 없어서 조선시대 행사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의궤에 남겨진 반차도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 행사가 얼마나 엄숙하고 성대하게 이루어졌는지 느껴볼 수가 있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1.16 23:02

19)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 - 비단 표지에 고급 종이 …조선시대 편찬 기술의 결정체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행사가 있으면 그 과정과 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의궤로 편찬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면 한 부의 의궤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보통 다섯 부에서 아홉 부를 만든 것이다. 그 중 한 부는 반드시 왕이 보는 '어람용' 의궤로, 나머지는 행사와 관련된 중앙 관청이나 지방사고 보관용으로 만든 '분상용' 의궤였다. 한 행사 때 만들어진 의궤에는 같은 내용이 수록되었지만, 어람용 의궤는 왕이 보았던 의궤였기 때문에 분상용 의궤와는 다르게 특별하게 제작되었다. 우선 표지에서부터 어람용 의궤는 분상용 의궤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초록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초록색 비단은 구름무늬, 봉황무늬, 연꽃무늬 등으로 짜여진 것도 있고 아무 무늬 없이 제작된 것도 있었다. 책의 가장자리에는 여러 장의 종이를 철하는 변철이라는 긴 막대와 같은 금속이 사용되었는데 변철은 고급 놋쇠로 만들었다. 이 변철은 머리가 둥근 박을못 5개로 고정하였고, 박을못도 역시 국화 모양의 판으로 고정하였다. 어람용 의궤의 종이는 초주지라는 고급 종이를 사용하였다. 사실 초주지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방법이 전해지지 않아 현재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현재 남아 있는 의궤를 통해 본다면 초주지는 다른 종이에 비하면 매우 두껍고 발색이 잘되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변색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의궤 중에는 만든 지 300년이 지난 것도 있는데 이를 보면 바로 얼마 전에 제작된 것이라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초주지의 질이 얼마나 좋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분상용 의궤의 표지는 베로 만들고, 초주지보다는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를 사용하였다. 행사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의 속지 역시 어람용 의궤는 분상용 의궤와는 달리 제작되었다. 우선 속지의 각 면에는 붉은 색 테두리와 세로 줄이 그어져 있는데 이를 인찰선(印札線)이라 한다. 그 간격과 굵기가 일정하여 마치 판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조선시대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 화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그은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글자도 당시 공식문서나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한 사자관이 해서체로 단정하게 써내려갔다. 수백 페이지에서 많게는 만 페이지가 넘어가는 어람용 의궤의 인찰선과 글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것을 보면 어람용 의궤 제작에 들어가는 공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림 역시, 분상용 의궤가 반복되는 인물이나 기물은 도장으로 찍고 일부 그림이나 색채는 생략한 반면, 어람용 의궤는 도화서 화원들이 반복되는 인물을 일일이 손으로 그리고 색상 또한 선명하게 채색하였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등장 인물이 총 1299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많은 인물을 도화서 화원들이 일일이 붓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듯 어람용 의궤는 그 재료에서 제작 방식에 이르기까지 분상용 의궤와는 달리 많은 공력을 들어 정성껏 제작되었다. 즉, 어람용 의궤는 조선시대 각 분야의 최고의 역량을 보여준 결정체였던 것이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1.09 23:02

18. 외규장각 의궤 - 조선 사회상 눈앞에 펼쳐진 듯

지난해 14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외규장각 의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고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상흔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재다. 그래서 외규장각 의궤의 수난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아도 의궤가 무엇인지, 외규장각 의궤가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중요한 행사나 사업을 하면서 그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행사가 끝난 뒤 결과를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했다. 이것을 '의궤'(儀軌)라고 한다. '의궤'에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 담당 관청들 간에 주고 받은 문서, 참여하는 자들의 명단, 사용된 물품, 비용 등이 빠짐없이 기록해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각 분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 특히 궤범은 '어떠한 일을 판단하거나 행동하는데 본보기가 되는 규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합 보고서의 기능을 가진 의궤가 왜 '본보기'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의궤는 단순히 과정과 결과를 수록한 책의 기능에 멈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후에 유사한 국가 행사나 사업이 있으면 이것을 시행하는데 참고자료가 되어 시행착오 없이 행사를 치르게 하는 하나의 모델로서 기능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체계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조선 왕실의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렇다면 '외규장각'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조선 22대 왕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왕들의 글과 글씨, 왕실 인장, 왕실 족보와 같은 중요한 자료를 보관하는 일종의 왕실도서관의 역할을 했다. 이후 정조는 1782년 강화도 행궁(行宮)에 규장각의 분관(分館)과 같은 성격을 띈 외규장각을 설치해 창덕궁에 있던 왕실 관련 자료를 옮겨 보관하도록 했다. 바로 이때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이 보던 어람용(御覽用) 의궤(儀軌)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외규장각은 조선 왕실 문화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라고 판단되었던 강화도에 1866년 프랑스군이 침입하였다. 이른바 병인양요라 불리는 사건으로,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반격으로 퇴각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강화도 행궁을 비롯한 외규장각 건물이 소실되었다.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실 관련 자료들도 이때 대부분 재로 변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철종 연간 외규장각에는 7000여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니 이때 불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골라 프랑스로 가져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하였다. 이 의궤를 '외규장각 의궤'라고 하는 것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의궤는 중국 도서로 분류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또 한 번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75년 재불학자인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 이후 정부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총 297권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른 나라에 있어야 했던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왕이 보던 의궤가 선조들의 고향 전주에 찾아왔다. 25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조선왕실의 위엄, 외규장각 의궤'에서 외규장각 의궤가 간직한 뜻 깊은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2.11.02 23:02

