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5-05 05:44 (화)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청춘예찬

하나의 정부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 있는 민족

1962년 10월 8일 월요일, 서독의 시사 주간지 〈데르 슈피겔〉 에는 〈팔렉스 62〉라고 명칭된 나토의 군사 훈련을 분석한 기사가 ‘제한된 방어력’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는 서독의 국방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기사였다. 그러나 10월 19일 독일 연방 법원은 〈슈피겔〉의 편집자들에게 국가 기밀 누설죄와 공무원 매수 죄 혐의를 적용하며 영장을 발부하고 즉시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영장이 발부된 이후 〈슈피겔〉의 저명한 언론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반역 행위’라고 발언하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당시 서독의 국방부 장관이던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는 그간 국방부의 스캔들을 몇 차례 폭로한 바 있는 〈슈피겔〉과 〈슈피겔〉의 사주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을 매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슈피겔〉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은 바로 서독 그 자체였다. 서독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시민들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체포한 언론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전 세계에서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결국 〈슈피겔〉의 언론인들은 석방되었고, 프란츠 슈트라우스와 콘라트 아데나워 또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부는 무너졌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슈피겔 사건〉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이후 독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며 무려 2600여종의 신문이 발행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슈피겔〉은 정확하고 공정한 비판과 보도를 통해서 세계 최고의 언론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독일은 국경 없는 회가 발표한 언론 자유 지수 (2013년)에서 13위를 차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언론 탄압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고, 고위직에 대한 비판이 거리낌 없는 나라일수록 정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에도 꽤나 실망스럽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없지만, 언론 탄압으로 사료되는 수많은 사례들은 아직 대한민국이 진정한 정치적 선진국으로 들어서지는 못했음을 반증한다. 하나의 글이 역사를 바꾼다. 하나의 보도가 역사를 바꾼다. 언론은 우리를 더 가깝게 연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비판하며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상황에 따른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일차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민중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에 대한 대처도 할 수 없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합리화하며 비판 받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과거 노예를 소유하던 주인과 같은 심보인 것이다. 독일은 〈슈피겔 사건〉을 통해서 제국주의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데 성공했다.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는 국가는 제 아무리 민주주의라고 표방해도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것뿐이다. 대한민국 또한 언론 탄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과연 진실이 중요한가? 국익이 중요한가? 적어도 훌륭한 저널리즘으로 불리는 〈디 차이트〉의 〈슈피겔 사건〉 당시 편집장 테오 좀머는 이렇게 말했다. “먼 훗날, 우리가 이번 사건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슈피겔 사건을 통해 하나의 정부를 잃었지만 용기 있는 민족을 얻었다고...”

  • 오피니언
  • 기고
  • 2014.11.12 23:02

10대들의 잃어버린 자유

만 14세 이상 23세 미만의 수감자만 220여명인 교도소,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소년 교도소인 ‘김천 소년 교도소’이다. 올해 7월부터 8월까지 KBS에서 만든 청소년 기획 6부작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에서 김천 소년 교도소의 내부 생활을 방영했다. 나와 중학생인 내 동생 또래의 아이들. 자유 없이 철창 안에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3년형, 4년형을 받은 수감자들이 있는 반면, 10년부터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죗값으로 받은 수감자도 있었다. 이들은 교도소로 들어갈 땐 어린 아이였지만 출소할 때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나오게 된다.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규칙적이다. 잠, 식사 등등 모든 것이 통제를 당한다. 또 제빵 기술, 자동차 수리 기술 등 교도소 내에서 많은 기술들을 가르쳐 준다. 사회에 나간 후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이들을 만나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몸이 아픈 할머니, 부모님, 먼저 출소한 친구들을 볼 때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수감자들에겐 그런 행복도 주어지지 않는다. 만나러 오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부러운 눈길로 흘깃 쳐다볼 뿐이다. 이런 생활 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악, 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각 자신이 다루고 싶은 악기를 다루고, 노래도 부르며,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연기도 한다. 몇몇 아이들은 웬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연습한 자신들의 음악, 연기를 큰 강당에서 가족들 앞에 선보일 기회가 찾아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 가족들과 함께 짧은 식사시간을 가진 후,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어느 때보다 멋지게 무대 위에서 선보였다. 가족들과 수감자들 얼굴엔 미소와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후, 다시 반복되는 생활들, 철창 안에서 밥을 먹고, 배우고, 연주하기를 시작한다. 나는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후에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은 그들을 동정하게 됐다. 아프신 할머니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저지른 범죄로 13년형을 받은 손자,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아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청소년, 집나가 아빠 없이 장애를 가진 엄마와 형을 가진 둘째 아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끝나면 나에게 되물었다. 내가 저들이 저지른 범죄를 당한 피해자였다면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을까? 난 지금까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을 동정하는 내가 옳지 않은 것인지, 차갑게 그들을 보며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난 모르겠다. 갑자기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난 믿는다. 그들의 마음엔 어떤 상처가 있는지 들어주고 싶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와서 나무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요즘 들어 김천 소년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은 춥지는 않을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11.05 23:02

