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위는 습기가 있는 곳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소반에 수없이 오르내렸을 머위를 끓는 물에 넣었다. 논두렁이나 밭둑 등 흔한 곳에 자생하는 머위의 알싸함에서 고향 냄새가 전해진다. 머위를 보면 부지런한 농부들의 삶이 느껴진다. 겨우내 질박한 흙의 기운 속에서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이른 봄이 되면 약속한 듯 여린 순을 내민다. 질곡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의 끈기 같다.
끓어오르는 압력에 냄비 뚜껑이 열리자 머위를 찬물에 거듭 헹구어냈다. 오동통한 보랏빛 줄기와 녹색 잎의 신선함이 은근히 식욕을 돋운다.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파, 마늘다짐, 참기름 등을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아삭아삭하면서 쌉싸래한 향이 된장과 참기름에 어우러져 감칠맛을 물씬 냈다. 기대 이상이었다. 어찌하여 진작 이 맛을 모르고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쓴 맛이 나는데 입은 달아서 침이 고였다. 입맛을 돋우는 데는 쓴 것이 제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나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나름의 독특한 쓴맛이 어느 성찬 못지않다. 단 맛이 구미를 더 당길 것 같지만 기실 쓴 맛이 이끄는 오묘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미나리, 쑥갓, 취나물 등 제각각의 특유한 향을 지닌 봄나물들이 수두룩한데도 나는 오늘 머위 나물에서 느끼는 참맛에 담뿍 매료되었다.
겨울 지나면 봄 오듯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생활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왠지 모를 갈증을 느껴왔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욕망의 주머니는 잠을 자다가도 문득문득 나를 유혹했다. 우아하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 꿈은 언제나 이상일 뿐인데도 욕망은 시시때때로 나를 두드렸다. 바람 든 풍선은 매양 저 홀로 떠돌다 이내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언제나 그림자만 좇을 뿐 나와는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다.
불현듯 나에게 어울리는 삶은 머위나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꾸밀 것 없이 수수한 그릇에 담아도 개성 있는 맛을 지닌 채 소박한 밥상에 더 어울리는 찬. 다른 반찬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으며 그만그만하게 어우러지는 나물. 그 모습이 곧 내 삶임을 깨닫는다. 다양한 봄나물 속에서도 고유의 맛을 지녀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머위나물이야말로 봄채소 중의 으뜸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윤기 사라진 세월이 마음 비워내는 법을 가르친 모양이다. 더불어 입맛도 함께 변했나 보다.
밥공기는 바닥을 보였는데도 수저를 놓고 싶지 않다. 아이들에게 권해보지만 얼굴이 일그러지며 도리질 친다. 쓴맛이 달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세월이 훌쩍 흘러 아이들의 등에서도 풀기가 가시면 그때는 이 깊은 맛을 터득할지도 모르겠다. 쓴 맛을 달게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되리.
열어 놓은 거실 문 사이로 바람 한 자락이 밀려든다. 잠자던 풍경의 청아한 소리가 보리밭 위를 날던 종다리의 울음 같다. 창 너머 소공원이 사월의 초록바람에 한결 짙어 간다.
*수필가 이양선 씨는 '계간수필'로 추천 완료. '익산수필''계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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