17. 대한제국 국새 - 치욕의 역사 모두 기억하는 '황제의 상징'

1897년 10월12일(음력 9월17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올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에 등극했다. 이때의 의례를 기록한 책이 '대례의궤'다. 의궤에는 황제에 오르는 일에 대한 논의과정, 의례의 진행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국새를 제작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새는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에 모든 의례에 황제와 함께 하였고, 황제의 옆 자리에는 항상 국새를 올려놓는 보안이라는 상이 놓여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국새는 모두 3개다. 대한제국 이전에도 국새가 만들어졌고 사용되었지만 대한제국의 선포와 더불어 모두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대한제국의 국새는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897년 이후 대한제국의 국새는 여러 용도에 맞게 제작되어 사용됐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에 병합되면서 국새는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으로 반출됐다. 일본이 패망한 뒤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국새들은 맥아더를 통해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이때 모두 6개의 국새가 반환되었고 1948년에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이중 3개는 없어지고 3개의 국새만이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게 되었다. 국새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현대사이기도 하다.지금도 고궁박물관에는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를 비롯한 왕실, 황실의 보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보는 의례에 사용되었던 상징물이다. 실제 나라의 행정에 쓰인 국새는 대한제국의 국새뿐이며, 실제 이 국새가 찍혀진 문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제고지보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국새로, 칙임관으로 분류되는 고위 관리들의 임명장에 찍었다. 대원수보는 무관들의 임명장과 군사 명령문서에 찍었다. 그리고 칙명지보는 하위 관리들의 임명장과 황제의 명령문서에 찍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국새는 길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와 늘 함께 했던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대례의궤를 통해 국새의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제고지보는 황금으로 주조하고 금도금을 하였고, 무게는 10근 14량이며 용모양의 꼭지를 장식하였다. 대원수보와 칙명지보는 은으로 주조하고 금도금하여 만들었다. 국새에 새겨진 글씨는 홍문관 학사인 민병석이 썼다. 국새는 만드는 데에는 전흥길 등의 보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인들이 참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자원들이 동원되었다. 이문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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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6 23:02

16. 남원 출토 사리기 - 연꽃 모양 독특한 조형미 뽐내

사리기(舍利器)는 사리(舍利)를 모시기 위한 장치이며, 주로 탑에 봉안되었다. 사리는 원래 석가모니의 유골을 일컫는 말인데, 석가모니 열반 후 이루어진 다비에서 수습된 사리는 처음에는 여덟 개의 탑에 봉안하였다가 이후 8만 4천 탑에 나누어 넣었으며, 불교의 확산과 더불어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도 전해졌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리가 모두 석가모니의 유골, 즉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 목탑태화사 탑통도사 금강계단 등 극히 일부에만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희귀한 진신사리를 대신하여 법신사리(法身舍利)를 주로 봉안하였는데, 불상과 불경 같은 것은 물론이고 금은수정마노 같은 보석 등도 법신사리의 한 종류이다.이처럼 귀한 사리는 3중, 4중으로 장엄하였다. 사리는 수정이나 유리용기에 담았으며, 이는 다시 금이나 은으로 만든 사리내함에 넣었다. 이 사리내함은 다시 금동으로 만든 외함에 넣어 탑에 봉안하는 것이 통례였다. 국립전주박물관에는 매우 특이한 사리기가 있다. 이 사리기는 비록 금이나 은으로 만든 내함은 없지만, 다른 사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조형미를 뽐낸다. 연꽃에서 가지가 뻗어 다시 활짝 핀 연꽃으로 구성된 대좌 위에 4과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병을 올려놓고, 그 위에 사모집 형태의 뚜껑을 덮었는데, 측면에는 넝쿨무늬와 보살상을 투각하였다. 아울러 연꽃에서 뻗은 4개의 작은 연꽃 위에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사천왕이 올려져 있다. 투각된 사리외함의 뚜껑이 불국사 석가탑 사리기와 유사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8세기~9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연꽃 위에 사리를 올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진흙 속에서도 청초한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연꽃. 이 연꽃을 불교에서는 근원적인 가르침으로 여겼으며, 이 꽃을 통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믿었다. 아울러 진리의 부처,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세계를 연화장 세계라고 불렀다. 부처 그 자체를 의미하는 사리를 가장 청정하게 봉안하고자 한 의지가 담겼을 것으로 여겨진다.이 사리기가 국립박물관에 오게 된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 7월 30일 최모씨에게서 압수하였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아마도 최모씨가 불법적으로 입수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언제 어디에서 입수한 것이 소상히 밝혀졌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남원 어느 절터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남원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은 실상사 삼층석탑 2기와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이 사리기는 두 탑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통일신라시대 사찰이 남원에 있었던 것일까.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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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9 23:02

