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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비

전성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꿀비였다. 몸이 새털구름처럼 가벼웠다. 시원한 꿀 차를 한 대접 마신 것 같다. 창문을 열자 구수한 흙냄새를 따라 고구마 밭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냉수 한 잔 마신 후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고 재래시장으로 갔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은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고구마 순 있느냐는 말에 비가 오는 날에는 찾는 손님이 많다며 너무 늦었다고만 했다. 그래도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운 좋게도 시장 깊숙한 곳에서 고구마 순과 몇 가지 종묘를 살 수 있었다.

 

심기 전에 물에 적셔놓을 생각으로 화장실에 가 수도를 틀고 막 순을 집어 드는데 물끄러미 보고 있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고구마 순이네요"

 

"예, 오후에 심을 건데 물 주려고요."

 

"아닌디, 거 고구마는 선인장처럼 꽂아 놓으면 뿌리가 나요. 심기 전에 하루 정도 그늘에 놓았다가 심으면 땅에서 물을 쭉 빨아들이지요."

 

"그래요?"

 

멋쩍게 웃으며 봉지에 다시 담아 사무실로 왔다.?자꾸만 검은 봉지에 눈이 갔다. 오는 사람마다 궁금해 했다.

 

"예, 이 주 전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엊그제 가보니 몇 개만 살고 다 타 죽었어요. 어찌나 허탈한지.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더라고요. 다시 심으려고요."

 

"밭이 어디요?"

 

"여산요."

 

"왜 굳이 그 먼 여산에?"

 

"실은 여산에 납골묘지가 있거든요. 한쪽에 빙 둘러 매실, 감나무 등을 심었는데, 가운데 빈 곳이 있어 땅을 일궜어요. 그래야 산소를 한 번이라도 더 가보지요."

 

몸은 책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고구마 밭에 가 있었다. 일과는 이미 뒤엉켜버렸다. 신문을 펼쳤지만, 눈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문에 흐르는 작은 빗줄기가 밭고랑의 작은 물줄기 같았다. 빗소리가 밭에서 들리는 환호성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노랫소리로 들렸다. 빗소리가 이리 아름답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단비보다 더한 꿀비였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였다. 초조함에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 비온 뒤의 맑고 윤기 있는 세상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밭으로 달려갔다. 순을 다시 심었다. 비는 그쳤지만, 적당히 구름이 드리우고 있어 다행이었다. 고구마 순을 다 심고 나자, 물만 주면 산다는 말이 떠올라 아랫마을민가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 흥건히 주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일 마치기가 무섭게 고구마 밭으로 달려갔다. 내 정성을 아는지 달님은 폭삭 주저앉아 목숨만 겨우 유지하는 고구마 순을 또렷이 비춰주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달려가지만 도착하면 이미 저녁도 지난 밤중이었다. 매번 민가에 들어가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수도에 다가가 꼭지를 틀었다. 쏴아! 물 받는 소리가 잠든 마당을 깨우지만 주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농작물은 발걸음 소리를 먹고 산다우."

 

며칠 전 주인 양반의 속말이 울릴 뿐이었다.

 

※ 수필가 전성권씨는 2011년 〈문예연구〉로 수필 당선. 〈순수필〉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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