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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북 가야사 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는 가운데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기존에는 철기문화가 중국 요동반도를 통해 한반도에 전파됐다고 알려졌다. 한반도 이북과 한강 유역에서 발전한 철기문화가 뒤늦게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는 셈이다. 하지만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이 바닷길을 통해 육로보다 먼저 직접적으로 전파되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제철문화를 꽃피웠다는 학설이 나왔다. 일명 아이언 로드(iron road)다.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존재했던 중국 제나라의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하면서 26자루의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청동검과 제철기술을 가져왔다는 것. 이후 선진 토착 세력이 있던 내륙, 현재의 전북혁신도시로 건너와서 약 100년간 선진기술 문화를 꽃피우다 철광석(철기 원재료)이 풍부한 장수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장수가야 제철기술이 독자성과 선진성을 증명한다면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못지않은 중심축으로 떠오른다. 이에 따라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아이언 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쫓아 왔다. 마지막 거점은 전횡의 제나라가 존재했던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시와 치박(淄博)시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의 산동성. 김포부산 간 거리보다 인천산동 간 거리가 더 짧을 정도다.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4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치박은 제남에서 동쪽으로 1시간 반가량 차로 이동하면 나온다. 중국 동서 교류의 중심이자 실크로드의 중추적인 통로였던 곳으로, 상업과 다양한 문물 교류전파가 활발했다고 한다. 기자는 중국 산동성박물관과 제국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유물로 추정되는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 26자루와 실제 같은 시대 중국식 동검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또 아이언 로드의 현실 가능성에 대한 중국 전문가들의 의견을 묻고자 했다. 제나라의 철기유물을 볼 수 있는 곳. 춘추전국시대(초기철기 시대) 당시 산동성 일대에 번영했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중심으로 시대별 산동성 지역 유물유적을 총망라한 중국 산동성박물관이다. 28만 여 점의 유물문건자연표본 등이 시대별주제별로 15개 전시실에 보관돼 있다. 산과 바다, 평야를 두루 끼고 있는 산동성 일대는 사람이 많이 살고 농경문화가 가장 융성했다. 춘추전국시대는 전쟁도 빈번했다. 따라서 제나라 유물로는 청동기와 철기 농기구무기가 가장 많았다. 이곳에서도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굴된 26점의 중국식 도씨검과 형태가 동일한 다수의 청동검을 볼 수 있었다. 수옥결(修玉決) 중국 산동성박물관 큐레이터는 수많은 전쟁으로 당시는 무기가 많았고, 또 각 지역마다 검의 형태도 다양했다며 전시장에 있는 검과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유물을 비교했을 때 하단부 손잡이 등 특정 형태가 동일하다. 시기나 디자인 등으로 미루어 추측할 때 춘추전국시대(초기 철기시대)에 제작된 중국식 청동검이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중국 국학박물관이나 군사박물관을 통해 철기 성분 등을 연구해보면 더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지역에서 이정도로 유사한 유물이 나온 것은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치박에 있는 제국역사박물관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가 있었다. 2016년 말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은 제국역사박물관은 800년의 휘황찬란한 제나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5개 전시실에 각각 300여 점 이상의 문화재가 시대분야별로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도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굴된 검과 형태가 일치하는 중국식 동검들이 발견됐다. 제나라 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옥덕(朱玉德) 제국역사박물관 관장은 몇 가지 특징에 따라 두 지역의 유물이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주옥덕(朱玉德) 제국역사박물관 관장. 