15. 무신년진찬도병풍 - 1848년 왕실 잔치 세밀한 묘사

국립전주박물관이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이 한창이다. 의궤를 들여다보면 글씨만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행렬도나 행사에 쓰인 각종 기물이 그림으로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이를 그림으로 그려 기록했다. 궁중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들을 기록한 그림을 이른바 '궁중기록화'라 일컫는데, 크게 의궤에 수록된 그림과 실제 거행된 국가 의식 속 모습을 재현한 궁중행사도로 나뉠 수 있다. 의궤도와 궁중행사도는 모두 나라의 전례의식을 담은 그림이지만 의궤 그림은 보고를 목적으로 행사의 전반을 기록해 후대 참고자료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궁중행사도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념화로 출발한 그림이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같지만, 직접적인 제작 목적 및 경위형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개념의 그림인 것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무신년진찬도병풍'은 궁중행사도로 1848년(헌종 14)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의 비)의 육순과 왕대비 신정왕후(익종의 비)의 망오(41)를 맞이하여 창경궁에서 거행된 잔치를 그린 8폭의 병풍이다. 이처럼 진찬은 왕왕대비대왕대비의 생신이나 왕의 등극을 기념하는 잔치로, 왕실의 행사였던 만큼 '무신진찬의궤'(서울대 규장각 소장)가 함께 전하고 있다.8폭의 병풍은 화면 왼쪽부터 행사 순서대로의 모습이 진행되는데, 12, 34, 56폭은 각각 한 화면이고 마지막 8폭에는 진찬에 참석한 명단인 좌목이 적혀 있다. 12폭은 진찬일 전날인 3월 16일 인정전에서 열린 진하례(陳賀禮), 34폭은 3월 17일 통명전(通明殿)에서 열린 진찬(進饌), 56폭은 같은 날 밤에 열린 야진찬(夜進饌), 7폭은 19일 향연을 마친 후 수고한 관원들을 위로하는 잔치인 익일회작(翌日會酌)의 모습을 담고 있다.왕실의 화려한 행사를 기록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들은 일반 회화와 달리 화면을 꽉 채울 정도로 화사하게 그리는데, 하나하나 요소를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인원과 물량이 동원된 잔치인 만큼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우선 그림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왕을 직접 그리지 않고 어좌와 일월오봉도로 왕의 자리만을 그렸던 게 특징이다. 존엄하신 임금을 함부로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밤에 열린 잔치를 그린 56폭에는 건물 곳곳에 배치한 붉은 등이나 촛대가 있어 잔치가 열린 시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흥겨운 자리인 만큼 각각의 화면에는 화려한 군무를 추는 무녀들이 등장하고, 화면 장막 아래에는 열심히 음악을 연주하는 무리도 보인다. 화면 구석구석에 등장하는 분주히 행사를 준비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궁중행사도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이렇게 대규모의 인원과 물량을 동원하면서 크고 작은 향연을 베풀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은 철저한 유교 질서 안에서 생성된 '국조오례의'와 같은 엄격한 의례 하에 정치를 펼쳤다. 따라서 크고 작은 궁중행사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펼치고 경로효친사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한 교훈적이고 감계적인 목적이 컸던 것이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조선왕실의 위엄, 외규장각 의궤'에서는 1887년(고종 24) 대왕대비인 신정왕후의 팔순을 기념하여 열린 잔치를 그린 '정해진찬도'(丁亥進饌圖)라는 또 다른 진찬도를 감상할 수 있다. 언뜻 '무신년진찬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8폭이 아닌 10폭의 화면에 진찬의 과정을 더 상세히 담았다. 불과 약 40년 후에 그려진 같은 성격의 그림에서 궁중행사도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권혜은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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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2 23:02

