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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우리 인생과 우주 - 백홍열

우리는 지금 서기 2009년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길어야 백년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눈앞의 현실은 경제난 속에서 발버둥 치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한번쯤은 고개를 들고 전 우주의 공간과 시간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태양의 행성인 지구는 직경이 13000km로 만약 지구를 사과 크기로 생각한다면, 해발 9Km의 에베레스트 산은 그 위에 작은 모래이며, 30km의 대기층도 얇은 사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큰 지구도 태양계에 비하면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태양은 직경이 140만km로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3배 이상 크다.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km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지만, 로켓으로는 5개월이 걸린다. 태양계의 끝은 대략 100억km까지이며, 빛의 속도로 반나절 거리이다.그러나 태양계도 은하계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하다. 우리 은하계는 태양을 포함 약 1000 억 개의 별로 이루어져있으며, 그 크기가 무려 10만 광년이나 된다. 바로 이웃별인 프로시마 센타우리로 가는대만 로켓으로는 수 천 년이, 빛의 속도로도 4년이 걸린다. 그러나 이런 은하계도 우주전체에 비하면 또 한 점에 불과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전체의 크기는 약 200억 광년으로 그 속에는 수 천 억 개의 은하가 있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도 빛의 속도로 200만년이 걸린다. 우주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정말 점 속의 점도 되지 않는다.이제 우주의 역사를 살펴보자. 최근 미국 WMAP 위성의 관측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137억 년 전 빅뱅에 의해 탄생하였으며, 이 때 생긴 우주 복사파가 아직도 남아 TV화면의 노이즈로 보인다고 한다. 우주 탄생 50만년 후에는 수소와 헬륨이 생겨났고, 최초의 별은 5억년 후에, 지구는 90억년 후인 약 45억 년 전에 만들어 졌다.지구에서 원시 단세포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38억 년 전의 일이며, 6억 년 전 고생대에는 폭발적인 진화가 일어나 바다에는 삼엽충이, 육지에는 양치류가 번성하며 지금의 석탄층이 만들어 졌다. 중생대는 약 2억 5천만 년 전 시작되었으나, 6500만 년 전 혜성충돌로 공룡이 멸망하며 포유류의 신생대가 시작되었다.원시인류는 300만 년 전부터 진화를 시작, 우리의 조상인 현생인류가 출현한 것은 5~10 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1만 년 전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인류는 4번째 간빙기인 따뜻한 현세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 기온이 올라가자 6000년 전 우리 인류는 잉여 생산력을 바탕으로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2000년 전에는 법을 바탕으로 서양은 로마가 동양은 진나라가 제국을 건설하여 인문 사회적으로 인류문명이 재도약 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그러나 기술 문명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로 만유인력이 발견 된 것은 400년 전이며, 전기는 불과 200년 전에야 발견되었다. 그리고 100년 비로소 우리 인류는 세균, 원자, 상대성 이론을 알게 되었으며, 전구, 전화, 비행기 등을 발명하였다. 60년 전에는 로켓, TV, 원자탄, 컴퓨터를 발명하였고, 50년 전에는 우주 배경복사와 DNA를 발견 하였다. 또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 역사상 최초로 우주까지 진출한 생명체가 되었으며, 지금은 위성통신, 인터넷, 휴대폰까지 쓰며 지식정보 문명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최근 100년 사이 과학 기술에 의해 인류문명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우주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주의 탄생을 지금부터 일 년 전이라 가정한다면, 지구의 탄생은 4개월 전, 생명의 탄생은 3개월 전, 고생대는 보름 전, 중생대는 일주일 전, 신생대는 이틀 전, 최초의 원시인류는 2시간 전, 현생인류의 출현은 바로 3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인류가 따뜻한 간빙기에 살게 된 것은 불과 20초 전의 일이며,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것은 10초 전, 로마 제국이 건설된 것은 3초 전, 그리고 과학문명이 폭발하고 있는 이 시대는 바로 0.1초 전이다.그리고 우리의 삶은 지금 이 폭발에 휘말려 있다우주 전체의 시간과 공간에 비하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 찰나에 불과하며 먼지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드넓은 우주와 그 역사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백홍열(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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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20 23:02

