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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될 청춘들에게

요즘 가장 뜨거운 대화 주제는 ‘땅콩리턴’이다. 땅콩리턴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일등석은 반드시 땅콩을 그릇에 담아야 하는 매뉴얼을 어겼다며 항공기를 램프 리턴 시켜 승무원 사무장 한 명을 내리게 만든 사건이다. 슈퍼甲을 보여준 조현아씨는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모든 보직에서 물러나고 있으며 법적인 책임도 져야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서 무서운 눈빛을 비치는 등 사건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이에 반해, 10개월 전,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80대 택시 기사에게 베푼 4억 원 가량의 보상금을 포기한 선처는 다시 한번 재조명되어 칭찬을 받고 있다.이부진 사장의 행동은 당연히 칭찬 받아야 할 일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을 몸소 보여준 몇 안되는 재벌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저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과 상대의 상황을 보고 상식적으로 상대방이 감당하기 어려우며 나에게 큰 피해가 아니었을 때 받아야 할 것을 ‘포기’한 이부진 사장은 특별한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 우리가 말하는 ‘영웅’이 된 것이다. EBS에서 만든 지식채널e 영상 중 ‘누가 영웅이 되는가’라는 영상이 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시민, 목숨 걸고 유대인을 숨겨준 독일인,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한 백인 등 편한 길을 포기하고 용기를 내 한 행동으로 영웅이 된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며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웅이 될 수 있는 자질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대답은 같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이 영웅적이어서가 아닌 당연히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영웅 웨슬리 오트리는 “제가 한 일은 특별했지만,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이제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일을 보고 감탄만 하고 있으면 안된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도 충분히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친절하고 상냥한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보자. 돈을 내고 밥을 먹을 때도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말을 해보는 것이다. 2014년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슬퍼하며 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더 매몰차졌다. 자신이 화가 나면 다른 사람의 것을 망설임 없이 부수고, 앞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핸드폰부터 꺼내서 찍는 모습을 보여줬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내는 것이 특별하게 보일 정도로 차가운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변한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가 녹였으면 한다. 2015년을 힘차게 맞이해서 우리 청춘들이 ‘영웅’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친절한 인사를 건내고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힘이되는 말만 하자. 누군가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을 때 “어? 그건 당연히 해야되는 일 아니야?”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회, 영웅들이 가득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가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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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31 23:02

탈핵, 우리의 미래

2011년 3월 11일. 원자로 격납용기의 수소폭발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된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사고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고에 이은 세 번째 대형 핵사고였다. 이로 인해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방사능의 공포가 확산되었다. 그 후 3년여가 지난 2014년 현재,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또 다른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지난 3일,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부실자재 인코넬 600이라는 합금소재가 사용된 한국의 원전에 대해 경고했다. 원전의 핵심시설인 증기발생기와 원자로헤드 등에 사용되는 인코넬 600이 부식과 균열의 위험이 있어 최악의 상황에서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와 같은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광의 한빛 3, 4호기에서는 증기발생기 내의 전열관과 원자로헤드의 균열이 진행 중이다.사실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핵발전소를 계속해서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 벨기에, 스위스 등의 유럽국가에서는 탈핵이 진행 중이다. 세계에서 핵발전 의존도가 가장 높은 프랑스도 뒤이어 탈핵을 위한 길을 걷고 있다.반면 한국은 현재 운영 중인 24기의 원전 외에 4기의 원전을 건설 중이고, 추가적으로 6기의 원전 건설을 계획하며 오히려 원전을 확대하고 있다. 이로도 모자라 삼척과 영덕에 신규 원전을 건설하기 위해 부지선정을 놓고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으며, 노후원전인 고리·월성 1호기에 대해서는 수명연장을 심사하고 있는 실정이다.핵발전소를 확대하기 위해 정부는 핵에너지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아 친환경적이고, 발전 단가가 저렴하여 경제적이라고 지속적으로 홍보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모두 사실과는 다르다.먼저 핵에너지가 친환경적이라는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원전 건설과 우라늄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적지 않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용 후 핵연료라고도 불리는 고준위 폐기물은 10만년 이상 보관해야하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다음으로 현재 전기요금의 원가에는 원전폐로비용과 핵폐기물 처리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다음세대가 짊어질 이 비용까지 생각하면 핵에너지는 결코 경제적인 에너지가 아니다.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가능에너지의 개발이다.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달리, 처음의 시설 설치비용 외에는 연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 재생가능에너지의 원가는 시간이 갈수록 내려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10년 처음으로 재생가능에너지의 원가가 핵에너지보다 낮아졌다. 덕분에 2011년에는 재생가능발전이 핵발전에 비해 더 많은 전기를 생산했다. 더군다나 재생가능에너지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친환경적이다.이처럼 지금까지의 대형 핵사고와 잦은 고장, 그리고 후대로 전가된 부담들로 미루어보아 분명 핵에너지는 미래를 위한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탈핵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동참하고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하루라도 빨리 탈핵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진행되어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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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4 23:02