14. 부안 죽막동 유적 출토품 - 고대 해양제사 가장 확실한 증거

변산반도의 서쪽 끝 해안 절벽 위에 있는 부안 죽막동 유적. 전라북도의 서해안 지역에서 발굴조사 된 최초의 유적이다. 이 곳이 국립전주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학계에 알려진 지도 벌써 21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고대 해양제사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그 입지를 더욱 넓혀가고 있다.바다의 두 가지 얼굴에 대해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다. 생명을 잉태하고 풍요를 안겨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때로는 무자비하고 사나운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 삶의 터전과 인명을 무로 돌린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현대인들도 예외가 아니거늘, 고대인들은 거대한 바다 앞에서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복 돋을 수 있었을까?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었다. 항해의 안전을 위해 정성스레 기원을 올렸던 것이다. 그 근거는 죽막동 유적에 남아있었던 유물들이다. 서해 바다로 돌출된 절벽 위에 위치하여 바다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위치이지만 사람이 상시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곳에 무수한 그릇 조각들이 겹겹이 퇴적되어 있었다. 쇠로 만든 칼과 거울, 흙을 빚어 만든 사람과 말 인형, 갑옷이나 칼의 석제 모조품과 같은 특별한 유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유물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삼국시대인 4세기~7세기에 걸쳐 이곳에서 제사행위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의 유물들도 적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유적을 둘러싼 신앙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유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출토된 그릇들 중에는 백제산이 많지만 암자색의 표면에 빗 모양의 도구로 파도 무늬를 시원하게 그린 긴목항아리는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다. 옛 죽막동 주민들의 솜씨일 것이다. 쇠창들은 커다란 항아리에 담긴 채로 발견되었다. 무기는 제물의 품목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석제 모조품은 일본 후쿠오카현 오키노시마섬, 오카야마현 오오히시마섬 등 일본의 해양제사유적에서 더욱 많이 발견되고 있어, 고대 한일 교류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유물이다. 중국 남조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약을 입힌 항아리들 역시 죽막동 유적의 국제성을 여실히 알려준다.죽막동 유적의 고대 제사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람을 항해에 활용해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육지와 섬을 이정표 삼아 노를 저어 연안을 도는 항해술이 고작이었다. 노를 젓는 수부들에게 죽막동은 소중한 휴식처이자 피난처였다. 좋은 계절이 되자 죽막동의 항구는 각국에서 온 배로 북적였다. 상인들이 즉석에서 흥정을 벌이고 정보도 교환했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죽막동을 찾아온 내륙 사람들이 적당한 배를 찾아 부두를 기웃거리는 사이, 지체 높은 관리들은 일꾼들에게 제물로 쓸 물품의 하역을 재촉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절벽 위에서 성대한 제사가 시작됐다. 백제인, 가야인, 왜인 등 다국적으로 구성된 참가자들이 각자 가지고 오거나 현지에서 장만한 물품들을 차례대로 헌공했다. 출신지나 언어는 다양했지만 그곳에서 만큼은 소망하는 바가 다르지 않았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제사에 쓰인 기물들을 깨뜨렸다. 이미 신에게 바쳐진 물건인 만큼 사람의 손을 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항해가 시작됐다. 어떤 배는 백제의 수도를 향해 북쪽으로, 어떤 배는 왜인이 산다는 땅을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고대의 역사서에 남아 있는 수 많은 국제교섭 기록의 숨은 공로자는, 어쩌면 죽막동을 거쳐 위험한 바다와 맞서며 길고 고된 항해를 이겨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일지도 모른다.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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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05 23:02

13. 익산 원수리 출토 순금제 불상 - 관람객이 가장 사랑하는 전시품

지난 6월 국립전주박물관이 '관람객이 뽑은 박물관 10대 유물 선정 이벤트'를 했다. 여기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전시품이 바로 익산 원수리 출토 순금제 불상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보물을 제치고 불과 5cm 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불상이 눈길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이 순금불상은 1963년 8월 6일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살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다. 이 순금불상이 발견된 장소는 마을사람 사이에서 이미 독적골 절터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그런데 관람객이 가장 사랑하는 이 순금불상이 금은방에 팔려 금반지가 될 뻔한 적이 있다. 바로 이 불상을 발견한 사람이 충남 논산의 한 금은방에 팔러갔다가 금값으로 여섯 돈을 쳐주겠다는데 실망하고 돌아서는 찰나 순경이 이를 발견하여 현재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부처의 모습은 불교경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몸에서 황금빛이 난다는 내용이 있다.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려면 황금으로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불상 가운데 순금으로 만든 불상은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2구와 익산 원수리 출토 순금제 불상 1구 등 3구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부터 황금은 매우 귀하고 비싼 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불상은 철이나 동과 같은 금속, 나무, 흙, 돌로 만들었으며, 황금빛을 내기 위해 도금을 하였을 뿐이다.불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취했다는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역삼각형 얼굴, 오른쪽 어깨 위를 살짝 걸친 옷자락, 대좌 등의 형태는 중국 원대 성행하였던 네팔과 티베트의 불교인 라마교의 불상과 유사하다. 불상의 뒷면에 '男 善 人 辛丑正月日 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로써 신축년 1월에 김모라는 사람이 발원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에서 네팔과 티베트 불상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축년은 1361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상단에는 고리가 하나 달려 있는데, 여기에 줄을 꿰어 마치 목걸이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람객이 이 불상을 국립전주박물관 대표 유물을 꼽은 이유는 아마도 역사적 가치가 높다거나 예술성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불상을 지닌 사람의 삶을 지켜주고 소원을 들어주었던 부처의 영험함을 느꼈던 게 아닐까.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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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1 23:02

