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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남 장흥 용반마을 농민군 후손들] 한 마을 15명 처형된 날, 합동제례로 넋 기리다

인천 이씨 집성…동네 사람 대부분 혁명 참여 / 토벌 과정서 300가구 중 3곳 제외 모두 불 타 / 후손 이연기·이정태 씨 주축 매년 1월에 제사

▲ 지난달 24일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동학농민군 15명의 위패를 모시고 합동제례를 지내고 있는 모습.

△이사경 접주와 용반마을

 

동학농민혁명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라남도 장흥에서도 매우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 대접주의 지휘 아래 이인환, 이사경 등의 접주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이사경 접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흥 부산면 용반마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사경은 1894년 6월경 용반마을 근처에 있는 자라번지라는 곳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 집강소는 장흥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일사> (장흥 유생 박기현 저) 에 따르면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있는 사람을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경의 부친 이호인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동생 호의, 호신까지 입도시켜 활동하였으며, 몸이 아파 죽게 되자 아들 이사경에게 접주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호인은 실질적으로 이 지역 동학교도들을 관리한 선두주자로서 생을 다하게 되자 주변의 교도들과 상의하여 아들인 이사경에게 접주의 지위를 대물림한 것이다.

 

이후 이사경은 용반리 농민군을 이끌고 12월 4일 벽사전투, 12월 5일 장녕성 전투, 12월 7일 강진전투, 12월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다가 이후 용반리로 피신하여 생가 근처의 기역산에 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돌아가며 이사경에게 음식을 주면서 보호하였으나 기역산 너머 유치대리에 사는 모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1월 벽사역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사경 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는 “증조부 이사경 접주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인품 또한 넉넉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접주로 추대하였다고 어릴 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농민군은 처형되고 마을은 전소

▲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마을 앞 들판.

용반리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의 거점으로서 인천이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어 마을사람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마을 전체가 참여하자 이에 대한 토벌도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체포된 용반리 동학농민군들은 장흥 원도리 벽사역에서 뒤로 손을 묶인 뒤 쌓아올린 짚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된 시신은 겨울 날씨의 혹독한 추위에 꽁꽁 얼어 방치 되어 그 참상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시신을 찾았으나 얼음덩이처럼 굳어 있어, 그 아내와 이웃 아낙들이 한 사람은 머리 부분을 한 사람은 발 부분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용반마을 출신 동학농민군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는 “젊은 시절 떡 방앗간을 하면서 조부와 같은 제삿날에 동네 부인네들이 갑오 동학 때 돌아가신 어른들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떡을 맞춰간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조모 안봉문이 조부 이세근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왼쪽 속 섶 가슴 쪽을 가위로 잘라 두었었는데, 그 자국을 보고 화형을 당한 시신들 속에서 조모가 조부의 시신을 찾아 왔다고 한다.”고 하여 그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날 무렵 농민군 토벌대는 이 마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시 30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중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불타지 않은 3가구는 빈소가 설치되어 있던 어떤 집의 아래채, 집을 막 지어 지붕만 덮어 놓은 집으로 지붕만 타고 집채는 타지 않은 집, 마을 뒤편으로 멀리 떨어진 배밭 골에 있어 너무 허술하여 그냥 둔 집 뿐이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용반마을과 용반마을 사람들이 치뤄야 할 댓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후 용반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족보에 사망한 날과 다르게 기록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초와 핍박을 당하게 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

 

용반마을 앞 들판은 참 넓고 넓다. 어떻게 이렇게 넓은 들이 있을까 싶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여기서 수확한 곡식들로 충분히 살아가고도 남았다. 마을은 결속이 잘되었다. 화합도 잘 되었다. 300가구가 넘는 마을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관리들은 그 넓은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갔다. 결국 이 마을 전체가 이사경 접주를 중심으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생존의 문제였다. 누군가 그들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농민군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마을은 불태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120년이 지난 오늘 장흥 용반마을은 여전히 풍요롭고 한가롭다. 120년 전의 불태워진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는 후손들의 몸과 마음으로 이어져 면면히 흘러오고 있다.

 

△유족회 주관 매년 합동제례

2014년 1월 24일 오후 2시,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합동제례를 지내는 이유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1895년 1월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례는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하여 진행되었다. 제례의 준비는 이사경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가 맡았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 마을에 남아있는 농민군의 후손들이다. 이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동학농민군은 장흥 용반 접주 이사경을 비롯하여 이호인, 백인명, 최진문, 최승문, 이원찬, 최창업, 이원종, 이호의, 이세근, 이회근, 이호신, 이순근, 이수공, 이몽근 등 15명에 달한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120년이 지난 지금에 까지 후손들이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동학농민군을 잊지 않고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제례를 지내고 그것을 이어간다는 것은 후손들이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장흥군 용반리의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처럼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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