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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눈 내리던 날

황복숙
황복숙

아버지! 아버지를 떠 올릴 때마다 나는 함박눈 펑펑 내리던 날이 생각난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린 하얀 눈길을 혼자 걸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여 마음이 아프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메말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에 녹은 그리움은 빛바랜 사진이 되고, 가슴속 아픔도 저절로 굳은살이 되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언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친정동네 성황당을 지나노라면 아려오는 옛 생각에 눈물이 난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가 떠나간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헤어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아서였다. 어릴 때 기억으로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셨다. 집이 쩡쩡 울리도록 불호령이 떨어지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개고 무릎을 꿇고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었다.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면 누구하나 말대꾸 하는 법이 없이 그대로 했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 내 유년은 무섭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던 추운 겨울로 남아있다.

어느 해 여름 이었다. 도둑질을 하다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아저씨가 아버지 없는 날만 알고 찾아와 안방까지 신을 신은 채 들어와 물건을 부수며 괴롭히고 협박을 했다. “내가 왜 2년이나 감옥살이를 혔는디?”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으면 우리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이 아저씨는 동네의 닭, 개, 곡식을 훔쳐가고 폭행을 일삼으며 특히 혼자 사는 과부들을 괴롭혀 수없이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왔단다. 그래서 수차례 타이르고 경고를 했지만 덩치가 크고 인상이 무섭게 생겨 바라보기만 해도 사지가 떨렸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붙잡아 경찰서에 끌고 가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살고 출소했다.

그 뒤부터 거의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협박과 갈취를 일삼았다. 여름이라 마루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밥 맛있냐?’ 하며 밥상에 흙을 뿌리고 나뭇가지로 얼굴을 훑어대면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소리도 못하고 행패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다. 주변의 누구도 무서워서 나서지 못했다.

때로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를 보면 태도가 돌변하여 ‘내가 형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지’라고 핑계를 대다가 슬슬 사라졌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쯤 종적을 감추었는데 다시 찾아오면 어쩌지? 길에서 만나면 어쩌지? 하고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가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매일 술 마시고 폭력을 일삼다가 술독에 빠져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렀다. 지금도 아중호수 산책길을 걸을 때 아중산장 있는 마을 산 밑에 살았다는 무서운 그 아저씨가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출근을 하셨다. 텅 빈 새벽거리에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아버지 발자국만 쭉 이어졌다.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깨의 무거운 무게를 보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셨고, 흔들림 없이 살고자 했던 엄격함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걸어가던 눈길을 생각하면 사박사박 내리던 눈길을 혼자 걷던 그 뒷모습은 두고두고 내게 뜨거움과 연민을 준다.

* 황복숙은 성심여고 시절부터 꾸준히 수필을 써왔으며 온글문학 회원이다. 현재전북교육문화회관 시 수필반 총무를 맡고 있으며 수필가의 꿈을 안고 습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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