12. 완주 갈동유적 1호 무덤 출토 청동기 거푸집 - 하나의 틀로 '한국식 청동칼' 세형동검·청동창 제작

완주 갈동의 청동칼 거푸집이 빛을 다시 본 것은 무려 2100년 만의 일이다. 무덤 속에 함께 묻힌 주인이 생전에 가장 애지중지했던 물건일지도 모른다. 귀한 청동칼을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2003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의 갈동마을과 양동마을 사이에 새로운 도로가 생겼다. 이곳에 남아있던 유적이 도로 건설로 파괴되기에 앞서 문화재 발굴이 이뤄졌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이 70여 일에 걸친 조사 결과 끝에 낮은 언덕 위에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4C ~ 기원전 1C청동기가 주로 쓰였지만 점차 철제품의 비중이 커졌던 시기)의 움무덤 3기가 확인되었다.그중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푸집이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오늘날이야 뛰어난 철제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지만, 쇠를 부릴 기술이 모자랐던 당시에는 녹는 온도가 보다 낮았던 청동기가 주력 생산품이었다. 구리와 주석을 녹인 주물을 미리 만들어 놓은 거푸집에 부어 식히면 우리에게 익숙한 청동기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정밀한 거푸집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갈동 출토 거푸집의 원석은 곱돌(활석)이다. 만지면 양초처럼 매끄럽고 쉽게 긁힌다. 무언가를 새기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당시의 장인은 거푸집으로 쓸 곱돌을 구하고 나면, 알맞은 크기와 형태로 다듬고 표면을 갈아 평탄한 면을 만들었다. 다음에는 원하는 청동기의 모양을 평면 위에 설계하고 그 안을 파냈다. 새길 때 쓰는 도구로는 더 단단한 돌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면을 가진 청동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틀이 하나 더 필요했다. 두 개의 틀을 만들어 새긴 면을 서로 포개면 한 세트의 거푸집이 완성되었다. 갈동 출토 거푸집의 두 틀에 새겨진 주형의 외곽선이나 깊이는 서로 거의 오차가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장인은 이렇게 포개진 거푸집을 세우고 미리 뚫어 놓은 구멍으로 녹인 청동 물을 부어 넣었다. 거푸집 속에서 주물이 굳혀지기를 기다린 뒤 떼어내 숫돌로 표면을 매끄럽게 하거나 날을 세우면 이윽고 하나의 청동기가 탄생됐다. 청동기는 당대의 최첨단 기술이 결집돼 만들어진 신분과 의례의 상징물이었다.완주 갈동유적 출토 거푸집은 두 개가 한 세트를 이루는데 각각 '한국식 청동칼'이라고도 부르는 세형동검의 주형이 새겨져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두 개 중 하나의 반대면에 청동창의 주형도 있다는 것. 하나의 거푸집으로 청동칼과 청동창을 제작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완주 지역은 초기철기시대 중심지 중 하나로 손꼽을 만한 곳이다. 근래에 조사된 갈동, 신풍, 덕동 유적의 대규모 무덤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 다양한 금속제품들은 전국 어느 유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더 값지다. 무엇보다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한국식 청동칼의 거푸집이 여기서 나온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교역이 아닌 자체 생산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서 역사적으로 수준 높은 선사 문화의 근간에는 풍부한 생산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 어쩌면 맛과 멋이 가득한 예향의 고장 전북의 전통은 2100년 전에 튼튼한 뿌리를 내려놓은 것 아닐까.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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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7 23:02

11.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1960년대 전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 1호변에 자리한 낮은 언덕.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그 언덕에는 북쪽으로 기운 석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국보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옛 모습이다. 그렇게 기울어 있던 석탑은 1965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있었던 석탑 중수를 통해 오늘날의 번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중수하던 중 1층 지붕돌 윗면과 심초석에서 국립전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품이자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인 금강경판과 함, 금제 사리함과 수정병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왕궁리 5층석탑은 흔히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통일신라 석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처럼 백제 석탑을 연상시킨다. 이 때문에 석탑을 삼국시대 백제에서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견해, 통일신라 초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이와 달리 나말여초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등 다양하게 의견이 제기되었다. 언뜻 보기에 백제 석탑과 같아 보이지만, 이 기단부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한 문경,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 석탑과 유사하다. 이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할 때 경북 북부지역 석탑의 기단을 모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멀고 먼 경북 북부지역의 석탑을 따라했을까. 주지하다시피 문경은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다. 왕궁리 5층석탑 조성 시 견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백제 의자왕의 숙분을 씻겠다고 공언한 견훤이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었던 '왕궁평'에 세운 기념비적 조형물이 바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아니었을까.이곳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와 금강경판 역시 석탑과 마찬가지로 그 조성시기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특히 최근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뒤에는 삼국시대 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판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왕이 제석사지 탑에 봉안하였다는 '반야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과 함께 10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금동불입상이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금강경판과 사리함이 백제통일신라 혹은 후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식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탑에 이러한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시기가 후백제가 익산지역을 경영하던 10세기 초라는 점이다. 최근 왕궁리 5층석탑 조사에 참여하였던 정명호 전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왕궁리 5층석탑 중수에 참여하였던 선생의 보고서가 익산 왕궁리 5층석탑과 사리장엄구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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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31 23:02