행복한 공존

“냥냥아, 냥냥아.”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를 부른다. 이른바 캣맘(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자발적으로 보호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처하는 친구의 이야기다.이 친구가 길고양이인 냥냥이를 만난 건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에도 고양이를 좋아했던 그 친구의 눈에 유달리 경계심 없이 잘 따르는 길고양이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다니면서 한 번씩 쓰다듬어 주던 것이 어느 날 부턴가 미리 사둔 고양이 간식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초여름 즈음 냥냥이가 새끼를 낳게 되자 아예 사료를 구입하여 주기적으로 밥을 주었고, 박스를 이용하여 튼튼한 집까지 마련해 주었다.냥냥이는 귀여운 검정 무늬 새끼를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 새끼 고양이는 집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아파트 주차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주차장을 지나가던 차에 치인 것으로 보였다. 로드킬을 당한 것이다.새끼 고양이를 잃은 슬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짧은 다리로 팔짝팔짝 뛰놀던 새끼 고양이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어미인 냥냥이에게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마음에 슬픔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냥냥이가 다시 임신을 하여 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친구는 구청에 문의하여 고양이 중성화 수술인 TNR(Trap-Neuter-Return)을 시키기로 했다. 동물병원으로 보내졌던 냥냥이는 며칠 뒤 한 쪽 귀 끝이 살짝 잘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우리 주변에는 냥냥이와 같은 많은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로드킬과 각종 질병의 위험,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2~3년 이내의 짧은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더해져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길고양이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고양이들로 인해 교통사고가 증가한다던지 쓰레기를 뒤지고 발정음과 같은 소음을 낸다는 이유로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낸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길고양이를 잡아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자생적으로 살아가는 길고양이는 안락사를 시키더라도 개체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짓고 사는 고양이의 특성상 한 영역에서 고양이가 사라지면 다른 영역의 고양이가 번식해 들어와 오히려 개체수가 느는 ‘진공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TNR 사업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과천시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로 확대되고 있다. TNR을 시킬 경우 장기적으로 길고양이의 개체수가 감소되는 효과가 있고, 고양이 특유의 발정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여 주민의 불편을 줄이면서, 이와 함께 길고양이의 복지를 생각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일종의 타협책인 것이다.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길고양이들은 이전부터 인간들과 생활 터전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심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관심과 이해를 통해 생태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맞대면 얼마든지 길고양이와 인간의 충돌을 완화할 수 있다. 길고양이들과의 행복한 공존을 위해 대화와 협의를 나누고 지혜로운 합의점을 찾을 때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10.29 23:02

혁신 돕는 실행력 교육 필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심각하고도 풀기 어려운 일이 ‘일자리’ 문제다. 일자리 구하기가 매우 만만치 않아, 인위적인 손길 몇몇으로 과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물론 사회적으로 기회와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고, 청년들의 재능 발휘를 도와주는 지원들, 새로운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제도와 장치, 그리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뭔가 창조할 수 있는 신선한 동력이 남아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모두가 의사와 공무원이 되려 한다면 새로움을 위한 마중물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결국 일자리 정책과 더불어, 긴 호흡을 바탕으로 교육과 같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지원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일자리 문제에 있어 심각한 점은, 과거에는 많았던 비교적 좋은 대우에 중간 정도 기술이 필요한 직업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높은 지식과 창조성이 필요한 일자리들로 기회가 압축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토니 와그너는 아이들에게는 입시교육보다 ‘혁신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은 매우 좋아졌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나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무엇을 아는지 보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실행력이 더 중요해졌다. 이런 실행력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의 출발이 아닐까. 실행력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능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공부하며 적용하면 된다. 지식은 계속 늘어날 뿐만 아니라 변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실천하는 태도는 오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숙달되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방법은 이런 부분이지 단순히 영어나 수학 실력이 아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지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에는 맹목적인 암기와 문제풀이식 교육이 지나치게 많다. 모든 배움의 출발점은 아이들의 ‘동기’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는 삶을 혁신하는 열정의 근원이 된다. 끊임없이 동기가 샘솟게 한다면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자신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일구어낸 작은 배움과 성취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인터넷 시대의 블로그나 SNS 등은 지식 나눔을 돕는 훌륭한 자원이 된다. 이것들은 나중에 아이들의 디지털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여 자신이 필요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양한 능력을 지닌 청년들이 도전하여 재능을 풀어낼 수 있는 공정한 장이 마련된다면 사회 변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가 될 것이다. 단순하고 일회적인 지원보다도, 단순한 실행력과 혁신이 필요한 작은 문제들을 찾아내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축제를 마련하고,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10.22 23:02

쇼핑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을 보며

9월 28일, 수많은 홍콩 영화의 원천인 홍콩 경찰이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되자 홍콩에서의 ‘작은 소란’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가 믿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억눌려온 홍콩 시민의 소리입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도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중국은 거짓말쟁이입니까?’ 와 같은 말들은 홍콩 주민들이 얼마나 외면당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자, 중국은 사회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을 특별 행정구로 정해 고도의 자치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 홍콩은 중국 정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홍콩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짐에 따라 중국 정부는 이제 ‘없어도 아쉬울 것 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본래 직선제로 예정되어 있었던 2017년 행정 수반 선거가 사실상 ‘보통 선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홍콩에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비폭력 시민 불복종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입장과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본다면, 현재 ‘우산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중국이 들어줄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갑’ 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 시민들은 지금 불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민 혁명도-혁명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모두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혁명이 실패인 것처럼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후에 중국의 성장세가 고착화되는 시점이 오고 중국 전역에 ‘민주화’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면 중국은 민주화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미 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전면적인 자치권은 보장하지 않고 있다. 시민 의식이 성장하게 되면 시민들은 그들의 기본 권리에 대한 열망을 더욱 표출할 것이고, 결국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우산 혁명’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산 혁명’은 중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광장을 점거한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먼저 ‘겁도 없이’ 덤비는 자들을 보며 홍콩 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자신이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을 그저 방관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 국가들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지구는 역사상 없었던 기술의 진보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도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의식은 퇴보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기술로 인해 국가는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더욱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일상에서 오는 것 같은 선전에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력은 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제 대국이지만 평화적인 시위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하는 중국을 보면서, 진정한 선진국은 시민이 자유롭게 시위를 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쇼핑의 메카에 펼쳐진 ‘싸구려’ 우산들은 국가의 억압을 막아내는, 민주주의의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10.15 23:02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린 조선 사람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꿈에도 바라던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가 분단을 겪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 북한인, 외국인도 아닌 사람들이 생긴다. 이들은 이후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서 외국인이 되어버린다. 바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들이다. 일본에 살면서 납세의 의무도 이행하지만 일본 정부의 차별 대우는 심하다. 심지어 우리나라도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이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 3, 4세들 중 조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소학교는 조선 학교를 다니지만 고등학교로 진학 하는 시기가 오면 일본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조선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학 입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일 교포 학생들은 다시 대학 입시를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일본은 고등학교 수업료를 무료화 하는 정책도 조선 학교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많은 조선 학교들 중, 오사카 조선 고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오사카 거리에서 이런 상황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리고 시위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특히 럭비부 학생들의 웃음은 더 해맑아 보인다.박사유 감독의 영화, ‘60만번의 트라이’는 이들 오사카 조고의 럭비부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 고등학교 럭비 대회 중 가장 큰 ‘하나조노’ 우승을 노리며 ‘일본제패’를 외치는 오사카 조고는 일본 내에서도 실력 있는 학교로 뽑힌다. 그리고 그들은 외친다, “우리는 조선사람 입니다”. 일본말이 더 능숙하지만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말하고, 일본 사회에서 받는 차별을 실력으로써 극복해 나가려 럭비에 매진하고 있다. 항상 경기가 시작하기 전 선수들은 둥글게 어깨동무를 하고 외친다. “하나, 믿음, 승리!” 넓은 일본 럭비 경기장에서 한국말로 자신들을 격려한다.오사카 조고 학생들이 많은 절차를 거치고 떠나는 수학여행의 목적지는 북한이다. 북한에 있는 자신들의 친척과 만나 한 언어로 소통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 살면서 그들을 잊고 있었지만 재일 교포들은 남과 북 모두를 가슴 속에 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졌다.이 영화를 내 또래 친구들이나 10대 청소년들에게 추천해 주면 반응이 시큰둥하다. 재미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따분하기만 할 영화 같기 때문이다. 일에 치여 사는 30, 40대 어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영화 보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렇지만 길지 않은 시간 1시간 47분을 이 영화를 위해 투자해 주길 바란다. 재일 교포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정작 우리는 등을 돌리고 서있다면 그들도 점차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고 살아 갈지도 모른다. 이런 비참한 일을 막기 위해선 우리도 그들을 알고 기억해 줘야 한다. 아주 작지만 힘있는 일, 이 영화를 보고 그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언젠가 삶을 살다 보면 일본에 사는 우리 교포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며 인사 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자.