존중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학교

벌써 일 년이 마무리되어 간다. 우리가 올해 이룬 것이 무엇인지, 내년 살림은 어떻게 꾸릴 것인지 이모저모 정리하느라 마음이 바쁜 시기다. 새해가 오면 새로운 모습으로 좀 더 온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력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새로이 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정말 진리일지라도 말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 우화의 형식을 빌려,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동굴 벽에 그려진 환영에 사로잡혀, 스스로 동굴 밖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런 그가 동굴 밖에 나왔을 때 태양 빛의 찬란함을 보게 되었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자신이 보고 온 바깥 세계, 즉 새로운 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들의 불신과 냉대였다.이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몰고 온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혁신은 지속적 긴장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존까지 당연히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혁신은 해방이기도 하다. 우리는 혁신을 통해 스스로의 사고와 환경들을 변화시키고 재구축하여 진실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변화하는 교육 환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키워드를 공유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존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존중을 실천하며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첫째, 학생의 다름을 존중하는 학생중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들의 다양성에 따른 다양한 교육 방법들이 시도되고 이러한 변화가 존중받을 때 진정한 학생 중심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사의 자발성이 존중받아 스스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교사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사회적으로도 신뢰받고 있을 때 전문가로서의 집단 지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사들 스스로 반성하는 성찰을 통해 전문성을 신장시키는 노력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움직임이 존중받는 문화가 필요하다. 셋째, 학교와 지역사회가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는 교육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삶과 분리되어 있던 교육을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교육과 지역사회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유기체가 되어, 학교가 지역 문화를 재생산하고 지역 감수성을 회복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교육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바꾼다. 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삶에 대해 다른 태도를 지니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고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교육을 일구는 학교 모두가 세상을 바꿔가는 혁명가들이다. 작은 풀꽃 하나하나로부터 시작하여 교육 구성원 모두의 생명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학생, 학부모, 교사, 지역사회 모두가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대화를 열어갈 때 학교는 행복한 공동체의 장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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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7 23:02

위대한 판결, 그리고 우리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어느 겨울 밤, 뉴욕 즉결 법정에 한 노인이 서게 되었다. 사위는 실직하여 집을 나갔고, 노인은 굶주리던 손자들을 보다 못 해 빵집에서 빵을 훔치다가 붙잡히게 된 것이다. 초범이었던 데다가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 방청객들은 선처를 기대했다. 그러나 판사는 단호했다. “사정이 딱하더라도 훔친 것은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판사는 계속했다. “하지만 노인이 빵을 훔쳐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뉴욕의 시민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판사는 10달러를 모자에 넣고 방청객들에게 돌렸다. 곧 57달러 50센트가 모였고, 판사는 10달러의 벌금을 제외한 47달러 50센트를 노인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이 판사가 바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며 뉴욕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불리는 피오렐로 라 과디아다. 인류는 재물을 향한 탐욕에 중독되고 그로 인해 세계는 증오 속으로 던져졌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도구적 이성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한 존재, 냉소적인 존재를 만든다. 끝없는 탐욕에 중독된 기득권층은 그들의 지속적인 영위와 풍족함을 위해서 ‘없는 자들’을 더욱 착취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지 못하도록 성장의 길을 철저히 봉쇄한다. 국가의 1%들에게 나머지 99%가 귀속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와 함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정은 희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전 세계의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진짜 소통’은 점점 줄고 있다. 이제는 손바닥 크기의 기계가 없으면 지척에 친구를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본질적으로 깊은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하는 시대 위에 서 있지만 그와 동시에 역사상 가장 감정이 메마른 시대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우려했던 대로, 과학 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 넘고 있다. 우리는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갇혀버리고 말았다. 하나의 기계와 지식보다는 소박한 인간성, 친절과 관용, 정이 더욱 많은 것을 해낼 때도 있다. 인류가 동물 사회에서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대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인류는 다 같이 화합하고 모두가 함께 나아가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업적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퇴폐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충분히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그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 기기는 잠시 내려놓고, 사람들을 만나자.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주위의 사람과 나누는 미덕을 가지자. 작더라도 실천하자. 피오렐로 라 과디아가 벌금형을 선고했던,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이 되지 말자.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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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0 23:02

11월의 명절

어느덧 겨울을 맞이한 우리 대학생들은 한 학년을 정리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나와 내 친구들은 벌써 수능을 본지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어색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11월의 명절, 대학 입시를 위해 치르는 ‘수학 능력시험’. 11월의 한 목요일, 입실 시간 전까지 들어가야 하는 수험생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으로 도움을 준다. 약 60만 명 이상의 수험생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동안 시험을 보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 아니 그냥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정해진 틀인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수능 당일, 몇몇 수험생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와서 회견을 열었다. 일명 ‘투명가방끈’이라 불리는 수험생들의 모임은 “우리의 꿈은 대학이 아니다!”를 외쳤다. 이렇게 수능을 거부하며 옳지 않은 사회를 비판하는 수험생들이 있는 반면, 수능이 끝난 후 헤드라인 기사를 장식하는 수험생들도 있다. 바로 자살한 수험생들에 관한 소식이다. 자신의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수험생들이 매년 등장한다. 수능 시험이 목요일에 치러지는 이유는 금요일에 등교한 학생들을 확인해 자살한 학생이 없는지 보려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지하게 믿어질 정도로 수험생 자살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다. 이번년도에는 인터넷에 자살 예고글을 올리고 사라진 수험생을 찾기 위해서 경찰이 100여 명 동원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렇게 수능 시험 하나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일들은 한 해를 정리하는 겨울을 뜨겁게 달군다.많은 어른들이 말하듯이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교를 입학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수능이라는 시험은 우리 부모님 세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는 걸까?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고작 시험 하나로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험이 지나가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나도 치렀는데 당연히 다음 연도에도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흔히 나라별 대학 입시제도를 비교할 때 독일을 많이 꼽는다. 독일은 대학 진학률이 20%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자리에서 교육을 받고 바로 취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 사회를 우리는 부러워 하면서도 정작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기 일에 집중한다.수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바꿔야 한다. 앞으로 수능을 볼 학생들이 아닌 이미 본 우리, 성인들이 바꿔야 한다. ‘내가 했으니 너희도 해야돼’ 라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해보니 좋지 않구나, 그럼 앞으로 볼 학생들을 위해서 바꿔야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자. 지방대는 취업이 잘 안된다, 대학교 이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며 우린 불평한다. 이런 차별 속에서도 우린 어떻게 버틸지만 생각할 뿐 차별의 원인을 찾아서 없애보려고는 하지 않았다.사회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더 평등해 질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생기는 일들이 아니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살게 될,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퍼져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수능이 없어지면 겨울을 뜨겁게 달구는 기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더 따뜻해 지지는 않을까?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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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03 23:02