10. 사랑방 가구 - 검소·간결…'선비의 품격' 담겨

조선시대에는 국가통치이념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의 역할과 지위가 엄격하게 구분돼 있었다. 한 집안 내에서도 생활공간이 분리 돼 여성공간인 안방과는 별도로 남성이 거처하는 사랑방(舍廊房)이 마련되었는데 특히 선비들에게 있어 사랑방은 주거 공간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선비들은 유학의 이념과 도덕을 바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생각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학문을 연마했다. 더불어 그들이 필수 교양으로 생각한 것은 시서화를 중심으로 한 예술 활동이었다. 시를 읊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생각을 주고받는 일련의 활동을 통해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랑방은 학문을 연마하는 문방이자 예술 활동의 공간, 뜻이 맞는 벗들과 교유 장소이기도 하였다. 사랑방은 학문과 예술의 장소인 동시에 주인의 안목과 격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선비들은 사회지배층이지만 부귀를 나타내는 화려함을 속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랑방 역시 우아하면서도 깔끔한 멋이 배어날 수 있도록 꾸몄다. 검소함을 생활 이념으로 하는 선비의 곧고 맑은 정신은 방에 갖추어 두는 가구에도 나타나 번잡한 장식이나 과다한 배열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 내부가 좁고 천장이 낮은 한옥의 구조와 어울리도록 작고 단순한 가구가 선택되었다. 사랑방 가구는 대부분 간결하고 검소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방 가구에 사용된 재료로는 광택이 없으며 시각적으로 부드럽고 소박한 느낌의 오동나무, 소나무가 주로 사용되었고 느티나무와 먹감나무의 무늬를 이용한 장식으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살렸다. 사랑방에서 사용한 가구의 종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안(書案)이다. 작은 책상의 일종인 서안은 천판(天板가구에서 가장 위에 놓이는 판)과 다리로 구성된 단순한 것이 선호되었다. 특히 글을 읽을 때 정신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하여 장식을 최대한 절제하였으며 심지어 재료조차 무늬결이 거의 없는 나무를 선택했다. 서안의 옆에는 벼루를 보관하고 종이, 붓, 먹 등을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연상(硯床)이 놓여졌는데 이 또한 자신의 주변을 항상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선비들의 생각이 반영된 가구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방의 좌우 벽면에는 문갑, 사방탁자 등을 놓았다.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거나 책과 문방용품을 진열하는 문갑과 사방탁자는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단순하게 고안되었다. 특히 사방이 트이고 기둥과 널판으로만 구성된 사방탁자는 조선시대 목가구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 감각에 가까운 목가구로 평가받는다. 단순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절제의 미덕,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사랑방 가구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철학과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고전(古典)이 되고 있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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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4 23:02

9. 장수 남양리 출토품 - 철기·청동기 공존…사회 격변기 지도자 유물 고스란히

인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구분하면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철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철기시대에 살고 있다. 철기를 쓰기 전에는 구리에 주석을 섞어 청동기를 제작했다. 기계적 강도가 월등한 철보다 구리를 먼저 사용했던 이유는 녹는 온도가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초기철기시대라는 시대 구분이 있다. 대략 기원전 3~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철기가 처음으로 일선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름답고 정형화된 청동기가 만들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전라북도에서 알려진 초기철기시대의 유적들은 대개 금강과 만경강의 지류를 낀 서부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전북 동부 산간지대에도 주목할 만한 유적이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형성되었던 장수 남양리 유적이다.1989년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문화재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동부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 유적의 존재를 감지한 순간이었다. 1996년 말부터 남양리 일대에서 이루어진 경지정리사업 중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일부 노출되자 학술조사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졌고, 마침내 1997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두 차례에 걸친 문화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남양리 유적은 금강으로 흘러드는 크지 않은 지류를 따라 펼쳐진 평지에 위치했다.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무덤들이 보통 낮은 언덕 위에 모여 있었던 것에 비한다면 꽤 독특한 장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래밭과 강자갈이 넓게 펼쳐진 이곳에서 5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땅을 깊게 파고 벽면을 따라 강자갈을 벽돌처럼 돌린 구조였다. 부식되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그 안쪽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이 들어갔을 것이다.출토된 유물은 검은간토기나 덧띠토기와 같은 그릇들을 포함하여 청동제 잔무늬거울 및 한국식동검과 창), 그리고 철제도끼 등이다.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 청동제품인 잔무늬거울과 한국식동검이 4호 무덤에서 함께 나왔다. 특히 잔무늬거울의 뒷면에는 기하학적인 톱니무늬(鋸齒文)와 문살무늬(格子文)가 남아있어 가장 늦은 시기의 형식으로 보인다. 또한 3개의 손잡이가 달려있는 점도 흔하지 않은 특징이다. 철제도끼는 앞에서 보면 사각형이지만 옆면에서 보면 납작한 삼각형으로서, 초기철기시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당시는 철기보다 청동기가 많이 쓰인 시기였다. 제작에 투입됐을 인력과 재화로 보아 청동기는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청동기를 지배자의 소유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런데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 바닷길과 서북한 지역을 통해 철기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쉽게 깨지는 게 흠이었던 청동기에 비해 강도가 뛰어났다. 처음에는 도끼와 같은 철제 농공구가 사용되어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무기로서의 가능성도 곧바로 발견했다. 게다가 철광산이 속속 개발되고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곳곳에서 철기를 자체생산하기 시작했다. 청동기의 역할은 점차 의례행위와 신분의 상징물로 축소되었고 실용기의 자리를 온갖 철제품들이 차지했다. 또한 기존의 구리나 주석을 대신하여 철 소재나 완제품이 교역품으로 각광 받았을 것이다. 장수 남양리 출토품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직면했을 사람들의 흥분과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기원전 2세기 무렵 장수 남양리 유적에 묻혔던 지배자는 자신 앞에 철제 도끼를 내려놓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청동제 칼과 철제 도끼를 맞부딪혀 보며 감탄하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철이 지배할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며 전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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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7 23:02