[금요칼럼] 선택이 넘치는 사회 - 전성철

만약 산신령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내가 딱 한 가지 선물을 주겠다. 무엇이든 얘기해봐라'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주문하겠는가? 많은 사람이 '건강' '돈' 등을 주문하겠지만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거지가 되면 무엇을 하겠으며, 돈을 잔뜩 갖고도 병상에 누워만 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딱 한 가지만 주문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가장 많은 선택을 가지도록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많은 선택'이다. 돈이나 건강 같은 것들은 깊이 생각해보면 다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행복한 인간이란 사실 많은 선택을 가진 사람이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 선택이라면 가장 좋은 사회란 자연히 시민에게 '다양한 선택'을 제공해주는 사회다. 선택이 없는 사회를 우리는 '배급제 사회'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사회가 대표적인 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단점은 결국엔 모두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에 못지않은 단점으로 모든 것을 '배급'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그렇다면 선택을 주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예를 들어, 국민의 행복지수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교육 문제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를 '평준화'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평준화는 우리 학생들에게 중요한 선택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공부만으로 경쟁하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지만,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편안히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다. 이러한 후자의 학생들에게 평준화는 매우 좋은 제도다. 바로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 교육의 근본 문제는 평준화 제도가 아니라 전자의 학생들, 즉 경쟁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경쟁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리가 터지도록 경쟁하고 그를 통해 탁월함을 추구하고 싶은 학생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선택을 빼앗긴 채 '뺑뺑이'라는 배급품에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평준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에 얽매이지 않는 중고등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것이다. 평준화를 없애면 우리는 또다시 애당초 평준화를 가져 왔던 엄청난 질곡을 반복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시민에게 가용한 선택을 줄임으로써 역사를 후퇴시킬 것이다.우리는 똑같은 문제를 의료 분야에서도 발견한다. 우리 의료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 마찬가지로 환자들에게서 선택을 빼앗고 있다. 무엇이든 값이 똑같다는 것은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선택이 넘치는 사회'란 비싼 것도 있고 싼 것도 있는 사회이다. 비싸게 주고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덜 좋은 대신 돈을 덜 낼 수 있는 그런 곳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만일 한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의 값이 같다면 그것은 국민의 선택을 엄청나게 제한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다양성에 대한 갈구를 느끼며 찾아 외제차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돈 있는 환자들이 선택을 찾아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은 외화를 유출시킬 뿐 아니라 우리 의료 산업의 발전을 막고 있다. 우리같이 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 만일 고급 의료 서비스, 즉 선택이 허용된다면 전 세계로부터 환자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과 정부는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양한 선택권이란 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정책을 국민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잡아야 한다. '선택이 넘치는 사회'가 우리 국민이 갈구하는 사회다./전성철(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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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13 23:02

