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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

황점숙

 

창으로 빛바랜 명찰이 아른거린다. 흐릿한 사진 옆에 이름 석 자가 또렷하다. 옆 차로에 선 택시 속 승객과 운전자가 사뭇 진지하다. 승객 앞에 비치된 운전자의 이름표가 새삼 듬직해 보인다. 잠깐 타고 내리는 택시나 시내버스에서 본 신분증은 운전자를 신뢰하게 한다.

 

내게도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명찰이 있다. 1학년이 되어 가슴에 달았던 이름표는 세상에 나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중학생 때 가슴에 단 사각 명찰은 엄한 교칙 때문에 날 주눅 들게 했었다.

 

여고 동창회에 갔었다. 삼십년, 세월의 더께는 무던히 두터웠다.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갈래머리 친구를 떠올려보지만 이름이 막막했다. 친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목에 건 명찰을 확인한 뒤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이럴 때는 이름표가 세월의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명찰은 모양새가 다양해진다. 신분증, 명함, 명패, 이름도 모양도 각각이다.

 

중년이 된 남편친구들이 모처럼 우리 집 거실에 모였다. 검정교복에 함께 달았던 사각명찰의 추억까지 아우르는 친구들이다. 어느덧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제각기 색깔 다른 명함을 갖고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직장인으로, 자영업자로 서툰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가는 술 잔속에 미래를 걱정하는 대화가 오간다.

 

자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 가구 손질, 전기공사, 집수리까지 손이 닿는 것이면 어떤 일이든 야무지게 하는 재주꾼이다. 각별한 손재주에 비해 사업 확장은 늘 터덕거렸다. 매번 새로 시작한 영업은 때를 잘못 만난 듯 비상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어느 날 이사를 했다는 연락이 왔다. 아파트를 팔고 시골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워졌나 싶어 이사한 곳을 찾아가봤다. 아니었다. 일찌감치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널찍한 과수원이 있고, 부지런한 성품이라 마당 한쪽에는 땔감이 수북하고, 닭장, 토끼장 등 가축우리도 폼 나게 만들어 놨다. 타고난 손재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쓸모 있게 꾸며 놨다.

 

취업을 택한 친구의 삶은 풍성한 가을들판처럼 민틋했다.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하면서 높은 집값 때문에 좁게 산다며 지방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책상위에 놓인 명패가 위엄을 풍긴다. 거듭되는 직장통폐합과 구조조정의 한파도 헤쳐 낸 회사중역이다. 명함을 내미는 투박한 손이 당당하다. 친구들은 제일 성공한 친구라고 추임새를 넣어 사기를 북돋운다.

 

남편 차 속에도 신분증이 붙어있다. 신분증에 부착된 사진이 안개 낀 아침풍경처럼 흐릿하다. 양 손등의 다른 피부색과 함께 운전대 잡은 세월을 말해준다. 남편 역시 젊은 시절 직장생활보다 사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아버님은 가내수공업으로 비닐우산 공장을 했었다. 부지런하고 발 빨랐던, 남편은 아버지의 신임이 두터웠다. 중학생 때부터 심부름을 하면서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꾸었단다. 그러나 이것저것 손을 대다 개인택시 사업자가 되었다. 일찌감치 노후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직종이다. 그런데 시작과 달리 경제 한파에 밀려 뒤뚱거리고 있어 늘 이직을 꿈꾼다.

 

모처럼 함께한 친구들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는다. 제 각기 사회적 위치에 맞게 획득한 명찰은 사업장에 걸어 둔 편한 모습이다. 갑자기 서울친구가 더 나이가 들면 요양원 생활이 편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벌써 퇴직 후 노년을 걱정할 나이인가보다. 서울친구가 말문을 열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탠다. 전원생활을 하는 친구가 넌지시 자기 집 옆으로 이사하는 게 어떠냐며, 은퇴 없는 생활을 과시한다. 질세라 남편도 목소리를 높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자리 걱정은 없단다. 갑자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서울친구가 두 사람의 생활에 큰 관심을 보이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다.

 

※ 수필가 황점숙씨는 2006년 '좋은문학'으로 등단. (사)한국편지가족 전북지회장, 전북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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