8. 전주 한지 '완판본' - 조선시대 출판 메카 전주의 찬란한 유산

전주는 인쇄와 출판의 중심지였다. 전주에서 출판한 책을 완판본(完板本)이라고 한다. 완산은 전주의 또 다른 이름이며, 책을 찍어낸 목판에 지명을 붙일 만큼 유명하였다. 전주는 조선시대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어 행정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인근에서 질 좋은 한지가 많이 생산되어 완판본의 화려한 시대가 열렸다.조선 시대에는 다량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였다. 중앙에서 모든 책을 인쇄할 수 없었기에 각 도의 감영에서 목판본을 새기게 하였다. 전라감영에서는 세종 10년(1428)에 '시경대전'(詩經大全), 세종 11년(1429)에 '예기대전'(禮記大全) 등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 이후 총 60여 종의 책이 간행되었고, 이 책들에는 '완영'에서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지방의 감영에서도 책을 찍어냈지만 책판이 남아서 전하는 것은 전라감영의 것이 유일하며, 5000여 점의 목판이 남아있다.다량으로 책을 찍어냈다 하더라도 책은 귀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관청에서 찍어낸 책들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민간에서도 장사할 목적으로 실용적인 책들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방각본(坊刻本)이다. 특히 태인에서 손기조가 간행한 '명심보감초'(明心寶鑑抄)(1664), 전이채와 박치유가 간행한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1676) 등은 가장 이른 시기의 방각본이다. 전주에서는 1810년에 하경룡이 간행한 '칠서'(七書)와 '칠서언해'(七書諺解)가 많이 보급되었다. 완판본이라고 하면 좁게는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의 한글 소설을 말하기도 한다. 1823년 최초의 목판 한글 소설인 '별월봉긔'가 출판된 이후 다양한 한글 소설이 출판되었다. 판소리계 소설로 '춘향전','심청전','심청가','화룡도','토별가' 등이 있고, '초한전','구운몽','삼국지' 등이 출판됐으며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완판본 한글소설은 딱지본이라는 새로운 책에 밀려 더 이상 인쇄되지 않았고, 책판들은 또 다른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 있다. 전주고보를 나온 윤규섭(尹圭涉)이 '문장'(文章) 2권2호(1940)에 쓴 '완판'(完板)이라는 글에 양씨가 운영하던 양책방(梁冊房)의 양승곤(梁承坤)으로부터 책판을 받아왔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1940년 3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귀중한 한글 소설목판 전주 서계서포로부터 400여판을 옮기어 대동출판사, 영구 책임 보관'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1939년 말에 전주에 있던 완판본의 책판들이 서울로 옮겨져 간 것이다. 이 책판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전주의 자랑이 이제 이야기로만 남게 되었지만 그 일부라도 다시 전주에 돌아오기를 기원해본다. / 이문현(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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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0 23:02

7. 익산 미륵사지 출토 녹유서까래기와 - 실용적·심미적 기능 동시에…미륵사와 함께 빛나던 기와

우리에게 미륵사지는 백제의 무왕(재위 600~641)이 된 서동과 신라의 공주였던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귀족 사택적택의 딸인 사택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세웠다. 우리가 알고 있던 러브 스토리와 사뭇 다른 내용으로 아연했던 기억이 있다.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을 덮은 돌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앞서 이야기한 사리봉안기와 더불어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 그리고 사리봉안 의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넣었던 금판, 금족집게, 은제관식, 구슬 등이 가득했다. 이러한 화려한 보물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것은 사리공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녹색의 유리판이다. 부처의 사리를 직접 담은 그릇이 유리제인 것을 보면,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보물들을 올려놓기 위해 유리만큼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사리공의 유리판이 제작된 곳은 미륵사지 북승방터 서쪽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미륵사지 조성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던 공방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공방터에서 발견된 도가니 안에서 똑같은 성분의 물질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리판은 동원과 중원의 금당터, 동탑 기단 외부 등지에서도 많은 유리판, 유리 장식 등이 발견되었다. 상상해 보시라. 1400년 전 불상이 모셔진 금당 바깥을 장식한 유리에 햇빛이 닿는 순간을. 아마도 찬란한 광채와 섬광을 내뿜었을 것이다. 이것을 멀리서 본 사람이라면 일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금빛으로 느꼈을 수도 있다.도가니에 모래 등을 넣어 끓인 유리물은 유리판이나 장식 이외에도 기와의 표면을 바르기도 하였다. 녹색 빛을 띠는 이러한 기와들을 우리는 '녹유기와'라 부른다. 물론 이 기와는 꽃잎 안에 인동무늬를 장식하는 등 매우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데, '백제의 미'가 여지없이 발휘됐다. 그런데 이것들은 한결같이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은 지붕 아래에 길쭉하게 나온 서까래에 고정하기 위한 못을 박았던 곳이다. 서까래 끝을 장식하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빗물이 들이쳐 서까래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실용적 기능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고자 한 심미적 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햇빛에 반짝이는 녹유서까래기와를 본 사람의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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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3 23:02