[금요칼럼] 미네르바 사건에 대한 유감 - 정종섭

논어」는 언제나 읽어도 탄복할만하다. 그래서 정자(程子)선생은 논어를 제대로 터득하면 기쁨에 겨워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된다"(手之舞之足之蹈之)고 했다. 지행합일로 그 수준에 이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제대로 되지 않고, 말이 이치에 닫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名不正則言不順言不順則事不成). 그리고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결국 형벌이 정확하지 못하고, 형벌이 정확하지 못하면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事不成則刑罰不中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씀이다.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법과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 인정한다. 법과 질서란 대한민국에서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되,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후손들의 삶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산다.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그 원인과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 때, 이 틈을 타서 인터넷에서 '미네르바'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경제도 예측하고 정부도 비판하는 등 수 많은 글을 올렸다. 국민들은 누구의 말을 믿고 살아가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경제나 금융 전문가나 학자, 언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그래서 '미네르바'가 작성한 글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이 글에 동조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네르바'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글을 실제 누가 작성한 것인가가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검찰은 혐의자를 체포하여 인터넷에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법원에 기소하였다.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익명성을 이용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한 행위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판단은 법원이 가릴 몫이지만, 이 사건에서 더 중요한 것은 '미네르바'의 실제 인물이 체포되면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덧씌우려는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의 약점과 잘못만을 부각시켜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만 집중하였지, 왜 그 많은 경제학자, 금융전문가, 언론은 이보다 국민에게 더 설득력있는 논의를 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과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도 없고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이 사건이 정부나 전문가와 언론들이 미네르바에게 모두 손가락질을 하면서 자기 책임을 면하는 면책의식을 치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실로 건강하지 못한 면을 본다.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으면서 부분적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하나 잡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덧씌우고 나머지 사람들은 면죄부를 받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 많이 있지만, 그 원형은 기독교가 저지른 마녀사냥(witchhunt)이다. 마녀재판(witch trials)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12세기에 남프랑스에서 부패와 패악과 불륜과 거짓으로 만신창이가 된 로마카톨릭에 대한 개혁운동을 탄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전유럽을 휩쓸고 1692년 미국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거짓이라는 것이 재판한 사람들에 의해 실토되기까지 장장 500여년간 자행되었다. 처음에는 이단재판(inquisition)으로 시작하여 로마카톨릭에 대항하는 교리, 사상, 학문, 신앙 모두를 고문과 날조된 자백과 화형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다가 프로테스탄트까지 합세하면서 기독교와 다른 사람을 모두 마녀로 몰아 죽인 광기의 재난으로 화하였다. 여기서는 이단자나 마녀라고 낙인을 찍는 자와 낙인을 찍히는 자로 이분되어 결국 낙인을 찍는 자가 마음대로 살육을 하였다. 종교적인 이유에 더하여 정치, 경제적인 이유까지 합세하면서 무자비한 집단살인은 끝 모르게 진행되었다. 잔다르크도 갈릴레이도 케플러의 모친도 모두 이 과정에서 수난과 희생을 치렀다. 이런 인간사냥은 무지한 자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름난 수도사, 신학자, 법학자 등 지식인들이 대거 가담하였고, 보댕, 에드워드 코크, 프란시스 베이컨, 루터, 칼뱅, 멜란히톤, 에라스무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동조하였다.지난 정권에서 과거사문제가 국민들을 양분하고 반대 세력을 낙인찍고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배경에도 이런 심리적 원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네르바사건에서도 전문가와 정부가 먼저 스스로 반성하고, 그 다음에 미네르바의 책임여부를 논해야 명분이 있고 말이 제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야 법과 질서도 올바로 세울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다./정종섭(서울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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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1.30 23:02

[금요칼럼] 우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쏘자 - 백홍열

2009년은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은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갈릴레오가 처음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엔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올해를 '세계 천문의 해'로 정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주"라는 주제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대한민국에게도 2009년은 우주로 도약하는 아주 특별한 해이다. 현재 전남고흥의 나로우주센터에서는 우리가 개발한 KSLV-I 우주로켓 발사를 앞두고 마지막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금년 계획대로 KSLV-I 우주로켓이 과학기술위성 2호를 싣고 발사되면 우리나라는 1988년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에서는 9번째로 자력으로 우주발사에 성공한 나라가 된다. 우리가 꿈꿔 왔던 대로 우리 땅에서 우리위성을 우리로켓으로 쏘아 올려 우주독립국이 되는 것이다.이어 금년에 우리 손으로 만든 통신해양기상위성까지 지구정지궤도에 진입시키면,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세계10위권의 우주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금년 10월에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과학도시 대전에서 전 세계 우주관련 정부기관, 학자, 기업 등 3,000여명이 참여하는 국제우주대회를 개최 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우주기술을 세계에 과시하고 국내 우주산업을 차세대 수출산업으로 발전시킬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2001년 미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까지는 땅과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했다면, 21세기에는 하늘과 우주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한다.그래서 선진국들은 모두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우주탐사에 나서고 있다. 특히 지난 20세기가 미소의 우주경쟁 시대였었다면 21세기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필두로 제2의 우주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주는 먼저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선진국들의 우주경쟁을 구경만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21세기에는 이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우주로 뻗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KSLV-I 발사는 미래를 향해 대한민국의 희망을 쏘아 올리는 것이다.그러나 우주로 뻗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사회가 단합하여 도전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통계로 보면 우주로켓을 처음 발사해 성공할 확률은 30% 이하라고 한다. 과학자로서 우주발사체 개발을 성공시킨 인도의 압둘 칼람 대통령이 2007년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우주개발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첫 발사에 실패했던 경험을 이야기 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국민적 용기가 없었다면 인도의 우주개발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답해주었다.역사는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 외형적 힘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정신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개발은 국가 정신력의 문제이다.우리나라는 지난 세기 피와 땀으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비록 지금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잠시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우리가 다시 단합하고 도전한다면 또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만 있다면, 21세기는 대한민국이 세계를 이끌 수 있다. 2009년에는 이런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우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쏘아 올리자./백홍열(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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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1.23 23:02