한나라 시대 검은 길이가 75~85cm인데, 전횡이 있던 춘추전국시대는 길이가 50cm 전후 정도였다는 것, 칼날 가운데 부분이 길게 나뉘어 있는 점, 손잡이가 일체형이면서도 쉽게 잡을 수 있게 모양이 독특하게 만들어진 점 등이다. 그렇다면 이를 가져온 인물은 전횡이 맞을까. 이에 대해 주옥덕 관장은 중국 산동성 지역의 고위층이 가져온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그러나 전횡일 가능성은 절반이다고 말했다. 제나라 전횡 시기에는 이미 무기, 농기, 생활용품 분야에서 철기문화가 확산돼 있었습니다. 또 전횡이 망명한 시기도 맞아떨어지죠. 따라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횡이 망명해 도착한 곳을 청도로 보는 견해가 더 큽니다. 하지만 전횡이 아니더라도 전횡의 측근 세력이 바다를 건넌 것으로 봅니다. 군산 어청도에 있는 전횡 사당을 세운 것도 자신들이 모시던 전횡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봐요. 주 관장은 비슷한 시기 제나라와 일본과의 교류도 빈번했다며 아직 자료유물 등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옛 장수가야 일대와도 해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제나라 시기 일본과의 교류도 일본 학계가 적극적으로 연구하면서 밝혀졌습니다. 아직까지 옛 장수가야 일대인 장수남원 등이나 전북혁신도시 일대에서는 기원전 1세기 전후 시기의 발굴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사료가 없다면 유물유적 발굴만이 실마리가 되겠죠. 전북에서도 아이언 로드거점지역 조사발굴이 활발히 이뤄지길 바랍니다. 현재 발굴된 제철유적 외에 철기 유물과 제작 용품 등을 찾는 것이 관건일 것 같습니다. 당시 바다를 통해 다양한 집단과 문물 전파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입니다.
최근 전북 가야사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은 가운데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선진 기술이자 문물인 철기는 강력한 국력.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독자성과 선진성을 증명한다면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못지 않은 중심축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전파됐을까.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군산으로 유입돼 풍부한 철 산지인 장수까지 전파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명 아이언 로드(iron road)다. 아이언 로드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산둥성 일대에 있던 제나라 왕의 동생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루트가 시작된다. 어청도를 통해 한반도에 도달한 전횡의 후예들과 철기 문물은 내륙인 전주완주(오늘날 전북혁신도시 일대)로 이동한다. 이미 전주완주 일대에서 뛰어난 청동 주물 기술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과 만나 화려한 청동기철기 문화를 꽃피운다. 이들 세력 일부는 1세기 후 풍부한 철광석(철기 원재료)을 찾아 이동한다. 정착한 곳이 바로 장수무주진안에 걸친 진안고원 일대, 그 중 특히 장수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을 기반으로 한 선진집단은 장수가야로 발전했다.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아이언 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쫓고 있다. 장수가야 제철유적 현장에서는 찬란했던 테크노밸리의 영광을 돌아봤고 전주완주(오늘날 전북 혁신도시)에서는 이곳 잡단세력과 장수가야 세력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세 번째 아이언 로드 거점은 바로 군산 어청도다. 기원전 2세기 전횡은 중국 산둥성 치박시에 수도를 두고 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고 제나라도 위협했다. 제나라의 왕제 전횡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산둥반도를 지나 바다를 건넌 전횡 세력은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한 섬을 발견한다. 바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서해바다의 섬, 군산 어청도다.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2시간 30분 이동하면 U자형 어청도항이 나타난다. 물색이 맑고 푸르러서 어청도(於靑島)인가 싶지만, 지명의 유래도 전횡과 관련돼 있다. 기원전 2세기 전횡이 군사들과 바닷길로 망명에 올랐을 때 안개 낀 바다 위에서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은 그 섬을 푸른 청(靑)자를 붙인 어청도라고 이름 짓고, 정착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 마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전횡 세력의 흔적을 통해 현실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섬에서 조류의 흐름을 이용, 해적선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를 통해 섬의 안전을 지켜주고 이익을 얻었다. 