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처럼 여물어가던 어느 날,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놀고 있을 때 아버지는 굵은 동아줄을 들고 우리들 곁으로 다가 오셨다. 평소 과묵하셨으나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아버지가 소나무에 그네를 매다는 동안 친구들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친구들과 달리 아버지의 갑작스런 등장에 내 가슴은 두근거려 눈을 뜰 수 없었다. 몇 번의 손길이 오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그네가 완성되었다. 큰 소나무 같은 너른 그늘을 간직한 아버지.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삭아짐을 마다하지 않은 삶이었다.
노동을 팔아 어린 딸들을 위해 골랐을 꽃무늬 원피스. 그네를 탈 때면 항상 그 옷을 입고 언니와 그네를 탔다. 꿈이 그네에 실려 구름을 향해 치올랐고, 아버지처럼 자상한 햇볕도 우리와 함께 그네를 탔다. 하늘에 닿을 것 같았던 쪽빛 꿈. 그때의 그림들은 내 가슴 속에 액자처럼 남아 먼 길 갈 때 꺼내 볼 수 있는 시집이 되었다.
여남은 살 무렵, 솔숲과 그네를 남겨둔 채 읍내로 이사를 했다. 어린 내게 읍내는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전학 가 처음 만났던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차가운 벽을 기대고 선 느낌이었다.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었는데 이후 잦은 전학은 성격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마음은 항상 솔숲에 있었다.
1930년대. 힘겨운 시대에 태어난 아버지는 결혼할 당시, 말 그대로 숟가락 한 개 달랑 들고 어머니를 만났다 했다. 힘든 시절, 올망졸망 태어난 육남매는 일 나가신 아버지가 언제 오실까, 마루에서 대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손에 들려진 것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주위를 빙 둘러 탱자나무가 둘러쳐져 있었고 대문 옆 살구나무 복숭아나무가 간식거리를 주었지만 아버지의 땀이 묻은 알사탕이 더 좋았다.
점점 자라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고 알사탕을 먹는 횟수는 차츰 줄어만 갔다. 읍내로 이사를 왔으나 여전히 사는 것은 힘들었다. 가까운 정미소에서 방아 찧는 날이면 어머니는 멥재를 담아오셨다. 땔감이 부족한 때라서 왕겨로 불을 땔 요량이었는데 가져온 왕겨에 습기가 차 있으면 불을 붙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한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서야 불을 지필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풀무질이었다. 조금만 세게 돌려도 구멍이 나 불이 모아지지 않았고 약한 바람에는 연기만 났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안 보는 척 나를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하려는 어머니의 교육 방법이었지 싶다.
그때의 내 나이만큼 자란 아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에 간다. 아들은 그곳에 있는 그네를 밀어달라고 조른다. 순간, 나는 아들에게 아버지처럼 넉넉한 마음의 그네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삭을 대로 삭아져 곰삭으면 부모님의 그림자만큼 깊어질까. 지금도 자식을 위해 피골이 상접한 삭정이까지도 태워 불을 지펴 주려는 아버지. 허리가 휜 아버지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빈 가지 같은 몸이지만 자식을 품어 주는 아버지 그늘이 깊다.
* 수필가 전오영씨는 부안 솔바람소리문학회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