을(乙)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요즘 방송가와 극장가에서는 그야말로 ‘을’이 대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억눌려 있던 ‘을’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을 타고 담담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 ‘갑과 을’은 이른바 갑의 횡포에 묵묵히 당하기만 하던 을이 상황을 역전시켜 복수를 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갑질’에 유린당하는 을의 현실에 함께 분노하고, 이와 동시에 복수를 하는 을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 같은 을의 반란은 방송이기에 가능 한 것일 뿐 현실 사회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다.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서는 이러한 을의 모습이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갑들의 전쟁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 하는 인턴과 계약직 사원, 상사의 눈치를 보며 고된 나날을 보내는 직장인, 남성 중심의 사내 문화에서 차별당하는 여성들의 고뇌 등 실제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일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들은 소속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다.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카트’에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을의 비애가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카트’는 부당해고를 당한 대형마트 비정규직 계산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와 탄압에 맞서 벌이는 512일간의 장기 점거 농성을 그림으로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영화 속 마트 여성 계산원들은 ‘고객은 왕, 우리는 을’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모욕을 당한다. 이들은 회사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이를 위해 기계의 부품처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들의 정당한 권리 요구에도 회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폭압적인 탄압뿐이다.그렇다면 실제 우리 사회 어떠할까.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청년 전태일은 나이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처우 개선을 위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서 산화한다.그리고 44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계보다 못한 투명인간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고, 주민들의 비인격적인 대우를 이기지 못한 아파트 경비원이 급기야 분신하여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불평등하고 부당한 상황에서도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 정부 당국에서는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연장하여 도리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을로 살아가기란 지옥에서 사는 것 보다 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이 땅의 을들이 원하는 것은 갑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나 차별 없이 당당하게 권리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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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6 23:02

무한도전에 대한 무한긍정으로

수능시험이 다가오자 어김없이 한파가 찾아왔다.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수험생들이 무사히 실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며 하루를 보냈다. 한국에 사는 모든 학생과 부모님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 역시 교육 문제일 것이다. 사실 교육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변화시키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교육에 대해 말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바란다.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사실 우리 아이들은 무한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의 재능이 좋은 조력자를 만나 발굴되고, 거기에 남다른 자신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멋진 성취가 이룩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억누르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선생님들이 어릴 적부터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거쳐 왔다는 것이 오히려 이런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교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범적인 틀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추려 애쓰는 때가 많다. 이미 학교나 교육과정에서 정해준 틀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위험해 보이는 일이나 새로운 일은 아예 시도하지 않고 그저 안전하게 지나가는 것이 최고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다. 선생님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학교의 그 분위기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새로움에 대해 겁이 없고, 실수에 대해 두려움 없이 뭔가 시도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 선생님이 아이에게 질책하는가, 응원하는가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 묘하게도 어른이 될 때쯤이면 대부분 아이들이 신선하고 독창적인 시도를 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대체 누가 실수에 대해 비난을 했던 것일까. 실수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토니 와그너는 아이들의 동기를 끌어내기 위한 3가지로 놀이(Play), 열정(Passion), 그리고 목적(Purpose)을 말한 바 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며, 학교 시스템은 혁신을 쉽게 할 수 있는 협업문화(Collaboration Culture)를 만들어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단순히 테스트하기 위해 서로를 경쟁자로 두고 시험을 보는 것보다는, 어떤 문제를 같이 풀어내기 위해 협업을 하는 지혜를 가르치고, 문제를 해결한 뒤의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훨씬 좋은 교육시스템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아이들의 재능과 창의력을 발굴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대비하여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교육이 편안함과 안일함에 머무른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본 원칙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이라는 재능이고, 우리는 이 재능이 현명하게 발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가 아이들의 창의적인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풍부함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정확하게 볼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볼 것이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열어갈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교육이 정말로 중요한 교육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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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9 23:02

하나의 정부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 있는 민족

1962년 10월 8일 월요일, 서독의 시사 주간지 〈데르 슈피겔〉 에는 〈팔렉스 62〉라고 명칭된 나토의 군사 훈련을 분석한 기사가 ‘제한된 방어력’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는 서독의 국방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기사였다. 그러나 10월 19일 독일 연방 법원은 〈슈피겔〉의 편집자들에게 국가 기밀 누설죄와 공무원 매수 죄 혐의를 적용하며 영장을 발부하고 즉시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영장이 발부된 이후 〈슈피겔〉의 저명한 언론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반역 행위’라고 발언하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당시 서독의 국방부 장관이던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는 그간 국방부의 스캔들을 몇 차례 폭로한 바 있는 〈슈피겔〉과 〈슈피겔〉의 사주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을 매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슈피겔〉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은 바로 서독 그 자체였다. 서독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시민들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체포한 언론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전 세계에서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결국 〈슈피겔〉의 언론인들은 석방되었고,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부는 무너졌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슈피겔 사건〉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이후 독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며 무려 2600여종의 신문이 발행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슈피겔〉은 정확하고 공정한 비판과 보도를 통해서 세계 최고의 언론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독일은 국경 없는 회가 발표한 언론 자유 지수 (2013년)에서 13위를 차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언론 탄압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고, 고위직에 대한 비판이 거리낌 없는 나라일수록 정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에도 꽤나 실망스럽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없지만, 언론 탄압으로 사료되는 수많은 사례들은 아직 대한민국이 진정한 정치적 선진국으로 들어서지는 못했음을 반증한다. 하나의 글이 역사를 바꾼다. 하나의 보도가 역사를 바꾼다. 언론은 우리를 더 가깝게 연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비판하며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상황에 따른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일차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민중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에 대한 대처도 할 수 없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합리화하며 비판 받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과거 노예를 소유하던 주인과 같은 심보인 것이다. 독일은 〈슈피겔 사건〉을 통해서 제국주의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데 성공했다.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는 국가는 제 아무리 민주주의라고 표방해도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것뿐이다. 대한민국 또한 언론 탄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과연 진실이 중요한가? 국익이 중요한가? 적어도 훌륭한 저널리즘으로 불리는 〈디 차이트〉의 〈슈피겔 사건〉 당시 편집장 테오 좀머는 이렇게 말했다. “먼 훗날, 우리가 이번 사건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슈피겔 사건을 통해 하나의 정부를 잃었지만 용기 있는 민족을 얻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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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2 23:02