섬 주민 사이에서는 이곳이 지금의 불탄여라고 전해진다. 어청도 내 불탄여 구역은 지금도 조류의 흐름이 좋아 낚시하기 좋은 포인트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남서풍이나 파도 높은 날에는 오르는 것을 삼가야 할 정도다. 더 중요한 것은 전횡을 모시는 전횡사당(치동묘)이 존재한다. 풍어와 해상 안전을 지켜주는 당신으로 모시며 매년 당제를 지낸다. 1960~70년대 고래잡이가 활발할 때까지만 해도 풍성하고 화려하게 제사를 지냈다. 고래잡이가 금지되면서 매우 약소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매년 이어지고 있다. 작은 섬인 어청도에서는 주민들이 대부분 항구 근처에 모여 산다. 배에서 내려 주택 골목길 안으로 5분가량 걸어 들어가자 전횡사당(치동묘)이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대문을 열자 잡초가 무성한 마당과 사당이 보였다. 이제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사당은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았다. 벽면은 군데군데 벗겨져 깨져 있었다. 그나마 수년 전 군산시청에서 부분 보수를 해 기둥이나 단청, 창호지는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사당 문을 여니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전횡의 초상화. 문을 열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얼굴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초상화 앞에 놓인 막걸리와 소주 한 병, 말라비틀어진 곶감 다섯 덩이, 유통기한이 반년은 지난 주전부리 등이 감정을 달랬다. 고평국 어청도 주민자치위원장(69)은 가끔 전횡사당을 조사하거나 취재하러 오는 사람들이 두고 간다고 말했다. 기자도 간식으로 챙겨온 과자 두 봉지를 올려놓았다. 전횡대감에게 만선으로 돌아오길 빌던 주민의 마음이 이랬을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땐 풍어제가 대단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전횡대감이라고 불렀죠. 치동묘에 포경선이 맨 처음 잡은 고래를 바쳤어요. 농악대는 사물놀이를 하며 온 마을을 휘젓고, 배 모양으로 만든 그릇에 고래 고기와 각종 음식을 담아 전횡대감에게 올리고 바다로 띄웠어요. 고 씨가 사당 한켠에서 제기를 꺼내 보여줬다. 스물 둘에 어청도로 시집왔다는 고영아(72) 씨도 젊었을 적 기억을 떠올렸다. 시어머니도, 마을 사람들 모두 전횡대감에게 고마워했어요. 바다를 건너온 대감이 예부터 마을 주민들이 배 타러 가면 안전하게 다녀오도록 도와줬다고 전해내려 왔고 주민들은 그렇게 믿었죠. 다들 전횡대감을 마을 수호신처럼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반도 서해까지 바다를 건너는 것이 정말 가능했을까. 고평국 위원장은 중국 어선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라며 여름엔 태풍으로 풍랑이 심하지만 가을엔 돛단배로도 한두 달 만에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받았습니다.
최근 전북 가야사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은 가운데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선진 기술이자 문물인 철기는 강력한 국력.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독자성과 선진성을 증명한다면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못지 않은 중심축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전파됐을까.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군산으로 유입돼 풍부한 철 산지인 장수까지 전파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명 아이언 로드(iron road)다. 아이언 로드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산둥성 일대에 있던 제나라 왕의 동생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루트가 시작된다. 어청도를 통해 한반도에 도달한 전횡의 후예들과 철기 문물은 내륙인 전주완주(오늘날 전북혁신도시 일대)로 이동한다. 이미 전주완주 일대에서 뛰어난 청동 주물 기술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과 만나 화려한 청동기철기 문화를 꽃피운다. 이들 세력 일부는 1세기 후 풍부한 철광석(철기 원재료)을 찾아 이동한다. 정착한 곳이 바로 장수무주진안에 걸친 진안고원 일대, 그 중 특히 장수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을 기반으로 한 선진집단은 장수가야로 발전했다.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아이언 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쫓고 있다. 