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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최순식 선생과 딸 최고원 씨 "지역에 대한 애정" 부녀가 김제 원평 혁명사 연구 헌신

고 최순식 선생, 향토사 조명·위령제 주도 / 딸 고원 씨, 김제동학혁명기념사업회 활동 / "역사와 주민의 공존" 등록문화재 지정 적극

▲ 고 최순식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최고원 씨

교토애니메이션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타마코 마켓’의 주무대는 ‘우사기야마 상점가’다. 상점가란 마을 단위의 재래시장인데, 쇠락해가는 이 상점가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요즘 일본 지자체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교토에 실제로 존재하는 ‘데마치 상점가’를 모델로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상점가와 상점가 사람들의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그림 속에 담아냈다. 이 애니메이션 덕에 데마치 상점가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상인들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

 

지역에 대한 애정은 이렇게 지역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컨텐츠를 찾아내고 이를 지역 활성화의 발판으로 삼게 한다. 그리고 그 컨텐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안 돼요.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모른다면 밝힐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선친인 향토사학자 故 현학 최순식 선생(1933~2008)의 뜻을 이어받아 김제 원평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44)은 이렇게 말했다.

 

이 부녀를 움직인 것은 원평 지역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

 

△‘삶의 공간’과 맞닿아 있는 무덤

 

최고원 씨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었다.

 

풀이 무성한 야산길을 지나 얼마 후 당도한 곳은 원평 구미란 전투 때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이 묻힌 무덤.

 

구미란 전투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던 농민군이 다시 일본군과 맞선 전투다. 이 때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곳 무덤군이었다.

 

마을과는 직선거리로 100m나 떨어져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봉분임을 알리는 흰 표지와 ‘원평 구미란 전투 동학농민 무덤군’이라고 적힌 알림판이 서있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무덤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모습이었다. 2005년 태풍 때 쓰러졌다는 나무가 여전히 누워있고, 봉분의 형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어릴 적에 자주 와서 놀았는데, 그 때에는 지금보다 봉분 모양이 제대로 돼 있었죠.”

▲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구미란 전투 농민군 무덤에 세워진 안내판을 가리키고 있다.

형체가 희미해져가는 봉분에 숫자가 적힌 흰 표지를 놓아 위치를 표시한 사람은 최씨였다.

 

기념사업회가 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1년에 한 번 벌초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이곳이 더 훼손되기 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고 최씨가 말했다. 한 차례 반려됐지만, 5월 중에 다시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그런데 왜 더 ‘격’이 높은 사적지 같은 것이 아니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길 원하는 것일까?

 

“사적지로 지정되면 문화재 관리를 위해 주변 주민들이 다 나가야 한대요. 그렇지만 주민들의 삶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죠.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양쪽 모두 보존하는 게 맞다고 봐요.”

 

△원평을 사랑한 사학자 최순식 선생

 

최고원 씨의 원평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 대한 이런 애착은 故 최순식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순식 선생은 본래는 역사를 직접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29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로 전북대에 들어가 정치학 등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원평 지역에서 최씨 집안은 대대로 인정받던 유지 집안이었다.

 

그는 고리대금을 써야만 했던 마을 서민들을 위해 1970년에 원평 새마을금고를 창립하기도 했다. 한 번 부도가 난 것을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큰 데다가 동학 농민군을 도운 최세현의 손자이기도 한 그가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글을 통해 “금산사 주변에서 조상대대로 누백년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향토사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그는, 80년대에 모악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미륵신앙과 정여립·증산·동학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했다.

 

원평 장과 금구·금산 지역의 사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가까이에 있는 모악산과 금산사는 미륵신앙과 개벽사상 등 종교적·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됐던 곳으로, ‘후백제 유민’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역할도 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정서의 영향을 받아 정여립이나 김덕명, 전봉준, 강증산 같은 인물들이 혁명·개벽의 뜻을 품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또 1893년에 원평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이 집회가 동학농민혁명이 ‘혁명’ 차원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1919년에 원평에서 있었던 3·1 만세운동이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특히 그는 “지주도 농민군도 모두가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혁명 뒤에 감춰진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성과들은 이후 이뤄진 연구들의 밑거름이 됐다. 정읍이나 고창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원평 지역의 혁명사는 그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게 된 셈이다.

 

이외에도, 최 선생은 구미란 전투에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농민군을 위해 ‘무명농민군 위령제’를 1994년부터 지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원평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토대를 찾아내고 기리는 데 헌신한 최순식 선생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공적비를 세웠다.

 

△중요한 건 ‘현재의 역사’

 

2008년에 최순식 선생이 급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뜨자, 최고원 씨가 그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

 

최씨는 우선 위령제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념사업회 결성을 서둘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 제정에도 힘을 쏟았다.

 

조례는 2010년 3월에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역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무관심에 맞서야 했고, 빠듯한 예산으로 위령제나 묘역 관리 등 할 일들을 해야 했다. 최근에는 구미란 전투 농민군 무덤과 원평 집강소 등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최근 ‘모악산 문화공동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주민들과 같이 지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뭔가를 모색해보는 단체예요.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과 주민들이 상생하도록 하기 위한 거죠.”

 

최씨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한다며 치러지는 사업들이 오히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일종의 박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기념사업, 어느 곳에 가도 똑같이 있는 조형물·기념공원 조성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녀가 찾은 길은 바로 ‘현재의 역사’였다.

 

“과거의 역사가 중요하단들 현재의 역사만큼 중요하겠어요? 지역 주민의 일상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기념 정신이 이어지는 게 진정한 기념사업이라고 봐요.”

 

그녀의 기념사업 모토는 ‘작게 만들고 적게 세우고 비워둔다’란다. 비워둔 그 공간은 지역 주민들의 삶이 채울 것이다. 이런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향토사학자’의 역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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