10대들의 잃어버린 자유

만 14세 이상 23세 미만의 수감자만 220여명인 교도소,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소년 교도소인 ‘김천 소년 교도소’이다. 올해 7월부터 8월까지 KBS에서 만든 청소년 기획 6부작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에서 김천 소년 교도소의 내부 생활을 방영했다. 나와 중학생인 내 동생 또래의 아이들. 자유 없이 철창 안에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3년형, 4년형을 받은 수감자들이 있는 반면, 10년부터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죗값으로 받은 수감자도 있었다. 이들은 교도소로 들어갈 땐 어린 아이였지만 출소할 때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나오게 된다.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규칙적이다. 잠, 식사 등등 모든 것이 통제를 당한다. 또 제빵 기술, 자동차 수리 기술 등 교도소 내에서 많은 기술들을 가르쳐 준다. 사회에 나간 후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이들을 만나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몸이 아픈 할머니, 부모님, 먼저 출소한 친구들을 볼 때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수감자들에겐 그런 행복도 주어지지 않는다. 만나러 오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부러운 눈길로 흘깃 쳐다볼 뿐이다. 이런 생활 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악, 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각 자신이 다루고 싶은 악기를 다루고, 노래도 부르며,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연기도 한다. 몇몇 아이들은 웬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연습한 자신들의 음악, 연기를 큰 강당에서 가족들 앞에 선보일 기회가 찾아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 가족들과 함께 짧은 식사시간을 가진 후,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어느 때보다 멋지게 무대 위에서 선보였다. 가족들과 수감자들 얼굴엔 미소와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후, 다시 반복되는 생활들, 철창 안에서 밥을 먹고, 배우고, 연주하기를 시작한다. 나는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후에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은 그들을 동정하게 됐다. 아프신 할머니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저지른 범죄로 13년형을 받은 손자,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아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청소년, 집나가 아빠 없이 장애를 가진 엄마와 형을 가진 둘째 아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끝나면 나에게 되물었다. 내가 저들이 저지른 범죄를 당한 피해자였다면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을까? 난 지금까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을 동정하는 내가 옳지 않은 것인지, 차갑게 그들을 보며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난 모르겠다. 갑자기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난 믿는다. 그들의 마음엔 어떤 상처가 있는지 들어주고 싶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와서 나무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요즘 들어 김천 소년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은 춥지는 않을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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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5 23:02

행복한 공존

“냥냥아, 냥냥아.”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를 부른다. 이른바 캣맘(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자발적으로 보호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처하는 친구의 이야기다.이 친구가 길고양이인 냥냥이를 만난 건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에도 고양이를 좋아했던 그 친구의 눈에 유달리 경계심 없이 잘 따르는 길고양이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다니면서 한 번씩 쓰다듬어 주던 것이 어느 날 부턴가 미리 사둔 고양이 간식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초여름 즈음 냥냥이가 새끼를 낳게 되자 아예 사료를 구입하여 주기적으로 밥을 주었고, 박스를 이용하여 튼튼한 집까지 마련해 주었다.냥냥이는 귀여운 검정 무늬 새끼를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 새끼 고양이는 집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아파트 주차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주차장을 지나가던 차에 치인 것으로 보였다. 로드킬을 당한 것이다.새끼 고양이를 잃은 슬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짧은 다리로 팔짝팔짝 뛰놀던 새끼 고양이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어미인 냥냥이에게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마음에 슬픔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냥냥이가 다시 임신을 하여 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친구는 구청에 문의하여 고양이 중성화 수술인 TNR(Trap-Neuter-Return)을 시키기로 했다. 동물병원으로 보내졌던 냥냥이는 며칠 뒤 한 쪽 귀 끝이 살짝 잘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우리 주변에는 냥냥이와 같은 많은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로드킬과 각종 질병의 위험,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2~3년 이내의 짧은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더해져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길고양이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고양이들로 인해 교통사고가 증가한다던지 쓰레기를 뒤지고 발정음과 같은 소음을 낸다는 이유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낸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길고양이를 잡아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자생적으로 살아가는 길고양이는 안락사를 시키더라도 개체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짓고 사는 고양이의 특성상 한 영역에서 고양이가 사라지면 다른 영역의 고양이가 번식해 들어와 오히려 개체수가 느는 ‘진공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TNR 사업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과천시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로 확대되고 있다. TNR을 시킬 경우 장기적으로 길고양이의 개체수가 감소되는 효과가 있고, 고양이 특유의 발정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여 주민의 불편을 줄이면서, 이와 함께 길고양이의 복지를 생각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일종의 타협책인 것이다.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길고양이들은 이전부터 인간들과 생활 터전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심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관심과 이해를 통해 생태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맞대면 얼마든지 길고양이와 인간의 충돌을 완화할 수 있다. 길고양이들과의 행복한 공존을 위해 대화와 협의를 나누고 지혜로운 합의점을 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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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9 23:02