전북 혁신도시는 오늘날 전주시의 남서쪽인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완산구 중동 그리고 완주군의 동쪽인 완주군 이서면 일대를 일컫는 곳이다. 2000년~2010년대 초 전북 혁신도시 일대에서 기원전 2세기 전후 청동기와 철기들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완주전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된 청동기와 철기를 가진 집단이 모여 살던 선진지역이었다. 최근 전북가야사 연구가 진척되면서 당시 완주전주에 머물렀던 선진 세력이 전북가야사와 연관돼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완주전주에 있었던 선진 기술자들이 1세기가 지난 후 원재료를 찾아 옛 장수가야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 당시 완주전주 살았던 세력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 전북 혁신도시 일대는 예부터 완만한 구릉과 구릉 사이의 충적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만경강 본류와도 가까워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잡기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이 일대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끊임없이 생활문화 활동이 이뤄졌다. 특히 청동기초기철기 시대에는 한반도 최고의 테크노밸리였다. 제철기술뿐만 아니라 모든 선진 기술의 중심이었다. 완주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은 선진기술의 정수다. 컴퍼스 원리를 이용해 정교한 무늬를 새긴 기법은 당시의 높은 기술력을 말해준다. 완주 갈동의 잔무늬거울은 남한에서 발견된 청동거울 중 가장 정교하고 뛰어나다. 한수영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세문경(잔무늬거울)이 남한에 70점 밖에 없다. 그런데 전북 혁신도시에서만 20점이 나왔다. 당시 첨단기술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철을 다루는 것보다 청동거울을 만드는 게 기술적으로는 더 어렵다. 그러니 이들의 제철기술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철기 문화가 전파됐을 때 이를 다루는 것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세력집단은 제철기술을 누구로부터 얻었나 그렇다면 기원전 2세기 전주완주에서 살았던 이들은 어떻게 제철기술을 얻었나. 발굴 조사 결과, 중국 산동반도에서 전파된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다. 바로 완주 상림리에서 출토된 중국식 청동검 26자루(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제작)를 통해서다. 한 연구원은 대량의 검이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적이 없다며, 성분모양개수 등 전반적으로 파악했을 때 완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검의 생김새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 한반도 초기철기시대 문화가 중국 요동반도에서 육로로 유입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동반도에서는 청동검이 거의 발굴되지 않는다. 동시에 중국은 지역별로 각자 자신들만의 독특한 동검이 제작됐다. 한 연구원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동검 분포도를 보면 완주에서 출토된 중국식 동검 26자루가 산동반도에서 일반적으로 제작되는 것과 모양이 일치한다며, 요동반도에서 대륙을 통한 유입 외에도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완주전주로 온 세력이 기존 토착세력과 함께 기술을 발전시켰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중국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온 세력은 누구인가. 전문가들은 지위가 높은 지배계층으로 판단하고 있다.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청동검을 대량으로 가져 올 수 있을 정도면 보통 세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시기의 중국 역사를 뒤져보면 나오는 인물이 바로 제나라의 전횡이다. 그가 한나라와의 세력 다툼에 밀려 바다를 건너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제나라는 오늘날의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 수도를 둔 나라였다. △ 전횡 후예들, 1세기 후 장수로 이동해 제철문화 꽃피워 바다 건너 중국에서 온 전횡의 후예들과 전주완주의 높은 기술력을 가졌던 토착세력은 시너지를 내며 오늘날의 전북 혁신도시 일대를 당대 최고의 테크노밸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력집단은 1세기 후 원료가 풍부한 장수남원 등(옛 장수가야 지역)으로 이동해 더 큰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한 연구원은 장수 남양리에서도 세형동검, 세문경, 토기 등이 담긴 초기 철기시대 고분이 발견됐는데 완주에서 발견된 것보다 제작시기가 약간 늦다며 세력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완주 신풍에서 출토된 간두령(제사의식에서 사용하던 방울)이 경주 죽동리 유적에서 발견됐다. 