  • 오피니언
  • 기고
  • 2014.10.08 23:02

진심으로 소통하기

지난 9월 12일, 나는 세계 평화의 날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발칸의 붉은 장미라고 불리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처음 해외로 나가는 터라 설레기도 하였지만 이와 동시에 의사소통의 걱정으로 인해 상당한 불안감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불가리아어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영어 역시 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만큼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걱정을 품고 약 12시간의 비행 끝에 소피아 공항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우려는 도착과 동시에 현실로 다가왔다. 행사 주최자와 불가리아 친구 한 명이 마중을 나왔었는데 이들과 인사를 할 때부터 말문이 턱 막혀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나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듣거나, 웃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뿐이었다.그리고 며칠 뒤, 전체 8일간의 행사 중 3번째 날이 되었다. 그 날은 현지의 초등학교에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종이접기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저마다 몇 명의 아이들을 전담하여 종이학 접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 역시 대니스라는 남자 아이를 맡아 종이접기를 시작하였다.나는 우선 몸을 낮춰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순서에 따라 조금씩 종이학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기내에서 익힌 몇 마디 불가리아 인사말과 감사와 칭찬의 표현을 해주었다. 나의 발음이 이상했는지 대니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따금 서로를 마주 보며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화 없이 가장 먼저 종이학 한 마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이파이브 했다. 이 후 우리는 또 다시 아무런 말없이 내리 3마리의 종이학을 접었다.그렇게 평범한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헤어질 무렵, 하교하던 대니스가 갑자기 발길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함께 접었던 종이학과 연필을 내밀면서 나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른 수업을 위해 다음날 학교를 찾았을 때 대니스는 내게 조그마한 불가리아 기념품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다시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부르며,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서로의 진심만으로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그 이후로 나는 다른 친구들을 대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분명히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는 잘 되지 않지만 내가먼저 진심을 다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상대방도 나를 배려해 주었다. 심지어는 불가리아 친구와 단둘이 깊은 대화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대니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운 덕분이었다.진심으로 소통하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처음의 나처럼 외국인이나 혹은 그들의 부모님, 친구, 연인 등 크고 작은 인간관계 속에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조금만 용기를 내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거짓 없는 진심을 보여준다면 상대가 누구든 긴밀히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란 전 세계인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10.01 23:02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나도 즐겁고 학생도 즐겁다

그리 오래 지난 일이 아니지만, 교단에 섰던 첫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교사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자 가장 어려운 질문을 그날 받았다. “선생님은 왜 선생이 되셨어요?” 면접을 위해 준비했던 대답이 아니라, 진짜 내 안의 대답을 찾는 것이 평생의 화두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역할이 다르지만 나는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학교에 가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굉장히 힘들고 지루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업속의 나와 원래의 나에 대해 생각하며 어우러지려고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사실 매일 매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보온병의 물을 따라 마시고 짝과 이야기 하고 필통을 흔든다. 왠지 앉고 싶은 짝과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서 그런가 해서, 순간 “번호 대로 앉아!” 외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신체적 자유나 작은 속닥거림을 빼앗는다면 교실이 얼마나 팍팍해질까 싶어 다시 한 번 심호흡 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아본다. 아이들이 얼마나 즐겁게 배우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수업은 교사만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 말에 모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도 아이들 마음속에서는 얼마든지 딴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정돈된 모습만을 만들다 보면, 결국 수업은 가르치려는 교사와 쉬고 싶은 학생간의 전쟁이 된다. 하지만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다운 모습으로 진심으로 함께하면 뭔가 마음이 맞는 순간들이 더 많아진다. 그걸 찾고 기다리는 일이 힘들지만 보람찬 일과가 되는 것이다.그리고 교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와 함께 있는 학생은 어떤 아이인지,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교사로서의 내 모습을 천천히 찾고 있다. 이런 고민이 이어져야 수업에 빛깔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또, 마음속에 철학이 있다고 해서 바로 수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해야 해서 어렵고 또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술과 음악은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지만 수업은 노력으로 조금씩은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수업을 함께하는 말하기, 관계 맺기, 수업 지식 등은 시간을 두고 차분히 닦아 갈 수 있다. 그래서 기술을 습득하려고 안달하기보다 먼저 수업 안에서 나다움을 찾아보려 한다.그래서 수업 방법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 나에게 맞는 것을 찾고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아닌 것으로 자꾸 수업을 치장하게 된다. 내가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교사들은 대체로 모범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위 시선을 생각해 남 보기 좋은 모습을 애써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수업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아무리 병아리 교사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수업 상이 어렴풋이 있을 텐데, 그것을 접어두고 남의 기준에 내 수업을 맞추려는 때가 많다.그렇지만 ‘마음속에 있는 나’와 ‘보이는 나’가 다르면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수업을 해야 나도 즐겁고 학생도 즐겁다. 일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첫날의 질문은 그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9.24 23:02