[금요칼럼] 기업인들이여, 공부하라! - 전성철

MB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설된 부서들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이름의 부서가 있다. 무엇일까? 바로 지식 경제부. 기존의 산업경제부와 과학기술부 및 정보통신부의 일부 업무를 통합하여 신설된 이 부서는 21세기 지식사회의 중요성을 그대로 반영한 명칭이 아닐까 싶다. 그 만큼 지식과 경제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지식 사회란 돈 기술이 넘치고 나면 나타나는 사회다. 이제 돈은 넘쳐 흐른다. 좋은 기술과 사업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투자회사들이 돈을 얼마든지 대 준다. 기술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업에 뛰어들 수 있고 그래서 경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 이기는 자는 새로운 지식을 가진 자다.지식 사회에서는 사회가 극도로 투명화된다. 지금은 개인이 모두 신문사 하나와 방송국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과 UCC(사용자 제작 컨텐츠)가 바로 개개인의 신문과 방송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비밀이 없다. 최근 이슈가 되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사건은 지식사회가 얼마나 투명한 지 보여주고 있다.이렇게 투명한 사회에서는 어느 기업이든 본질적 경쟁력을 가지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 본질적 경쟁력이란 인간관계에 의존하지 않은 경쟁력이다. 즉, 품질과 가격의 경쟁력이다. 품질과 가격의 경쟁력은 근원적으로 '지식'에서부터 나온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지식을 통해 경쟁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도산 위기에 처했던 웅진은 '렌털(rental)'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에 의존해 화려하게 부상했다. 바로 '지식'의 힘이었다.이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오지만 그런 보편적인 지식으로는 경쟁 우위를 점하기 힘들다. "가치 있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공부하는 데서 온다." 윤석금 웅진 회장은 '렌털'이라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쫓아 다녔던 조찬 강의에서 얻었다고 했다. 그것이 강의든, 책이든 열심히 공부하는 최고경영자(CEO)가'지식 사회'에서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최근 국내의 기업교육을 통한 임원 및 사원교육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50대 그룹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교육훈련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매출액 대비 교육비 비중은 0.78%라고 한다. 미국의 2006년 인적자원개발 투자 우수기업(BEST HRD Award Winners) 42개사의 평균인 0.72%나 포천(Fortune) 500대 글로벌 기업들의 교육 관련 정보 교환 모임인 벤치마킹포럼(BMF: Benchmarking Forum)의 평균인 0.51%보다 높다. 기업들이 임원과 직원들의 능력을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그렇다면 기업의 대표주자요, 최첨단 경영전선에서 진두 지휘할 CEO의 교육현실은 어떠한가? 한국의 임원들에게는 인간관계를 맺을 장(場), 네트워킹을 할 장은 너무나 많으나 공부할 수 있는 마땅한 장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한국의 CEO들은 지속적으로 부담 없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장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다. 이제 CEO들도 제대로 교육하는 곳을 찾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일류기업들의 첨단 경영기법과 사례들을 배우고, 그 사례들을 통해 기업경영의 통찰력을 얻고, 지식을 날마다 새롭게 유입해야 한다. 기업인들에게 유익한 경영지식과 참 가치를 줄 수 있는 곳을 찾아 공부하는 CEO가 되어야 한다.오늘날 리더십은 지식에서 얻는다. 특히, 기업을 살리는 인재를 채용하고 일하게 하고 관리하고 변화시키는 리더십은 비단 경험에서뿐 아니라 인재경영의 지식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결과다. 21세기 기업들의 필수 생존요건인 변화의 동력 또한 지식에서 비롯된다. 아마추어 바둑 5단이 날밤을 새워 혼자서 연습한들 수일 내에 1급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1급을 이기기 위해서는 책을 들거나 고수에게 배워서 지식을 쌓아 공부해야 한다. 호황기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도기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자금유입뿐만 아니라 지식유입이 절실하다. 기업인들이여, 공부하라!/전성청(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 프로필1949년 대구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MBA와 로스쿨을 마치고 맨해튼의 대형 로펌인 리드&프리스트에서 파트너로 일하며 현대, SK, 대우 등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활동을 도왔다. 1991년 귀국해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청와대 정책기획 비서관, MBC-TV <경제매거진> 진행자,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 세종대 부총장 등을 역임. 2003년 1월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 및 전파기관인 세계경영연구원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CEO 및 임원을 포함한 6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CEO들의 평생공부모임인 IGMP 700인 클럽을 발족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베스트셀러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협상 카리스마> 등 6권의 저서를 통해 한국에 글로벌 스탠다드를 전파하는데 앞장서 노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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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1.16 23:02