이는 전국에서 10개가 채 안될 정도로 귀한 유물이기 때문에 아무나 만들 수 없다. 기술력이 직접 전주에서 경주로 이동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지역 사이에 장수지역이 존재한다. 한 연구원은 지역별 유적의 시기분포로 미루어 오늘날 전북 혁신도시의 선진 집단이 장수남원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명확한 유적유물이 아직 발굴 되지 않았다며, 현장 발굴 조사가 지속돼 장수가야의 기원 전후 200년의 비밀을 풀 유적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전북 가야사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은 가운데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선진 기술이자 문물인 철기는 강력한 국력.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독자성과 선진성을 증명한다면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못지 않은 중심축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전파됐을까.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군산으로 유입돼 풍부한 철 산지인 장수까지 전파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명 아이언 로드(iron road)다. 아이언 로드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산둥성 일대에 있던 제나라 왕의 동생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루트가 시작된다. 어청도를 통해 한반도에 도달한 전횡의 후예들과 철기 문물은 내륙인 전주완주(오늘날 전북혁신도시 일대)로 이동한다. 이미 전주완주 일대에서 뛰어난 청동 주물 기술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과 만나 화려한 청동기철기 문화를 꽃피운다. 이들 세력 일부는 1세기 후 풍부한 철광석(철기 원재료)을 찾아 이동한다. 정착한 곳이 바로 장수무주진안에 걸친 진안고원 일대, 그 중 특히 장수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을 기반으로 한 선진집단은 장수가야로 발전했다.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아이언 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쫓고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가야계 소국만 20개가 넘는다. 대부분 백두대간 동쪽(영남지역)에 있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백두대간 서쪽 진안고원에 위치했던 장수가야가 소외되지 않고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철기문물 덕분이다. 무주장수진안에 걸쳐 있는 진안고원 일대에서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대규모 제철유적이 발견됐다. 가야 문화권에서 유일하게 확인된 제철유적이라는 점에서 장수가야의 우수성과 역동성을 입증하는 셈이다. 현장 발굴 연구원들은 기술력과 동시에 이 일대가 원재료가 풍부한 철산지였다는 것에 주목했다. 진안고원에서 제철기술이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철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을 갖고 있던 세력이 원료를 찾아 이곳까지 이동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세력이 바로 기원전 2세기 철기문물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제나라 전횡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 제련부터 완제품 생산까지철의 테크노밸리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지난 2015년 장수 동촌리 가야계 고총에서 말발굽(편자)이 처음 출토되면서 드러났다. 귀족 계층이 타고 다니던 말의 편자가 나온 것은 강한 지배계층이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말의 무게, 압력을 버티고 비교적 온전히 보존된 편자의 상태로 미루어 높은 주조기술을 보여줬다. 이후 최근까지 진행된 제철유적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를 통해 철의 생산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유적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장수군 명덕리 대적골 일대가 중요 제철유적지로 꼽힌다. 원료에서 1차적으로 철을 생산하고 생산된 철 소재를 23차 가공해 완제품을 생산했던 곳으로, 모든 제철공정이 갖춰져 있다. 제철기술은 철을 거푸집에 부어서 만드는 주조와 두드려서 만드는 단조 등 두 가지로 나뉜다. 대적골 A구역에서는 제련로, 단조 조각들이 수습된 단야로, 작업대, 석렬유구 등이 한 구역에서 발견됐다. C구역에서는 솥을 만들던 거푸집과 함께 소토, 철재(슬래그제련 과정 중 생성되는 불순물)가 다량으로 나왔다. A구역 등에서 생산된 철을 이용해 이곳에서 솥이 제작됐다고 추정한다. A구역 옆에서는 철재(슬래그), 노벽편(철광석을 녹이는 제련로의 잔해) 등으로 형성된 5m 이상의 대규모 퇴적구도 확인됐다. 