끝나지 않은 4월 16일, 아니 끝낼 수 없는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이후 100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476명의 가족과 친구들은 100일이 넘도록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중에서도 294명의 가족, 그리고 아직 가족들과 만나지 못한 10명의 가족은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단지 불운의 사고였을 뿐이고, 국가가 나서서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절대로 통용될 수 없다. 공기관의 엄격한 점검이 있었다면,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인해 청해진 해운이 낡은 배를 사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실수와 정책으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면 국가도 배상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지친 상태다. 자식이 사고를 당했는데 계속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식의 곁을 지켰다. 부모들이 살아갈 때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을 건강하게 기르고 자신이 다하지 못했던 것까지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돈을 벌고, 직장을 다니는 것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을까? 4월 16일에 일어난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서 삶의 목적을 잃은 부모들도 있다. 일시적으로 직업이 없으면 기본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수입이 없게 된다. 결국 월세를 내지 못해 가족 집에 신세를 지고, 기본적인 식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사태에 100일이 넘게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국회에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기초적인 보상도 되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리 혐의 의혹을 받고 있는 여당의 한 국회의원의 체포 동의안을 막기 위해 개최된 방탄 국회에서는 일부 야당 의원들도 반대에 표를 던져 여당을 도왔다는 점이다. 대의민주주의가 필수적인 현대 국가에서 국민들은 그들의 의사를 대변해줄 사람들을 국회로 보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오히려 국민들을 외면하고 굴복시키려고 한다. 최근 여당은 유가족과의 협상 자리에서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법 제정과 올바른 수사를 약속했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유가족을 외면하다시피 하고 있다. 현재 정부와 유가족이 합의를 보지 못하는 사안은 기소권과 수사권에 관련된 문제이다. 하지만 국가가 유가족들이 믿을 수 있도록 수사를 진행했다면 유가족이 이를 국가에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가족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없다. 유가족들은 단지 사건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건이 끝나려면 먼저 실종자들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 이후로는 사건에 대한 올바른 수사가 끝나야 한다. 보상 절차는 그 이후다. 유가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무엇이 원인이 되었는지를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싶은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나려면 유가족 모두가 이제는 끝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전까지 4월 16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끝낼 수 없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9.17 23:02

평화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오는 9월 21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다. 이 날은 1981년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당시 의장이었던 우리나라의 조영식 박사가 제안한 것으로, 유엔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9월 셋째 주 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가, 2001년 유엔총회에서 다시 9월 21일로 고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이 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 이 날을 위해 매년 일정한 주제를 제시하였는데, 올해의 주제는 바로 평화에 대한 권리(Right to Peace) 즉, 평화권이다.평화권. 뭔가 좋은 말처럼 들리면서도 그 개념이 분명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평화권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으며,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반면에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평화를 하나의 인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유엔을 중심으로 그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특히 1984년 유엔총회에서는 평화권 선언을 발표하여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신성한 평화권을 갖고 있다는 생래적 권리로서의 평화권을 확인하고, 평화권의 보존과 이행을 증진하는 것은 각 국의 의무임을 선언했다.그리고 최근에는 평화권이 평화와 인권을 결합한 제3세대 인권으로써 독자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그 향유주체도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까지 해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평화를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는 침략전쟁 포기, 군비축소, 전쟁의 위험에 처하지 않을 권리,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군사적 목적의 기본권 제한 금지, 평화를 위한 시위와 시민참여의 권리 보장, 희생자들의 권리 등이 포함된다.실제로 우리주변 곳곳에서 평화권이 요구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해군기지 건설과 미군기지 이전으로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제주 강정마을과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국가안보와 가진 자들의 이익에 의해 평화적인 삶을 누릴 권리를 빼앗겼다.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폭력 속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대한 감옥에 갇혀 평화를 유린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평화권이란 이 같은 폭력적,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양심적 거부와 불복종의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물론 평화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 이는 주로 미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오는데 한국 역시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평화권이 인정될 경우 패권경쟁을 위해 힘겨루기를 하는 이들 국가들의 군비증강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국 내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결부된 국가적 사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평화권이 좋게 보일 리 없다. 국가의 이익 추구에 의해 인간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저서 ‘시민 불복종’에서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전에 인류의 일원부터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단순히 눈앞의 이익을 쫓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현재와 미래의 인류를 위한 보다 큰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연대하여 권리로서의 평화가 인정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꿈꿔본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9.03 23:02

두려움을 깨고 교실을 거꾸로 뒤집기

시대에 따라 교육도 변한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학생 중심으로 배움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항상 교실의 화두가 된다. 최근 교사들 사이에서 ‘거꾸로 교실’이 화제다. ‘거꾸로 교실’은 영어로 Flipped Classroom이라 불리는 교육방법으로, 2010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주목을 받고 있다. 거꾸로 교실은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교실에서 하던 지루한 강의식 수업을 영상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수업 전에 미리 보고 온 후, 교실에서는 강의 대신 다양한 활동으로 재미와 함께 공부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것이다. 거꾸로 교실에서는 일방적 강의에서 소외됐던 학생들이 다시 교실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기존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사에게 지식을 전달받고 배운 내용을 집에서 복습했다. 이때 부족한 부분은 사교육을 통해 보충하는데, 사교육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게 커지며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학교에서 다시 배우는 일이 흔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교실을 뒤집는 것은 학생 중심의 교실 문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고, 수업 내용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도울 수 있다. 학생들은 배운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실험하며, 더 깊은 수준의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교사와 학생 모두 소통으로 가르치고 배울 기회를 얻는 셈이다. 하지만 거꾸로 교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교사가 제공한 사전 학습 자료들을 보고 습득한 지식을 기반으로 교실에서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전 학습 자료들을 보고 온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그래도 거꾸로 교실을 통해 선생님과 배움의 교감이 커진 학생들이라면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지 않을까. 또, 사전 학습 자료가 꼭 동영상일 필요도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영상 대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 교사는 배움을 돕는 다양한 정보들을 적절히 제시하여 학생들을 돕고, 학생들은 정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지식을 구성하고 나눌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새로운 시도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색되고 있다.하지만 교실을 뒤집는다는 말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는가보다. 심지어 선생님들마저도 학생 중심으로 교실이 돌아간다면 교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 의문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급속도의 사회 발전에 따라 교육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항상 예측 불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교육을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그릇들에 대해 우열을 따지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겪은 시대의 틀로 교육을 이해하고 고수한다. 하지만 변화와 개혁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변화가 주는 신선함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고정관념이다. 새로움을 두려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시선이 주는 변화를 담대하게 수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두려움을 깨고 아이들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교실을 한번 거꾸로 뒤집어보자.