혁신 돕는 실행력 교육 필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심각하고도 풀기 어려운 일이 ‘일자리’ 문제다. 일자리 구하기가 매우 만만치 않아, 인위적인 손길 몇몇으로 과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물론 사회적으로 기회와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고, 청년들의 재능 발휘를 도와주는 지원들, 새로운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제도와 장치, 그리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뭔가 창조할 수 있는 신선한 동력이 남아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모두가 의사와 공무원이 되려 한다면 새로움을 위한 마중물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결국 일자리 정책과 더불어, 긴 호흡을 바탕으로 교육과 같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지원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일자리 문제에 있어 심각한 점은, 과거에는 많았던 비교적 좋은 대우에 중간 정도 기술이 필요한 직업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높은 지식과 창조성이 필요한 일자리들로 기회가 압축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토니 와그너는 아이들에게는 입시교육보다 ‘혁신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은 매우 좋아졌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나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무엇을 아는지 보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실행력이 더 중요해졌다. 이런 실행력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의 출발이 아닐까. 실행력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능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공부하며 적용하면 된다. 지식은 계속 늘어날 뿐만 아니라 변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실천하는 태도는 오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숙달되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방법은 이런 부분이지 단순히 영어나 수학 실력이 아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지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에는 맹목적인 암기와 문제풀이식 교육이 지나치게 많다. 모든 배움의 출발점은 아이들의 ‘동기’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는 삶을 혁신하는 열정의 근원이 된다. 끊임없이 동기가 샘솟게 한다면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자신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일구어낸 작은 배움과 성취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인터넷 시대의 블로그나 SNS 등은 지식 나눔을 돕는 훌륭한 자원이 된다. 이것들은 나중에 아이들의 디지털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여 자신이 필요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양한 능력을 지닌 청년들이 도전하여 재능을 풀어낼 수 있는 공정한 장이 마련된다면 사회 변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가 될 것이다. 단순하고 일회적인 지원보다도, 단순한 실행력과 혁신이 필요한 작은 문제들을 찾아내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축제를 마련하고,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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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2 23:02

쇼핑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을 보며

9월 28일, 수많은 홍콩 영화의 원천인 홍콩 경찰이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되자 홍콩에서의 ‘작은 소란’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가 믿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억눌려온 홍콩 시민의 소리입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중국은 거짓말쟁이입니까?’ 와 같은 말들은 홍콩 주민들이 얼마나 외면당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자, 중국은 사회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을 특별 행정구로 정해 고도의 자치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 홍콩은 중국 정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홍콩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짐에 따라 중국 정부는 이제 ‘없어도 아쉬울 것 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본래 직선제로 예정되어 있었던 2017년 행정 수반 선거가 사실상 ‘보통 선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홍콩에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입장과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본다면, 현재 ‘우산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중국이 들어줄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갑’ 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 시민들은 지금 불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민 혁명도-혁명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모두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혁명이 실패인 것처럼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후에 중국의 성장세가 고착화되는 시점이 오고 중국 전역에 ‘민주화’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면 중국은 민주화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미 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전면적인 자치권은 보장하지 않고 있다. 시민 의식이 성장하게 되면 시민들은 그들의 기본 권리에 대한 열망을 더욱 표출할 것이고, 결국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우산 혁명’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산 혁명’은 중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광장을 점거한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먼저 ‘겁도 없이’ 덤비는 자들을 보며 홍콩 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자신이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을 그저 방관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 국가들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지구는 역사상 없었던 기술의 진보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도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의식은 퇴보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기술로 인해 국가는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더욱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일상에서 오는 것 같은 선전에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력은 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제 대국이지만 평화적인 시위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하는 중국을 보면서, 진정한 선진국은 시민이 자유롭게 시위를 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쇼핑의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은 국가의 억압을 막아내는, 민주주의의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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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15 23:02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린 조선 사람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꿈에도 바라던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가 분단을 겪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 북한인, 외국인도 아닌 사람들이 생긴다. 이들은 이후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서 외국인이 되어버린다. 바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들이다. 일본에 살면서 납세의 의무도 이행하지만 일본 정부의 차별 대우는 심하다. 심지어 우리나라도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이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 3, 4세들 중 조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소학교는 조선 학교를 다니지만 고등학교로 진학 하는 시기가 오면 일본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조선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학 입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일 교포 학생들은 다시 대학 입시를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일본은 고등학교 수업료를 무료화 하는 정책도 조선 학교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많은 조선 학교들 중, 오사카 조선 고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오사카 거리에서 이런 상황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리고 시위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특히 럭비부 학생들의 웃음은 더 해맑아 보인다.박사유 감독의 영화, ‘60만번의 트라이’는 이들 오사카 조고의 럭비부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 고등학교 럭비 대회 중 가장 큰 ‘하나조노’ 우승을 노리며 ‘일본제패’를 외치는 오사카 조고는 일본 내에서도 실력 있는 학교로 뽑힌다. 그리고 그들은 외친다, “우리는 조선사람 입니다”. 일본말이 더 능숙하지만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말하고, 일본 사회에서 받는 차별을 실력으로써 극복해 나가려 럭비에 매진하고 있다. 항상 경기가 시작하기 전 선수들은 둥글게 어깨동무를 하고 외친다. “하나, 믿음, 승리!” 넓은 일본 럭비 경기장에서 한국말로 자신들을 격려한다.오사카 조고 학생들이 많은 절차를 거치고 떠나는 수학여행의 목적지는 북한이다. 북한에 있는 자신들의 친척과 만나 한 언어로 소통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 살면서 그들을 잊고 있었지만 재일 교포들은 남과 북 모두를 가슴 속에 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졌다.이 영화를 내 또래 친구들이나 10대 청소년들에게 추천해 주면 반응이 시큰둥하다. 재미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따분하기만 할 영화 같기 때문이다. 일에 치여 사는 30, 40대 어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영화 보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렇지만 길지 않은 시간 1시간 47분을 이 영화를 위해 투자해 주길 바란다. 재일 교포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정작 우리는 등을 돌리고 서있다면 그들도 점차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고 살아 갈지도 모른다. 이런 비참한 일을 막기 위해선 우리도 그들을 알고 기억해 줘야 한다. 아주 작지만 힘있는 일, 이 영화를 보고 그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언젠가 삶을 살다 보면 일본에 사는 우리 교포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며 인사 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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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8 23:02