즉, 철 다루는 기술이 체계적이고 자유자재로 능한 세력이 집단적이면서도 대규모로 철 생산을 해온 것이다. △ 완벽한 입지조건 찾아 장수로 이동한 기술자들 곽장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제철기술은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철을 다루는 선진기술과 함께 원료인 철광석, 연료인 숯이다. 장수 제철유적지 인근에는 철광석을 채굴하던 채석장과 숯을 굽던 숯가마가 존재한다. 남덕유산과 합미봉, 봉화산 등에는 니켈이 함유된 품질 좋은 철광석이 가득하다. 게다가 험준한 산맥이 아니라 수(水)량이 풍부한 골짜기 내 평탄대지에 입지해 근거지까지 금상첨화다. 조건들이 적절히 맞아떨어지면서 철광석 채광부터 숯으로 철광석을 제련해 철을 추출해 내는 제철공정이 한자리에서 이뤄지는 한반도 철의 테크노밸리가 된 것이다. 이쯤되면 철기 문화를 꽃피운 기술자들은 어디에서 넘어온 세력인지 궁금해진다. 장수가야 시대의 기술자들은 현재의 전북혁신도시 지역에서 넘어온 제나라 왕제 전횡의 후예 또는 그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세력이라는 주장이다. 곽 소장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을 토대로 추측할 때 초기 철기문물의 중심지인 전북혁신도시가 쇠락할 무렵 장수가야가 시작됐다며 혁신도시 세력이 장수 쪽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문물을 가진 집단으로서 원재료를 바로 구할 수 있는 철산지에 관심이 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 연구원은 일방적으로 경상도 지역이 철기의 중심이라고 알려졌지만 시기유적으로 봤을 때 전북혁신도시가 초기 철기시대의 가장 이른 중심지이고, 경상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훨씬 늦다. 전북 혁신도시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장수 남양리 유적에서 나온 유물은 그 중간 시기의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장수 제철기술이 혁신도시에서 전파된 것이고, 또 경상지역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더 밝혀져야 할 부분도 있다. 제나라 제왕 전횡이 어청도로 망명해 현재의 전북혁신도시에 터를 잡았다고 추측되는 시기가 기원전 2세기다. 가야는 기원전 1세기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다. 장수가야 존재시기를 빠르게 잡아도 약 900년의 공백이 생긴다. 연구자들은 앞으로 유적 발굴이 심화되거나 발굴 지역이 확대되면 900년간의 이동과정이 밝혀지거나, 장수 지역 제철유적의 뿌리가 기원전 2세기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는 추측이다. ● 전북가야 유적 지표조사한 유영춘 군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 "동부지역 제철유적 175곳정밀조사 필요" 장수를 비롯한 남원, 무주, 완주, 임실 등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하는 제철유적은 현재 175개소에 달한다. 지난 6월 마친 전북 가야사 및 유적정비 활용방안 지표조사를 통해 45개소가 추가 발굴됐다. 가야 문화권에서 유일하면서도 우리나라 최대 밀집도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유 연구원은 이번 조사를 통해 남원, 무주 등에서도 괄목할만한 제철유적이 발견됐다며, 당시는 국경이 유동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철산지들을 찾아 테크노밸리를 이루던 집단의 세력은 더 강력했고, 테크노밸리는 더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지표조사는 눈에 보이는 대략적인 존재만 파악한 것일뿐 실제 개별 유적에 대한 현황 측량이라든지, 유구의 정확한 위치용도 등 세부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는 정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 조사가 찬란한 가야사 복원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역사 복원은 가정과 추측으로부터 시작한다. 가능성 높은 가설을 따라 발굴연구 조사를 해 입증된 퍼즐을 하나씩 끼워 맞추고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장수남원 등 전북 가야사 복원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장수에서 다수의 제출 유적이 발굴돼 관심이 집중됐다. 그렇다면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전파됐을까. 그간 힘이 실렸던 한반도 내 육로를 통한 전파가 아니라 독자성을 가진다면 가야사의 중심이 바뀔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런 가운데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이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군산으로 유입돼 풍부한 철산지인 장수까지 전파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명 아이언 로드다. 전북일보는 장수가야 제철기술의 뿌리를 찾기 위해 6차례에 걸쳐 중국 산동성 치박(淄博)제남(濟南)에서 전북 군산전주장수까지의 아이언 로드(iron road)를 쫓는다. 주요 거점을 방문해 흔적과 연결고리를 찾고, 가설의 보완돼야 할 점도 짚어본다. 