[금요칼럼] 국민은 푸르고 싱싱한 정부 원한다 - 정종섭

'예술은 사기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이 세상을 하직하며 남기고 간 말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기존의 관념과 현실의 전복을 꾀하는 것이니 만치 기성의 관념에서 보면 사기임에 틀림없다. 눈속임뿐만 아니라 생각의 속임도 있다. 예술품도 이런 사기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원래 정해진 가격이 없다. 그러기에 지난해 수억원대로 묻지마 미술품투기를 하다가 작품값이 반토막 이상으로 떨어졌어도 누구 탓할 일이 못된다.백남준의 말 중에는 더 핵심을 찌른 말이 있다. '일을 하면 욕을 얻어 먹고 일을 하지 않으면 욕을 얻어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일을 해야 한다' 누구 해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에게 욕을 한 사람이 여간 많지 않았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리라. 기존의 성과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떠날 때까지 늘 새로운 실험을 한 백남준까지 이런 말을 할 지경이니,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욕 얻어 먹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되는 것 같다.현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다되어 간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면, 정부가 바뀌고 일할 사람들이 새로 배치되었는데도 과거와 비교하여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과거 정부와 달리 한국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전 정부가 잘못되었다면 현 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누가 장관이고 그 장관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새 정부에서 장관들이 앞장 서서 할 일이 많을 터인데도 장관의 존재감이 국민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현 정부가 출범한 후에 국민을 향하여 한 이야기는 적지 않다. 사회통합에 힘쓰겠다. 국민의 먹거리 안전에 걱정없이 하겠다. 녹색성장을 신성장의 동력으로 하겠다.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겠다. 사회 안전망 확충에 최선을 다하겠다. 대학의 자율화를 실시하겠다. 등등. 지난 1년 동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말들을 쏟아내었다.그런데 정작 녹색성장을 한다면 그 일들이 어느 부처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어떤 계획아래 무슨 일들이 행해지고 있는지, 고령화사회에 직면하여 준비하고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있다면 어느 부처에서 어떤 단계를 거쳐 무슨 일들이 추진되고 있는지,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지금쯤은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할텐데 아직도 국민들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정부가 출범하고 1년이 가까워지는데도 공무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고, 대통령이 답답해한다는 이야기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정권초의 '촛불시위'때문이라고 변명을 한다. 내년에도 촛불시위가 있으면 또 1년을 허송세월하며 보낼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변명으로 둘러댈 내용도 아니다.새로운 국가 과제를 입안하고 힘차게 추진하는 것을 내각이 주도할 것인가 청와대가 주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현 정부 출범전 인수위시절이후 일정한 기간 동안 확인된 것은 내각이 이를 주도할 능력도 의사도 별로 없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대통령제 국가에서 청와대가 큰 그림들을 그리고 일의 추진계획과 점검을 하면서 이끌고 갈 수 밖에 없으며, 그에 필요한 조직도 다시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면 청와대가 이런 일을 하면서 욕을 얻어 먹는 것은 각오를 해야 한다. 청와대가 욕을 얻어 먹기를 두려워 하여 아직까지 내각에 떠맡긴다면 일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어떤 유력인사는 '대통령은 왜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가'라고 직설을 던지기도 했다. 대통령 개인보다도 청와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책이다. 귀 담아 들을 말이다.원래 새 정부가 들어서면 6개월 내에 개혁정책을 제시하고 1년안에 일단락이 지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이를 놓쳤기 때문에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새해에는 청와대와 정부를 전면 개편하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정책을 힘차게 추진해야 한다. 새롭고 활기찬 정부의 운용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등장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국민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한 정부를 보고 싶어 한다.▲정종섭(1957년생, 서울대 법대 교수, 헌법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사법시험 제24회 합격-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역임-건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역임-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부교수/정종섭(서울대 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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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1.02 23:02