  • 오피니언
  • 기고
  • 2014.08.27 23:02

교육감은 학생이 뽑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례안, 예산안, 결산서의 작성, 교육규칙의 제정, 교육 기관의 설치 이전 및 폐지에 관한 사항, 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 결정 등 교육감이 관장하고 있는 중요 사무 중 일부만 서술한 것이다. 교육감은 시·도 교육 학예에 관한 한 대통령에 버금간다. 그럼 이런 교육감의 모든 활동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제공하고, 이런 활동들에 대한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내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교육감을 뽑을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왜 교육감 선거로 인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으면서 교육감 선거를 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보고 싶다. 과연 그 동안 통용되어 왔던 이유처럼 학생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선거를 치르기에는 너무 순수하기 때문일까?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선거를 할 수 있는 어른들은 얼마나 성숙할까? 교육감 선거는 정당 선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성향과 A 후보의 성향이 같으면 A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보통의 사례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왜 이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명쾌한 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는 것일까. 교육감의 성향을 볼 가능성이 높다. 교육감이 보수 성향인지 아니면 진보 성향인지. 사실상 정당만 보고 투표하는 실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교육감 선거에만 국한되지 않고, 후보의 공약과 가능성을 보기 보다는 이미지와 성향을 중시하는 선거의 현 세태가 짙게 묻어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성숙한’ 어른들의 선거다. 그럼 학생들이 미성숙하다고 하는 근거는 뭘까? 이미 여성이나 흑인들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선거에서 배제되어 온 역사가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모든 영향을 그대로 받아내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에서는 항상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어 왔다. 복장, 두발, 교육 방식, 대입제도 등 학생들의 모든 것들을 결정한 것은 단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학생이 아닌 어른들이었다. 어른들 구미에 따라 교육정책을 수도 없이 바꾸면서 학생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선택에 따라 교육감이 바뀌고 교육감의 정책에 따라 교육 제도가 바뀌어도 학생들은 항의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 제도대로 생활해야 했던 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교육감 선거에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그 ‘성숙’하다는 어른들조차 막상 선거 전단지가 집으로 배달되어 오면 그것을 꼼꼼히 읽어보기 보다는 곧바로 휴지통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선거에서 당선된 교육감의 정책을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학생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분명히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교육감들이 내세우는 공약 또한 더욱 구체화되고 학생들을 위하게 될 것이다. 공약이 실현되지 않으면 학생들은 그들의 ‘미성숙함’과 ‘순수함’을 내세우며 더욱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교육감은 학생들이 뽑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학생들이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학생들의 선거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만큼 자신의 교육을 선택할 권리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 비단 선거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에게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교육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미성숙하고 순수하다고? 모두 기억하자. 인류사에서 역사를 바꿔왔던 것은 모두 그 ‘미성숙함’과 ‘순수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8.20 23:02

페이스북 '좋아요'의 문제점

7살 때 집에서 할게 없으면 운동화를 신고 털레털레 집 옆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그러면 친구들이 항상 공을 차고 있었다. 나는 불쑥 들어가 대충 편을 나누고 같이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스무 살,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심심해서 밖에 나가는 일이 없다. 손 안에 스마트폰만 있으면 심심함도 잠시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누구나 접속할 수 있고 언제든 친구와 대화할 수 있는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다.내 생각을 소신껏 글로 써서 보여주며, 좋아하는 유머, 연예나 스포츠 뉴스, 명언 등을 ‘좋아요’나 ‘리트윗’버튼 하나만으로 공유할 수 있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항상 같이 이야기 하는 듯 착각 속에 빠진다. 나 역시 풍덩 빠져있다. 재미있는 소식, 궁금한 뉴스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친다. 다른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부분이 있으면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할 때 그 주제는 살짝 피해서 불필요한 갈등을 애애초 만들지 않는다. 이런 유용한 면들 때문에 나와 같은 청춘들에게는 SNS가 거의 필수가 된 것 같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SNS에 대해 비판한다. 중독성이 심해서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대표적이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비판 받아야 할 대상은 SNS가 아닌 우리 사람들이다. 우리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서 생기는 사회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런 많은 문제들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현재 SNS 상에서 가장 큰 이슈는 꺼지지 않는 논란인 세월호 사건이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써 4달이 다 되어간다. 세월호 특별법과 진상 규명을 위해서 유가족 분들께서는 열심히 투쟁하고 계신다. 하지만 4달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SNS에서는 이제 지긋지긋 하다는 글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고 특별법 제정이 의사자 지정, 대학 특례 입학과 관련이 있다며 유가족들이 너무한 것이라는 게시물들에 리트윗과 ‘좋아요’가 만개를 넘어선다. 내 친구들의 이름도 ‘좋아요’ 목록에 있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까운 한숨이 나온다. 심지어 유가족들을 ‘유족충’이라는 단어로 부르며 SNS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와 같은 내용 중에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도 다수 이다. 그런데 내용 전체를 읽어보고 사실 확인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들이 무심코 누른 리트윗이나 ‘좋아요’로 인해서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익명성을 무기 삼은 악성 게시물들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올라온다.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는 각자의 소신이 달라서 토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어떤 부분에서는 다를 수 없는 것이 있다. 옳은 것, 바른 것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하하며 욕을 쓰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옳지 못한 행동이다.사회 정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대학생, 10대들도 SNS사용에서부터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게시물을 읽었을 때 헷갈리는 것이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정확한 정보를 찾아보고, 내 SNS는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을 잊지 말고 신중하게 게시물을 선택해서 공유해야 한다.이것이 작게나마 우리 청춘들이 할 수 있는 의무다. 또 이런 작은 행동이 앞으로 살아갈 사회를 더 건전하게 만들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8.13 23:02

