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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김춘자
김춘자

그때가 봄이었을까. 봄은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다시 움트는 철이기도 하지만 연약한 생명들이 꺾이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종잡을 수 없는 기온이 온몸의 순환을 흩트려 병고에 시달리던 노인이나 어린 생명들이 움츠렸다 피어날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어느 봄날 동생이 음식에 체(滯)해서 하얀 광목옷 하나 걸치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셨던지 없었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묻고 돌아온 어머니는 넋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팽나무 밑에 가서 내려놓더니 논두렁 아래 누렇게 뭉그러진 풀들을 우둑우둑 뜯어 불을 피웠다. 그리고 동생이 먹다만 약봉지와 몇 가지 물건 그리고 아픔들을 태우셨다. “니 동생이 영영 가는구나. 예쁜 내 손자가 참말로, 아주 떠나는구나.” 강 건너 골짜기로 사라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치마폭이 젖도록 얼굴을 부비며 흐느껴 우셨다.

엄마는 강 건너 앞산에 어린 것의 주검은 묻고 왔지만 그 동생을 내내 가슴에 묻고 살았다. 나는 다 크도록 동생이 묻혀있는 그 산이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자주자주 앞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가거나 그 자식이 보고플 때면 앞산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죽어 새가 되었다고 했다. 가끔 새 한 마리가 마당에 와 놀고 있으면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울음을 참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확독에 보리쌀을 갈다가도 마당가의 새를 향해 보리 몇 알을 던져 주곤 했다. 새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가면 그때서야 토방에 털썩 주저앉아 길게 숨을 뱉으며 눈가를 훔쳤다. 나도 덩달아 옆에서 “아가, 가지마라. 동생아, 내일 또 와.”하며 새가 날아 갈까봐 숨을 죽이곤 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떠난 뒤 내리 딸만 넷을 낳았으니 얼마나 가슴을 후볐을까.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다가 아들 둘을 더 낳고 난 뒤에야 말씀하셨다. “네가 터 판 그놈이 살았으면 장정이 다 되었겄지야?” 그 말이 하도 간절하여 “응.”이라는 짧은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너도 생각 나냐? 니 동생?” 그 말에도 “응.”이라는 말 밖에는 더 못 했다.

나와 세 살 터울이었는데 이름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을 지금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행여 어머니의 아픔이 도질까봐 이름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지내온 긴 세월, 잊은 적이 더 많았지만 내내 잊지 못하고 살았던 내 동생.

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앞산 아장사리로 간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동생을 기억하는 할머니도 작은아버지도 세상을 뜨셨고 아버지는 아기가 가는 걸 보지 못하셨으니 그 아이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와 나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그 아이가 살았더라면 벌써 60이 지났을 텐데, 오늘 따라 뜬금없이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 아이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고 싶다. 몹시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엔 소중한 인연과 그리움들을 속속들이 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모습, 음성, 몸짓, 추억, 시간들이 그리움이 된다. 그 그리움은 때때로 찾아와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되새기게도 한다. 슬픔도 삭아 그리움이 되고 미움도 잦아 그리움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들 삶의 아름다움이다.

 

* 김춘자는 임실 운암 출신으로 전북문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전북문학상과 사임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 《꿈꾸는 달항아리》외 2권과 《겨울을 날다》 등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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