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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익산 제석사지 출토 소조상 - 우아하고 부드러운 백제 조각

중국 남북조 시대 관음신앙의 영험을 모아 놓은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왕이 '지모밀지'(枳慕密地익산)에 제석정사를 지었는데, 무왕 40년(639년) 불이 나 불당, 7층 탑, 회랑 등이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실제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1.4km 떨어져 있는 절터에서 1942년 제석사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 절터가 백제 무왕이 창건한 제석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93년과 2007년~2009년 조사를 통해, 이 절터는 남북 중심축선상에 중문-목탑-금당-강담이 배치되어 있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가람배치였음이 밝혀졌다. 아울러 동서 회랑 사이의 거리가 100m, 중문과 강당 사이의 거리가 약 140m로, 백제 사찰 가운데 미륵사지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이다. 제석사지에서 북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7세기 전반의 연화문 수막새, 불에 탄 소조상, 벽체 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어느 때인가 폐사된 제석사지의 건축부재, 소조상 등을 버린 폐기장일 것으로 여겨졌다.폐기장에서는 346점의 불보살, 천인, 신장, 악귀, 동물 형상의 소조상 파편이 발견되었다. 천인상의 얼굴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백제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 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악귀상은 신장에게 밟힌 악귀를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과 유사한 것들이 부여 정림사지능사구아리 절터, 중국 낙양 영녕사, 일본 법륭사 등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소조상은 어떤 곳에 봉안되었을까. 이 소조상들은 중국 북위 낙양 영녕사나 일본 법륭사 목탑 안에 있는 소조상의 예로 미루어 볼 때, 1층 탑신 안 사천주 주변에 조성한 예불도나 변상도의 일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석사지 목탑을 장식했던 소조상은 언제 폐기되었을까. 그 시기나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절터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법등이 이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다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제석사가 전소되었지만 초석에 둔 불사리 수정병과 반야경을 담은 목칠함이 온전한 것에 감화 받은 무왕은 절을 다시 짓고 이것들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때 봉안한 반야경과 사리병은 어디로 갔을까?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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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3 23:02

3.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품 - 백제의 지방 간접 지배 방법 상징

삼국시대의 익산이라고 하면 서동요의 무왕과 선화공주를 떠올릴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다룬 이 이야기는 백제 무왕 때 제2의 수도로 부상했던 익산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시절 익산이 차지했던 높은 위상은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섰던 5C 무렵의 유물들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다.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에 위치한 사적 347호 입점리 고분군은 5세기 무렵 백제와 익산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입점리 칠목고개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의 중턱에 분포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그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1호분의 출토품들이 이번에 소개할 것들이다. 입점리 고분군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돌로 방을 짠 무덤(橫穴式石室墳)인 1호분에서는 관장식, 중국제 청자사이호, 장신구, 토기, 말갖춤, 철기류 등이 출토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금동신발(金銅飾履)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금은 잘 변하지 않는 성질과 특유의 색상을 지니고 있지만 원료를 구하기 힘들다. 또한 고급 금공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훈련과 기술을 갖춘 전문 공인이 있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금공제품은 부의 원천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청자사이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스스로 유약을 바른 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청자가 높은 가치를 가졌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던 만큼, 자기가 출토되는 유적들은 대부분 백제의 옛 땅에 있다.고고학자들은 익산을 비롯하여 금동관모나 금동신발이 출토됐던 유적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백제의 지방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 방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동제품과 청자사이호는 백제와 입점리 집단의 위계질서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입점리 1호분에 묻혔던 사람은 아마도 익산에 근거지를 두었던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독자성이 보장된 관계 속에서 관모의 수여를 통해 위계질서를 재확인했던 것이다. 백제가 익산을 직접적으로 지배했던 때는 무왕이 활약했던 시기인 6~7세기 때의 일이었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백제지역에서는 금동관모가 사용되지 않았다.지금까지 금동관모나 금동신발 등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을까. 아니면 고이 모셔두었던 것들일까. 아마도 금동관모는 모자처럼 정수리에 올리고 끈을 둘러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동신발은 평소에 신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장송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까./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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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6 23:02

2.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板佛) - 백제의 대중국 교통로·중요한 남방 교통로 입증