복종 권하는 사회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복종의 대상이 되는 ‘당신’은 관점에 따라 사랑하는 연인, 일제 강점기의 잃어버린 조국, 혹은 종교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진리 등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당신’이란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린 복종을 권하는 문화가 되지 않을까?우리 사회의 복종을 권하는 문화는 전통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조선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충과, 효를 바탕으로 부모와 어른들에게 조건 없는 복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복종을 하도록 길들었고, 해방 이후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했다. 특히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선 이 시기에는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가 학교를 비롯한 온 사회에 팽배하였다.그리고 현재, 우리는 계속해서 복종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이른바 ‘착한아이’로 성장하도록 강요받고, 좋은 학교에 가야 성공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중등 교육을 마칠 때 까지 오로지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만 하는 ‘범생이’로 자란다. 대학에 진학을 해서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스펙 쌓기에 청춘을 불태운다. 여기서 조금만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 소속된 사회 집단에서 퇴출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어른들의 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들에게 남은 것은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와, 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타인과 사회 일반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뿐이다. 이러한 문화의 어두운 면은 세월호 참사 이후 여실히 드러났다. 그저 여태껏 교육받은 대로 어른들의 말을 잘 따랐던 수많은 착한 아이들이 차디찬 바닷속에 수장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이른바 ‘관피아’로 통칭되는 복종의 문화에 길든 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부정행위와 그에 따른 문제들이 속속들이 적발되었다. 누구 하나 부정을 고발하려 들지 않았다. 이와 같은 복종을 권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소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의가 이루어지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는 정당한 외침에 돌아오는 건 ‘가만히 있으라’는 일방적인 명령뿐이었다.이러한 시점에서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대학생들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겪는 아픔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우리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밀양의 어르신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송전탑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행동하자. 사회 문제에 대해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의 소소한 실천이 거대한 불의와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저력이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8.06 23:02

틀려도 괜찮아, 부드러워도 괜찮아

모든 물건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실패를 딛고 우연에서부터 기지개를 펴, 더 큰 감동을 주는 물건들도 있다. 1968년, 3M사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기존의 접착제들보다 강력한 물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접착력은 좋지만 쉽게 떨어져 버리는 물질이 탄생한 것이다. 낙담에 빠진 그에게 직장동료 아트 프라이는 접착제를 바른 종이 상품을 제안한다. 아트 프라이는 주말마다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였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찬송가 쪽수를 찾아야 해서 종이를 한가득 끼워두었는데, 찬송가를 펼치면 종이가 쏟아져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종이가 쏟아지지 않게 하려고 풀을 붙여두면 찬송가의 얇은 페이지들이 찢어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잘 붙지만 깨끗하게 떨어지는 종이를 판매하자는 아트 프라이의 착안 덕분에, 드디어 1981년부터 포스트잇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그로부터 포스트잇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조금 전 일도 깜박깜박하는 나에게도 포스트잇은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다. 사실 포스트잇 말고도 내 주변에는 수많은 메모들이 여기저기 남겨진다. 스마트폰에, 몰스킨 노트에, 바탕화면 메모장 파일에. 메모들은 내 흔적이 닿는 곳마다 살아있어서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갖가지 일들을 나 대신 기억해준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마다 바로바로 찾아 쓸 수 있는 편리함에는 아직도 포스트잇을 따라갈 자가 없다.크기별로 색색별로 구분된 포스트잇들은 복잡한 세상일들을 잘 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 심지어 어떨 때는 붙어있는 위치만으로도 여러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때로는 벽에 한가득 붙어있는 포스트잇들을 보며 나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세상에 감탄하기도 한다. 포스트잇에 뭔가를 적는 동안에는 생각이 정리되고 상상력마저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때로는 내가 왜 적지 않고서는 하루라도 마음 놓고 살 수 없게 된 것인지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메모가 된 것 같아 부쩍 심통이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물 먹은 담요처럼 기분이 내려앉을 때에도, 작고 귀여운 포스트잇 뭉치를 보면 다시 한 번 새로운 무언가를 적고 싶은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이렇듯 포스트잇은 늘 내 곁에 있어주는 고맙고 깜찍한 친구이다.포스트잇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마저도 감탄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실패한 줄만 알았던 작품이 발상의 전환으로 새롭게 가치를 얻은 이 사례는, 창의적 사고와 유연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연이 필연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려주어, 잠시 넘어진 청춘들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틀려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도 준다. 또한, 다른 종이들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스스로 붙었다 떼어졌다 하며 유연하게 전체의 의사소통을 돕는 모습은 사회에 첫발을 디딘 초년생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더운 날씨에 울컥하여 맥주집을 향하고 싶을 때마다 포스트잇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유쾌하게 웃어 보는 건 어떨까? 붙였다가 언제든지 뗄 수 있으니 틀려도 괜찮다고, 부드럽게 살아도 괜찮다고.