6. 남원 월산리 고분군 출토 갑주 - 전북 동부 산간지대의 가야 문화 알린 첫 유적

갑주란 전쟁터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데, 갑주의 실물자료가 확인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다. 삼국시대의 갑주는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와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 목이나 팔다리를 보호하는 부속구로 나뉜다.우리는 흔히 '가야'(加耶)하면 '철의 나라'를 떠올린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철제 갑주의 절반 이상이 가야 무덤에서 출토됐다. 하지만 가야인들이 백제나 신라 사람들에 비해 갑옷을 많이 만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가야 사회에서 철제 갑주가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은 특별했다.전북의 동부 산간지대에서 가야 문화를 알린 첫 번째 유적은 남원시 아영면의 월산리 고분군이다. 1982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 중 유적의 M1-A호분에서 철제 투구와 비늘갑옷, 목가리개가 출토됐다.월산리 고분군 철제 갑주와 부속구의 구성 요소는 기본적으로 직사각형 또는 사다리꼴의 철판이지만, 보호했던 신체의 위치에 따라 그 크기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각 철판의 곳곳에 뚫려있는 구멍들로 보아 원래는 가죽 끈으로 연결됐다. 월산리 M1-A호분의 투구는 세로는 길고 가로는 좁은 사다리꼴 철판들을 머리의 곡선에 따라 연결한 종장판주의 일종이다. 비늘갑옷은 길이 5cm, 폭 3cm 내외 철판인데, 원래대로라면 수백 장이 모여 하나의 갑옷을 이루었다. 목가리개는 착용자의 목을 보호하기 위한 비늘갑옷의 부속구이다. 가야에서는 원래 넓은 철판을 가죽이나 못으로 고정한 판갑옷이 유행했다. 5세기 이후 판갑옷을 대신하여 비늘갑옷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방어력이 훨씬 우수한 데다 신체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가야에까지 파급된 고구려 군사 기술력이 있었다.'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399년 가야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광개토왕이 보낸 보병과 기병 5만이 임나가라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안라인수병을 물리쳤다. 역사학계에서 임나가라와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가야와 고구려의 충돌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야인들이 고구려군의 발달된 군사 기술력을 확인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사건 이후 금관가야를 대신해 소가야와 대가야 세력이 새롭게 부상했다. 또한, 기마전술을 염두에 둔 북방 계통의 철제 갑주가 가야 사회에 확산되기도 했다. 삼실총이나 쌍영총과 같은 고분 벽화에 남아있는 고구려 무사의 갑옷이 가야에서 재현될 수 있었던 이유다.한편, 2010년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추가 조사 중 M5호분에서 또 다른 모양의 철제 투구가 비늘갑옷과 함께 출토됐다. 이 투구의 정수리 부분에는 높고 폭이 좁은 관모가 있었다. 이같은 형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학술적으로도 큰 가치를 갖는다. 1500년 전 운봉고원을 호령했던 가야 무사의 특별한 유품들을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곽동석)과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이 공동 기획한 특별전'운봉고원에 묻힌 가야 무사'(8월26까지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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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7 23:02

5. 남원 두락리 고분군 출토 원통모양그릇받침 - 균형미·실루엣 유연함 탁월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인 1989년 7월 25일은 남원 두락리 고분군에서 전북대 박물관이 조사를 시작한 날이다. 고분군의 분포 범위와 연대를 파악하는 조사였다. 그런데 전북대 조사단은 1982년 남원 월산리 고분군 발굴조사(원광대)와 1988년 남원 건지리 고분군 발굴조사(전북대)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전라북도 동부지역 가야 문화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북지역 가야 문화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성에도 공감했다. 조사 결과 6세기경의 가야계 토기와 함께 무덤 만드는 방식에서 두락리 고분군의 독창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두락리 출토 원통모양그릇받침은 당시 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릇받침은 삼국시대 백제, 신라, 가야지역에서 널리 쓰였던 기종이다. 그 위에는 대개 바닥이 둥근 항아리가 올려졌다. 두락리 1호분의 원통모양그릇받침은 항아리를 닮은 윗부분과 원통 모양의 중간 부분, 종을 닮은 아랫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곳곳에 삼각형과 사각형의 구멍(透窓)이 뚫려 있고, 세로 방향으로는 뱀 모양 세로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원류를 찾는다면 대가야의 그릇받침을 꼽을 수 있다. 대가야계 원통모양그릇받침은 다른 나라의 것에 비할 때 특히 안정감과 조형미가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두락리 1호분의 원통모양그릇받침은 균형미와 실루엣의 유연함에서 비교 대상을 찾아보기 어렵다.원통모양그릇받침은 그 범상치 않은 생김새만큼이나 특수한 용도를 가졌을 것이다. 가야에는 삶을 위한 그릇과 죽음을 위한 그릇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가야의 주거지 유적에서 발견되는 그릇과 무덤에서 출토되는 그릇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중 원통모양그릇받침이나 바리모양그릇받침, 긴목항아리처럼 무덤에 묻혔던 그릇은 화려한 문양과 다양한 장식을 가졌다. 또한 높은 온도에서 구워 표면이 매우 단단하고 회청색을 띄었다. 따라서 장례 의식과 같은 특별한 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두락리 고분군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이 백제와 가야 그리고 신라의 점이지대였던 전북 동부지역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을까는 자못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헌기록에서는 그들의 역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직 조사되지 않은 그곳의 수많은 유적들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제들에 앞서 세상 빛을 다시 본 두락리 1호분의 원통모양그릇받침이 우리의 관심을 재촉하는 듯하다.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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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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