퍼즐 조각을 찾아 새 그림을 완성할 수도 있는 첫 걸음이다. △새역사 가능한 철의 왕국 장수가야 지난해 가야사 복원이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채택되면서 전북지역에서도 가야문화 발굴조명에 힘이 실렸다. 그간 경남권에 비해 복원 작업이 더뎠던 전북권 가야 유적도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전북권 가야는 장수진안무주남원완주임실순창군에서 발굴된 가야계 유적과 유물을 통합하는 명칭이다. 그중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가야계 소국이 바로 장수 가야다. 장수지역에서 175 개소에 달하는 제철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일대가 당시 최고 수준의 주조기술을 갖춘 철의 테크노밸리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수준 높은 철기 문화로 국력을 이룬 철의 왕국, 가야 수식어를 만들어낸 근원지인 것이다. 반면, 영남권에선 제철유적이 거의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변방으로 취급받던 전북권 가야사를 재평가할 기회를 맞았다. 철의 왕국 가야의 중심이 영남에서 전북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제철기술 어디에서 전파됐나 학계 등에서는 선진 문물인 제철기술이 장수가야에 어떤 루트로 들어왔는지가 관심사다. 잊힌 왕국 가야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1980년대부터 가야 역사문화 연구가 진척되면서 가야가 당시 삼국(고구려백제신라)과 비견할 만한 강력한 통치체제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국력의 바탕에는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한 철기 문물이 있었다. 따라서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이 태백산맥 등을 넘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이었다면, 장수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가야의 중심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장수가야의 제철기술이 바닷길을 통해 전파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30여 년간 전북 가야사를 연구해온 권위자, 곽장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소장은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철기 유물이 경기도충청도의 것보다 빠르다며 이를 볼 때 전북지역 철기문화가 육로로 왔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 앞서 철기문화를 가졌던 중국에서 바다 건너 전래됐다고 추론한다고 말했다. 일명 아이언 로드다. △ 아이언 로드란 곽 소장이 주장한 아이언 로드는 중국에서 장수까지 제철기술이 유입전개된 루트다. 기원전 2세기인 2200년 전, 한나라에 밀려 바다 건너 섬으로 망명을 갔다고 기록되는 중국 제나라 왕제 전횡이 당시 오늘날의 군산 어청도에 정착했고, 이때 철기유물과 제철기술을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후 전횡의 후손 세력 또는 제철기술을 배운 세력이 100년에 걸쳐 현재의 전북혁신도시로 넘어온 후 풍부한 철산지를 찾아 장수 천천면(옛 장수가야 유적지) 등까지 이동했다는 가설이다. 전북권 가야 유적 발굴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토막난 몇 백년의 한국 고대사(제철기술 유입과정)를 입증할만한 유물유적을 바로 찾기는 사실상 힘들다. 삼국에 묻힌 비운의 가야는 기록된 자료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곽 소장 등 일부 학자들은 아이언 로드의 존재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가설이 입증되기까지는 보완돼야 할 점들이 있지만 현장에는 중국 제나라가 존재했던 산둥반도 일대, 군산 어청도, 전북 혁신도시, 장수 천천면 등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전북혁신도시에서 발견된 후기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26점의 중국식 도씨검과 군산 어청도에 있는 전횡사당 등이 그 예다. 따라서 전북일보는 중국 제나라 왕제였던 전횡이 철기문화를 이끌고 전북 군산으로 들어와 전북 혁신도시로 망명하기까지의 여정, 즉 아이언 로드를 쫓아가며 장수가야의 제철기술 유입 과정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전북 가야문화 복원사업이 탄력을 받고, 전북가야만의 독자성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가야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을 발굴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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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 ‘불꽃문학상’ 황보윤·‘작가의 눈 작품상’ 박복영
[한자교실] 점심(點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