  • 오피니언
  • 기고
  • 2014.07.30 23:02

학생을 위한 유토피아

대한민국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진행하는 야간 자율 학습이 해외 토픽에 올랐다. 토픽의 주제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일’ 이라는 주제였다. 한국 학생들처럼 하루 일과가 획일화되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아침 6시에 기상, 등교, 정오가 다 되는 시간까지 공부, 그리고 취침. 사실상 하루 24시간 중에 3/4인 18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셈이 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국어와 영어를 배워서 세계와 교류하고 폭 넓은 학습을 할 수 있게 준비한다. 수학을 배워 논리력과 공간 지각 능력을 기른다. 도덕과 예체능 과목을 배워 사회에 적응하고 즐기는 능력을 기른다. 이렇게 학생은 12년 동안 자신의 뇌를 발달시키고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대학교에 가서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한다. 뇌를 발달시켜왔기에 공부하기에 훨씬 수월하다. 이론상으로는 가장 완벽한 교육 과정이다. 한국 학생들은 세계적인 학술 대회에서도 항상 수상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기술력과 지적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뻗어 나가 대한민국 또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행복을 느끼는가? 학생이 공부하도록 강요하여 성적을 이끌어내는 교육 환경은 좋은 환경인가? 학생들의 만족도와 행동을 보았을 때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인식은 성적에 의해 극단적으로 계층을 가른다. 이는 한국 학생들의 높은 자살률과도 직결된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자신의 계층의 현실을 깨닫고 극단적인 선택을 택한다. 자신의 자녀가 좋은 계층에 속하길 원하는 어른들은 학생이 하루에 18시간씩 학교와 학원에 있어야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란 불가능하다. 공부만이 뇌를 위한 계발이 아니다. 어떤 행위이든 집중하여 뇌를 사용한다면 뇌는 꾸준히 계발된다. 단지 책상 앞에 학생을 앉힌다고 해서 학생이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하는 사람만 한다. 나머지는 않는다.’ 라는 속설은 ‘성적의 계급화’를 가장 잘 설명한다. 체육 활동은 공간 지각 능력과 사회성을 극명하게 발전시킨다. 이는 미술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동아리 활동을 통한 집중은 학생이 ‘원해서 공부할 수 있게’ 만든다.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택하고 그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학생이 학습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막는다. 모범생이던 학생이 대학에 간 이후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창의력보다는 암기력으로 승부한 학생들, 주어진 교과서만 외우고 자신이 공부거리를 찾아서 하는 능력은 떨어진 학생들은 학습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면 학교는 교도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모범수와 다를 것 없다. 아무리 교도소 내에서 모범수였어도 자유가 되면 방황하듯이, 모범생이라는 학생들도 자립성이 떨어지면 방황한다. 지금 한국에 학생들을 위한 유토피아는 없다. 어른들은 현 제도에서 가장 맞는 제도를 골랐다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교를 소개할 때 말하듯,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학생이 원하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다. 그 교육이 더더욱 효과적이라면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다. 한국은 지금의 교육 제도에만 고착화되어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모든 학생이 지금의 제도에 ‘일체화’ 된 지금, 조금의 변화가 가장 큰 효과를 불러올 때다. △김종표 군은 전북교육청 학생단으로 활동하며 최우수 상을 2회 수상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7.23 23:02

초등학생들에게 “넌 꿈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가수요!”, “의사요!”, “외교관이요!” 등 많은 답변을 듣는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기특하게 여긴다. 나도 그랬다. 내 초등학교 때 꿈은 동물병원 의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어른들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내 꿈이 왜 하나의 ‘직업’이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청소년은 직업이 꿈이 돼서 머리에 새겨지고 그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나는 그 질문을 던졌고 결론을 내렸다. 꿈은 하나의 직업이 아니다. 숨 쉬고 살아갈 삶이 한 번밖에 없는 것도 슬픈데 꿈마저 한 직업으로 결정지어야 한다면 너무 우울한 인생일 것 같지 않은가?EBS 지식채널e, ‘교육 시리즈-열다섯’을 보면 아일랜드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아름다운 선물을 볼 수 있다. 아일랜드 교육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공부였다. 매일 경쟁을 위해 러닝머신을 뛰듯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잘못을 느낀 어른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어른들은 마침내 엉뚱하지만 아름다운 선물을 줬다. 바로 시간이다. 중등 3학년을 졸업한 15살 아이들에게 1년의 세월, ‘전환학년’을 선물해줬다. 1년간 학교에 다니지 않으며 자신이 배우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며 보낸다. 기업, 대학, 봉사단체, 가게 등은 자신들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기술, 지식을 무료로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전환학년은 자신이 정말 뭘 좋아하는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었다.우리나라 학교에서는 하나의 교육과정을 따라 모든 아이들이 공부한다. 각자 좋아하는 것, 개성이 다르지만 가야 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마치 경주에 나가는 말들이 옆을 보지 못하도록 눈에 가림막을 달아 놓은 것 같다. 가수 이승기의 노래 ‘음악시간’에 나오는 가사처럼 “왜 우리는 다 다른데 같은 것을 배우며 같은 길을 가게 하나요….”이렇게 어른들이 만든 틀 속에서 사는 청소년들이지만 결국 내 인생을 선택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 청소년들도 이제는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스스로 가지며 살아야 한다. 돈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 보다,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사람은 그렇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삶이 너무나 즐겁다. 내 꿈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그래야만 한다. 어제는 뿌듯했고, 오늘은 즐거웠으며, 내일은 기대돼야 한다. 내 모습을 관찰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해 꿈을 그려야 한다.청소년들은 많은 꿈을 꿔야 한다. 모든 걸 잘 할 수는 없어도 많은 걸 즐기는 삶을 살고, 치열한 경쟁에서 이자 하기보단 경쟁에서 한 발짝 벗어나 뒤에서 오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 나가야 한다. 나는 사랑스런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 배낭 메고 세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며 친구들을 만드는 것 등 많은 꿈을 꾼다. 앞으로 살아갈 동안 더 많은 꿈을 꿀 것이다.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이뤄도 꿈꾸는 일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수많은 꿈을 꾸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한다.△김한결씨는 청소년 토론 프로그램 ‘정세청세’기획팀, 청소년 평화통일 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7.16 23:02