진심으로 소통하기

지난 9월 12일, 나는 세계 평화의 날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발칸의 붉은 장미라고 불리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처음 해외로 나가는 터라 설레기도 하였지만 이와 동시에 의사소통의 걱정으로 인해 상당한 불안감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불가리아어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영어 역시 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만큼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걱정을 품고 약 12시간의 비행 끝에 소피아 공항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우려는 도착과 동시에 현실로 다가왔다. 행사 주최자와 불가리아 친구 한 명이 마중을 나왔었는데 이들과 인사를 할 때부터 말문이 턱 막혀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나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듣거나, 웃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뿐이었다.그리고 며칠 뒤, 전체 8일간의 행사 중 3번째 날이 되었다. 그 날은 현지의 초등학교에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종이접기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저마다 몇 명의 아이들을 전담하여 종이학 접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 역시 대니스라는 남자 아이를 맡아 종이접기를 시작하였다.나는 우선 몸을 낮춰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순서에 따라 조금씩 종이학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기내에서 익힌 몇 마디 불가리아 인사말과 감사와 칭찬의 표현을 해주었다. 나의 발음이 이상했는지 대니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따금 서로를 마주 보며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화 없이 가장 먼저 종이학 한 마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이파이브 했다. 이 후 우리는 또 다시 아무런 말없이 내리 3마리의 종이학을 접었다.그렇게 평범한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헤어질 무렵, 하교하던 대니스가 갑자기 발길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함께 접었던 종이학과 연필을 내밀면서 나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른 수업을 위해 다음날 학교를 찾았을 때 대니스는 내게 조그마한 불가리아 기념품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다시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부르며,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서로의 진심만으로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그 이후로 나는 다른 친구들을 대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분명히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는 잘 되지 않지만 내가먼저 진심을 다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상대방도 나를 배려해 주었다. 심지어는 불가리아 친구와 단둘이 깊은 대화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대니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운 덕분이었다.진심으로 소통하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처음의 나처럼 외국인이나 혹은 그들의 부모님, 친구, 연인 등 크고 작은 인간관계 속에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조금만 용기를 내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거짓 없는 진심을 보여준다면 상대가 누구든 긴밀히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란 전 세계인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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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1 23:02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나도 즐겁고 학생도 즐겁다

그리 오래 지난 일이 아니지만, 교단에 섰던 첫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교사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자 가장 어려운 질문을 그날 받았다. “선생님은 왜 선생이 되셨어요?” 면접을 위해 준비했던 대답이 아니라, 진짜 내 안의 대답을 찾는 것이 평생의 화두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역할이 다르지만 나는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학교에 가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굉장히 힘들고 지루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업속의 나와 원래의 나에 대해 생각하며 어우러지려고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사실 매일 매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보온병의 물을 따라 마시고 짝과 이야기 하고 필통을 흔든다. 왠지 앉고 싶은 짝과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서 그런가 해서, 순간 “번호 대로 앉아!” 외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신체적 자유나 작은 속닥거림을 빼앗는다면 교실이 얼마나 팍팍해질까 싶어 다시 한 번 심호흡 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아본다. 아이들이 얼마나 즐겁게 배우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수업은 교사만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 말에 모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도 아이들 마음속에서는 얼마든지 딴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정돈된 모습만을 만들다 보면, 결국 수업은 가르치려는 교사와 쉬고 싶은 학생간의 전쟁이 된다. 하지만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다운 모습으로 진심으로 함께하면 뭔가 마음이 맞는 순간들이 더 많아진다. 그걸 찾고 기다리는 일이 힘들지만 보람찬 일과가 되는 것이다.그리고 교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와 함께 있는 학생은 어떤 아이인지,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교사로서의 내 모습을 천천히 찾고 있다. 이런 고민이 이어져야 수업에 빛깔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또, 마음속에 철학이 있다고 해서 바로 수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해야 해서 어렵고 또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술과 음악은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지만 수업은 노력으로 조금씩은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수업을 함께하는 말하기, 관계 맺기, 수업 지식 등은 시간을 두고 차분히 닦아 갈 수 있다. 그래서 기술을 습득하려고 안달하기보다 먼저 수업 안에서 나다움을 찾아보려 한다.그래서 수업 방법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 나에게 맞는 것을 찾고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아닌 것으로 자꾸 수업을 치장하게 된다. 내가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교사들은 대체로 모범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위 시선을 생각해 남 보기 좋은 모습을 애써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수업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아무리 병아리 교사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수업 상이 어렴풋이 있을 텐데, 그것을 접어두고 남의 기준에 내 수업을 맞추려는 때가 많다.그렇지만 ‘마음속에 있는 나’와 ‘보이는 나’가 다르면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수업을 해야 나도 즐겁고 학생도 즐겁다. 일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첫날의 질문은 그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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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4 23:02