1980년 3월 7일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탄상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이 집 근처 자신의 밭(대목리 산29번지)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던 중 불상이 새겨진 작은 동판 4개를 발견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익산 등지에서만 확인되던 백제의 불상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발견된 4점의 크기나 조각은 제각각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동판(7.37.8cm)에는 화려한 장막 아래 부처와 꽃을 든 두 구의 보살을 새겼다. 두 번째로 큰 것(6.86.8cm)에는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 나한상을 조각했다. 세 번째로 큰 것(8.85.0cm)에는 감실 안 나한상을 상하 7구씩 총 14구를 조각했으며, 가장 작은 것(3.56.1cm)에는 감실 안에서 선정하고 있는 부처를 새겼다. 이 조각상들은 서산 마애삼존불,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삼존불 등 삼국시대 7세기 중엽 불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650년 무렵에 백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의식이나 예배의 대상으로는 작은 이 판불을 어떻게 사용됐을까. 한 편에서는 큰 판에 부착하여 벽면을 장식됐을 것으로 여겨졌고, 또 다른 편에서는 가장 큰 판불에 달려있는 네 개의 다리와 판불 가장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는 점을 근거로 얇은 판을 두드려 만드는 압출불(壓出佛)을 만들 때 썼던 틀로 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표면에 대한 성분 분석 결과 금(Au) 성분이 나와 압출불의 틀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사찰에서 개금불사가 발견되는 데다 도금은 후대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압출불의 틀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이 판불이 발견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불상은 부여, 공주, 익산 등 중요한 도시와 백제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 예산, 서산, 태안 등에만 발견됐다. 이 판불이 출토된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가 백제에서 중요했던 곳이라는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판불이 발견된 2년 뒤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서도 백제 석불 2구가 발견됐는데, 백제의 중방성으로 여겨지는 고부와 매우 가까운 곳이다.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과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은 백제가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뿐만 아니라 중요한 남방 교통로를 뜻한다 하겠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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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9 23:02

1. 전(傳) 낙수정 동종 - 천년 前 전주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 준 동종

유물은 시대의 거울이다. 유물을 통해 당시대 삶과 문화를 읽을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있어도 무심코 간과해온 지역의 유물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자리를 마련했다. 1999년 7월 다카하라 히미꼬(高原 日美子)라는 여인이 일본 후쿠오카현청교육위원회를 방문하여 한국 종 1구를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위원회는 여사에게 원 소유국의 문화기관에 기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을 하였고, 고심 끝에 여사는 같은 해 10월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할 것을 약속했다. 같은 해 11월 5일 동종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을 떠난 뒤 실로 73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이 동종은 2001년 9월 21일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동종이 국립전주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이유는 일제강점기 3대 조선총독인 사이또 마코토(齊藤實)가 1926년 일본 수성원(水城院)에 동종을 기증하면서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이또의 편지에 따르면 동종은 당시 전주면(全州面)에 살던 박모(朴某)가 자신 소유 낙수정(樂壽亭) 수리 시 땅 속에서 발견한 것으로써, 1916년 경성(京城)에서 열린 공진회(共進會)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동종의 원소재지가 전주였던 것이다. 한편 동종이 발견된 곳에서 1909년에 '開元寺'(개원사)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동종은 전주 개원사라는 절에 걸려있던 종으로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종을 매다는 부분이 깨어지자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개원사는 폐사되고 조선시대 낙수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을 것으로 생각된다.전 낙수정 동종은 통일신라 동종을 연상시키면서도 고려 초 동종의 세부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10세기 중엽에서 11세기 전반에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동종과 흡사한 종이 일본 원청사(圓淸寺)에도 있다. 이 두 종은 크기는 물론이고 넝쿨무늬비천 등의 모습까지도 유사하여 같은 장인(匠人)이 동일한 문양판(文樣板)을 사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佛家)에서 동종의 소리는 '일승지원음(一乘之圓音)', 즉 '부처의 소리'를 의미한다. 또 종을 매다는 부분의 대나무 관과 같은 음통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천년 전 옛 전주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고 소원을 들어주었을 이 동종의 소리는 지금도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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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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