푸른 봄날의 자화상

며칠 전 서울에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휴식차 전주로 여행을 온다는 것이었다. 거의 2년간 만나지 못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한옥마을의 조용한 막걸리 집에서 술잔을 부딪쳤다.이 친구와의 인연은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공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친구의 여행담이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여행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 등등, 꾸밈없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막연한 아름다움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때까지 나는 이렇다 할 여행을 한 경험이 없었다. 여행을 통해 분명히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금전적인 문제나 다른 계획들에 차질이 생길 것 등을 생각하다 결국에는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것은 비단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평소에 하고 싶어 했지만 하지 못한 것들을 그 친구는 대부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나의 차이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매 선택의 순간마다 내 자신에 집중하기보다 주변의 환경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는 데 급급했다.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 자신이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 순간밖에 느낄 수 없는 행복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그 친구를 통해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렇게 나는 내 행복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오후 늦게 와서 한다는 소리가 늦잠을 잤단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계획 같은 건 없다며 되레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멋쩍은 듯 웃는다. 심지어 밤에 묵을 숙소도 잡지 않았다고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친구가 자신만의 청춘을 즐기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 아무렴 어쪄랴.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그만이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의 푸른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친구와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화의 주제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직 정확한 진로는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다보면 누구보다 멋진 어른이 되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그의 눈은 열정으로 빛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그 친구의 눈에 비친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40점의 자화상을 남긴 반 고흐는 캔버스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는 행복했다. 가난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가 원하는 혹은 부모님이 원하는 기대에 미치기 위해 자신의 꿈과 현재의 행복을 저버리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청춘들에게 160년 전의 화가 반 고흐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곽현문씨는 전북환경운동연합 푸르미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7.09 23:02

스스로 배우고 싶어서 배우도록 도울 수 있다면

방학이 다가오며 복도에 점점 여름의 유쾌한 활기가 가득 찬다. 운동장에서 불어오는 더운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쁘게 여름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선생인 나조차도 서운한 마음을 잊고 방학을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여름이 오면 벌써 색종이를 반 접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벌써 한해의 반이 갔는데 그동안 나는 무얼 했나 싶어서 다시 3월의 기억을 떠오려 본다.3월에 학부모님들께 보내는 편지에, 내가 써뒀던 문구들이 있지 않은가. 개학 전날 잠을 뒤척이며 이리저리 단어 속에서 헤매다 나름 야심 차게도 아이들과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썼었다. “저는 아이들에게 많이 물어보고 많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선생님이, 아이들과 아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나누는 교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고 나누며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존중하며 함께 땀 흘려 일하고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 즉 하나의 ‘정신적 농부’로 아이들과 함께하려 합니다. 그리고 수확에 대한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수확이 많든 적든, 우리가 함께하는 길에서 더 큰 의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약속한 것들이 얼마나 잘 실천되었는지 반성해보며, 어찌 됐든 작게나마 실천의 발자국을 옮기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스스로 다짐을 새겼다. 사실 생각해보면, 선생이 되었든 엄마가 되었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하도록 돕는 일이다.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아이의 자발적 행동은, 상이나 벌과 같은 ‘당근과 채찍’에 의한 행동보다 훨씬 오래가고 만족도 크다. Daniel Pink는 저서 〈Drive〉에서, 스스로 하고 싶다는 동기부여의 요소로 ‘자율성(autonomy)’, ‘숙련(mastery)’, ‘목적(purpose)’의 조화를 이야기했다. 즉, 아이들 마음속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동기 부여의 핵심이다. 그래서 아이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게 돕고,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이 학습에 대한 주인의식을 높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우리 생활에 깃든 조급함은 최초의 교육이 시작된 때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다. 선생인 나조차도 항상 진도라는 물리적 한계에 추격당하며 조급해하는 것이,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항상 나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지금 이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아이들의 삶을 교실로 한 발짝 초대하는 것이 나름의 정답이 아닐까 싶다. 일단 시계를 자주 쳐다보는 습관부터 줄이고.나는 학생이었을 때도 3월에서 2월로 한 해를 보냈고, 졸업한 지금도 여전히 3월부터 2월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에게 7월은 해의 고민을 한 번 더 살피는 반 틈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해를 절반쯤 보낼 때마다 전보다 너그럽지만 수줍어진 자신을 발견한다. 풋내는 조금씩 벗어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아이들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 고민은 점점 커져간다. 어렵겠지만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금의 고민을 계속해 간다면 내가 꿈꾸는 교실도 조금씩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송은정 교사는 전라북도 교육연구정보원 정보영재강사, 교육부 스미트교육 중앙선도교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7.02 23:02

우리가 극복해야할 조선의 말폐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를 비난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람들이 근거로 드는 것은 사실 조선의 말폐(末弊)이다. 여기서 말폐란 ‘말기의 폐단’을 가리킨다. 즉, 그들이 비난하는 조선은 이미 거의 망해가던 시절의 악습에 가깝다.조선이 신라나 고려처럼 오류와 모순을 극복하려 시도한 후속 국가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든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말폐를 청산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의 광복이나 분단, 대한민국의 수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구조에서 주어진 것들로, 우리의 선택이나 노력과는 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극복되어야 할 말폐가 여전히 잔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아마 구석구석 많은 말폐들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만 정리해보았다.첫 번째 말폐는 상전-노비 관계를 연상하게 하는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이다. 물론 제도적으로 노비제도는 공노비 해방(1801년)과 사노비 해방(1894)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러한 노비해방은 쟁취의 결과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여전히 고용주는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한 노비처럼 다룬다. 즉, 우리나라의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 연명하지만, 근대적 노동자와 전근대적인 노비 사이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력’은 상품이고, 상품을 거래하는 두 주체는 기본적으로 서로 대등하다. 따라서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입한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의 시간과 그 시간동안의 인력만 구입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1970년 전태일 이후로 40여 년간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불사르며 자신의 온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반공이란 명분으로 그들의 정당한 투쟁마저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며 억압하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삶은 여전히 노비처럼 고단하다.두 번째 말폐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탐하는 기회주의의 만연이다. 조선 후기의 혼란한 시대상황에서 관리가 되려면 세도(勢道)를 장악한 집안에 줄을 대고 뇌물을 바쳐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백성을 착취하며 자신의 손해를 벌충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이후 외세의 침략에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이완용 같은 기회주의자들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말았다. 그런 친일 반역자들과 그의 후손들은 그 뒤에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도입하며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아마 제대로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더라면, 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은 모두 청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배우는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미덕이다. 그것에 저항하는 자들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낙오자’가 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구조적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말폐들을 쉽게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불멸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비가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기우제는 반드시 성공하는 것처럼, 말폐들을 청산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4.06.25 23: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