끝나지 않은 4월 16일, 아니 끝낼 수 없는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이후 100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476명의 가족과 친구들은 100일이 넘도록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중에서도 294명의 가족, 그리고 아직 가족들과 만나지 못한 10명의 가족은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단지 불운의 사고였을 뿐이고, 국가가 나서서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절대로 통용될 수 없다. 공기관의 엄격한 점검이 있었다면,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인해 청해진 해운이 낡은 배를 사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실수와 정책으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면 국가도 배상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지친 상태다. 자식이 사고를 당했는데 계속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식의 곁을 지켰다. 부모들이 살아갈 때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을 건강하게 기르고 자신이 다하지 못했던 것까지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돈을 벌고, 직장을 다니는 것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을까? 4월 16일에 일어난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서 삶의 목적을 잃은 부모들도 있다. 일시적으로 직업이 없으면 기본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수입이 없게 된다. 결국 월세를 내지 못해 가족 집에 신세를 지고, 기본적인 식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사태에 100일이 넘게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국회에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기초적인 보상도 되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리 혐의 의혹을 받고 있는 여당의 한 국회의원의 체포 동의안을 막기 위해 개최된 방탄 국회에서는 일부 야당 의원들도 반대에 표를 던져 여당을 도왔다는 점이다. 대의민주주의가 필수적인 현대 국가에서 국민들은 그들의 의사를 대변해줄 사람들을 국회로 보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오히려 국민들을 외면하고 굴복시키려고 한다. 최근 여당은 유가족과의 협상 자리에서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법 제정과 올바른 수사를 약속했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유가족을 외면하다시피 하고 있다. 현재 정부와 유가족이 합의를 보지 못하는 사안은 기소권과 수사권에 관련된 문제이다. 하지만 국가가 유가족들이 믿을 수 있도록 수사를 진행했다면 유가족이 이를 국가에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가족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없다. 유가족들은 단지 사건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건이 끝나려면 먼저 실종자들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 이후로는 사건에 대한 올바른 수사가 끝나야 한다. 보상 절차는 그 이후다. 유가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무엇이 원인이 되었는지를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싶은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나려면 유가족 모두가 이제는 끝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전까지 4월 16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끝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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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17 23:02

평화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오는 9월 21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다. 이 날은 1981년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당시 의장이었던 우리나라의 조영식 박사가 제안한 것으로, 유엔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9월 셋째 주 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가, 2001년 유엔총회에서 다시 9월 21일로 고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이 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 이 날을 위해 매년 일정한 주제를 제시하였는데, 올해의 주제는 바로 평화에 대한 권리(Right to Peace) 즉, 평화권이다.평화권. 뭔가 좋은 말처럼 들리면서도 그 개념이 분명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평화권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으며,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반면에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평화를 하나의 인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유엔을 중심으로 그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특히 1984년 유엔총회에서는 평화권 선언을 발표하여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신성한 평화권을 갖고 있다는 생래적 권리로서의 평화권을 확인하고, 평화권의 보존과 이행을 증진하는 것은 각 국의 의무임을 선언했다.그리고 최근에는 평화권이 평화와 인권을 결합한 제3세대 인권으로써 독자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그 향유주체도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까지 해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평화를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는 침략전쟁 포기, 군비축소, 전쟁의 위험에 처하지 않을 권리,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군사적 목적의 기본권 제한 금지, 평화를 위한 시위와 시민참여의 권리 보장, 희생자들의 권리 등이 포함된다.실제로 우리주변 곳곳에서 평화권이 요구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해군기지 건설과 미군기지 이전으로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제주 강정마을과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국가안보와 가진 자들의 이익에 의해 평화적인 삶을 누릴 권리를 빼앗겼다.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폭력 속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대한 감옥에 갇혀 평화를 유린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평화권이란 이 같은 폭력적,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양심적 거부와 불복종의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물론 평화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 이는 주로 미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오는데 한국 역시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평화권이 인정될 경우 패권경쟁을 위해 힘겨루기를 하는 이들 국가들의 군비증강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국 내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결부된 국가적 사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평화권이 좋게 보일 리 없다. 국가의 이익 추구에 의해 인간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저서 ‘시민 불복종’에서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전에 인류의 일원부터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단순히 눈앞의 이익을 쫓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현재와 미래의 인류를 위한 보다 큰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연대하여 권리로서의 평화가 인정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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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03 23:02

두려움을 깨고 교실을 거꾸로 뒤집기

시대에 따라 교육도 변한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학생 중심으로 배움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항상 교실의 화두가 된다. 최근 교사들 사이에서 ‘거꾸로 교실’이 화제다. ‘거꾸로 교실’은 영어로 Flipped Classroom이라 불리는 교육방법으로, 2010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주목을 받고 있다. 거꾸로 교실은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교실에서 하던 지루한 강의식 수업을 영상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수업 전에 미리 보고 온 후, 교실에서는 강의 대신 다양한 활동으로 재미와 함께 공부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것이다. 거꾸로 교실에서는 일방적 강의에서 소외됐던 학생들이 다시 교실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기존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사에게 지식을 전달받고 배운 내용을 집에서 복습했다. 이때 부족한 부분은 사교육을 통해 보충하는데, 사교육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게 커지며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학교에서 다시 배우는 일이 흔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교실을 뒤집는 것은 학생 중심의 교실 문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고, 수업 내용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도울 수 있다. 학생들은 배운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실험하며, 더 깊은 수준의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교사와 학생 모두 소통으로 가르치고 배울 기회를 얻는 셈이다. 하지만 거꾸로 교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교사가 제공한 사전 학습 자료들을 보고 습득한 지식을 기반으로 교실에서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전 학습 자료들을 보고 온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그래도 거꾸로 교실을 통해 선생님과 배움의 교감이 커진 학생들이라면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지 않을까. 또, 사전 학습 자료가 꼭 동영상일 필요도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영상 대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 교사는 배움을 돕는 다양한 정보들을 적절히 제시하여 학생들을 돕고, 학생들은 정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지식을 구성하고 나눌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새로운 시도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색되고 있다.하지만 교실을 뒤집는다는 말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는가보다. 심지어 선생님들마저도 학생 중심으로 교실이 돌아간다면 교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 의문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급속도의 사회 발전에 따라 교육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항상 예측 불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교육을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그릇들에 대해 우열을 따지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겪은 시대의 틀로 교육을 이해하고 고수한다. 하지만 변화와 개혁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변화가 주는 신선함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고정관념이다. 새로움을 두려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시선이 주는 변화를 담대하게 수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두려움을 깨고 아이들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교실을 한번 거꾸로 뒤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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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7 23:02

