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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구름

김형진

▲ * 수필가 김형진씨는 수필집 '종달새', 수필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등을 냈다.
며칠 동안 잔뜩 찌푸려 비를 쏟던 하늘이 모처럼 맑다. 눅눅한 기운에 젖어 있던 몸과 마음을 말리기 위해 집 옆 공원에 오른다. 어제 내린 철 잊은 장대비로 길바닥에 작은 웅덩이들이 상처처럼 나 있다. 햇볕은 다사로운데도 사월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허위허위 정상에 올라 팔각정에 오른다. 콘크리트 기둥, 시멘트 바닥이 눈에 설었지만 시원하게 트인 하늘에 마음을 말리기 위해 남쪽 난간 앞에 선다. 난간을 잡고 올려다보는 하늘이 하 맑다. 노랗게 익은 해는 푸르스름한 하늘빛에 싸여 있다. 만지면 찐득찐득 손가락에 달라붙을 듯하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첫 자리에서 천리(天理)를 주관하던 권좌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위용이 꺾인 해를 올려다보며 망령된 생각에 빠져들 즈음 서쪽 하늘에서 하얀 구름이 흘러든다. 뭉게구름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조각구름이라고도, 새털구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구름이다. 혹은 세로로 내리긋고, 혹은 가로로 잘라놓은 것이 어찌 보면 푸른 화폭에 하얀 물감을 죽죽 그어 놓은 추상화인 듯도 하고, 또 달리 보면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칼자국인 듯도 한다.

 

하늘에 떠 있어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해와 달과 별과 구름이다. 이들은 사람이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신비성을 지녔다. 해는 하늘의 주인이어서 우러러만 볼 뿐 언감생심 그 주변에도 접근할 수 없는 존재다. 달은 치성을 드리면 바라는 바를 이루어줄 듯도 싶고, 별은 간절한 마음이면 따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성싶다. 요즘 사람들은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달나라, 별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지만 달과 별은 아직도 꿈의 나라이다. 구름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때로는 미소를 짓게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래서 해는 신앙의 대상이며 달과 별은 치성의 대상이지만 구름은 사람들의 삶에 관여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공허하다. 산봉우리에 걸린 뭉게구름, 서녘 하늘에 곱게 펼쳐진 새털구름, 남쪽 하늘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각구름-사람들은 이런 구름들을 보면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하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기도 하며, 이룰 수 없는 꿈을 펼쳐보기도 한다.

 

오랜 가뭄에 살아 있는 것들이 목말라할 때 앞산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비구름은 생명수를 뿌리는 구원의 천사였다. 아직 빗방울이 듣기도 전에 시들었던 나뭇잎은 윤기를 되찾고, 기진했던 짐승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장마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어 음울한 기운이 세상에 가득할 때에도 사람들은 겁을 먹지 않는다. 구름 뒤에 하늘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검은 구름이 겁을 주기 시작했다. 앞산에 삐죽 고개를 내민 비구름은 맞으며 달음박질치면 땀범벅인 등줄기를 식혀주던 그 친근한 소나기가 아니었다. 깔리면 살아날 길 없는 바위 덩이가 되어 계곡을 덮쳤다. 장마 구름도 미꾸라지가 마당가에서 꿈틀거리게 하던 그런 비를 쏟는 게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동이로 퍼붓듯 온 동네를 집어삼켰다. 이제 구름은 사람을 친근한 이웃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원한 깊은 대상으로 대하는 듯하다.

 

서쪽 하늘로 눈길을 돌린다. 관운장의 장검으로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날카로운 칼 구름들이 해를 겨냥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는 높은 굴뚝이 떠오른다. 그 위에 뉴질랜드 하늘에 나타났다는 '악마구름'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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