교육감은 학생이 뽑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례안, 예산안, 결산서의 작성, 교육규칙의 제정, 교육 기관의 설치 이전 및 폐지에 관한 사항, 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 결정 등 교육감이 관장하고 있는 중요 사무 중 일부만 서술한 것이다. 교육감은 시·도 교육 학예에 관한 한 대통령에 버금간다. 그럼 이런 교육감의 모든 활동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제공하고, 이런 활동들에 대한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내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교육감을 뽑을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왜 교육감 선거로 인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으면서 교육감 선거를 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보고 싶다. 과연 그 동안 통용되어 왔던 이유처럼 학생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선거를 치르기에는 너무 순수하기 때문일까?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선거를 할 수 있는 어른들은 얼마나 성숙할까? 교육감 선거는 정당 선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성향과 A 후보의 성향이 같으면 A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보통의 사례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왜 이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명쾌한 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는 것일까. 교육감의 성향을 볼 가능성이 높다. 교육감이 보수 성향인지 아니면 진보 성향인지. 사실상 정당만 보고 투표하는 실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교육감 선거에만 국한되지 않고, 후보의 공약과 가능성을 보기 보다는 이미지와 성향을 중시하는 선거의 현 세태가 짙게 묻어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성숙한’ 어른들의 선거다. 그럼 학생들이 미성숙하다고 하는 근거는 뭘까? 이미 여성이나 흑인들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선거에서 배제되어 온 역사가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모든 영향을 그대로 받아내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에서는 항상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어 왔다. 복장, 두발, 교육 방식, 대입제도 등 학생들의 모든 것들을 결정한 것은 단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학생이 아닌 어른들이었다. 어른들 구미에 따라 교육정책을 수도 없이 바꾸면서 학생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선택에 따라 교육감이 바뀌고 교육감의 정책에 따라 교육 제도가 바뀌어도 학생들은 항의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 제도대로 생활해야 했던 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교육감 선거에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그 ‘성숙’하다는 어른들조차 막상 선거 전단지가 집으로 배달되어 오면 그것을 꼼꼼히 읽어보기 보다는 곧바로 휴지통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거에서 당선된 교육감의 정책을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학생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분명히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교육감들이 내세우는 공약 또한 더욱 구체화되고 학생들을 위하게 될 것이다. 공약이 실현되지 않으면 학생들은 그들의 ‘미성숙함’과 ‘순수함’을 내세우며 더욱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교육감은 학생들이 뽑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학생들이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학생들의 선거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만큼 자신의 교육을 선택할 권리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 비단 선거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에게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교육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미성숙하고 순수하다고? 모두 기억하자. 인류사에서 역사를 바꿔왔던 것은 모두 그 ‘미성숙함’과 ‘순수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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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0 23:02

페이스북 '좋아요'의 문제점

7살 때 집에서 할게 없으면 운동화를 신고 털레털레 집 옆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그러면 친구들이 항상 공을 차고 있었다. 나는 불쑥 들어가 대충 편을 나누고 같이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스무 살,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심심해서 밖에 나가는 일이 없다. 손 안에 스마트폰만 있으면 심심함도 잠시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누구나 접속할 수 있고 언제든 친구와 대화할 수 있는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다.내 생각을 소신껏 글로 써서 보여주며, 좋아하는 유머, 연예나 스포츠 뉴스, 명언 등을 ‘좋아요’나 ‘리트윗’버튼 하나만으로 공유할 수 있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항상 같이 이야기 하는 듯 착각 속에 빠진다. 나 역시 풍덩 빠져있다. 재미있는 소식, 궁금한 뉴스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친다. 다른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부분이 있으면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할 때 그 주제는 살짝 피해서 불필요한 갈등을 애애초 만들지 않는다. 이런 유용한 면들 때문에 나와 같은 청춘들에게는 SNS가 거의 필수가 된 것 같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SNS에 대해 비판한다. 중독성이 심해서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대표적이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비판 받아야 할 대상은 SNS가 아닌 우리 사람들이다. 우리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서 생기는 사회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런 많은 문제들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현재 SNS 상에서 가장 큰 이슈는 꺼지지 않는 논란인 세월호 사건이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써 4달이 다 되어간다. 세월호 특별법과 진상 규명을 위해서 유가족 분들께서는 열심히 투쟁하고 계신다. 하지만 4달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SNS에서는 이제 지긋지긋 하다는 글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고 특별법 제정이 의사자 지정, 대학 특례 입학과 관련이 있다며 유가족들이 너무한 것이라는 게시물들에 리트윗과 ‘좋아요’가 만개를 넘어선다. 내 친구들의 이름도 ‘좋아요’ 목록에 있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까운 한숨이 나온다. 심지어 유가족들을 ‘유족충’이라는 단어로 부르며 SNS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와 같은 내용 중에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도 다수 이다. 그런데 내용 전체를 읽어보고 사실 확인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들이 무심코 누른 리트윗이나 ‘좋아요’로 인해서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익명성을 무기 삼은 악성 게시물들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올라온다.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는 각자의 소신이 달라서 토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어떤 부분에서는 다를 수 없는 것이 있다. 옳은 것, 바른 것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하하며 욕을 쓰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옳지 못한 행동이다.사회 정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대학생, 10대들도 SNS사용에서부터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게시물을 읽었을 때 헷갈리는 것이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정확한 정보를 찾아보고, 내 SNS는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을 잊지 말고 신중하게 게시물을 선택해서 공유해야 한다.이것이 작게나마 우리 청춘들이 할 수 있는 의무다. 또 이런 작은 행동이 앞으로 살아갈 사회를 더 건전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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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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