[금요칼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 - 박범신

오래 전 나는 장편소설 <불의 나라> <물의 나라>를 연작으로 썼다. 사람들은 우스개소리로 나를 가리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 작품을 쓰던 때는 80년대 초반으로서 정치적인 억압과 아울러 개발이데올로기가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관통하던 시절이었다.아는 바와 같이, '불'은 전투력의 상징이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빠른 성장을 거듭해온 것은 불같은 열정으로 불같이 뜨겁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웠던 우리 나라는 지난 반세기 완전히 '불의 나라'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항문 근처에 불이 붙은 채 '앗뜨거, 앗뜨거!'하면서 일제히 내달리는 형국이 됐다. 출발하는 지점에선 각자 품고 있던 꿈의 빛깔이 달랐을테지만, 뜨겁게 단근질을 당하면서 내달리다보면 애당초 품었던 고유한 꿈은 저리 가라, 그저 남보다 앞서 달리는 자만을 뒤쫓아 허겁지겁 쫓아가는 획일적 서열경쟁만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잡고 만 셈이다.그에 비해 '물'은 생명의 표상이다. 물은 낮은데로 낮은데로 흘러 모든 서열을 무화시켜 마침내 수평을 이루고, 한없이 부드러우며, 포용성이 높다. '불'이 남성성이라 한다면 '물'은 당연지사 여성성이자 모성의 기호이다.지난 반세기, 대를 물려온 가난의 사슬을 끊어낸 원동력이 '불의 정신'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그늘의 대부분은 그로 인해 '물의 정신'이 부족해졌다는데 그 연유가 있다고 본다. '불'이 지나치게 승(勝)하면 '물'이 말라버려 토양이 산성화되고 사막화되는게 당연하다. '불'과 '물'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양면의 통합, 혹은 균형일 터이다.지금의 대통령은 이런 논리의 극명한 텍스트로 삼아 좋을 분이다. 그는 '불의 정신'이 사회의 핵심동력이었던 개발시대에 그 개발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불같이 일하므로써 '30대 회장'이라는 성공신화를 이루어낸 분이다. '불의 정신'을 그분처럼 효과적으로 활용한 이도 드물고, 또한 그분처럼 그것에 큰 혜택을 본 이도 드물다.그런데 정치판으로 옮겨간 후 그분의 성공신화는 '물'로 쓰여지고 있다. 시멘트 감옥에서 해방된 청계천을 보라. 청계천 복원으로 그분은 성공적인 서울시장이 되었고, 그것으로 기반을 쌓은 뒤에 '대운하공약'을 보태어 마침내 대통령으로 도약했다. 애당초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도로를 건설할 때 현대건설의 주역으로 그분이 기여했고 청계천 복원사업 또한 그분이 앞장서 해냈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당신이 덮은 청계천을 당신이 벗겨낸 바, 한 개인의 삶으로 보면 아이러니칼하면서 절묘한 전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야말로 유례없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라고 할 만하다.각설(却說)하고.4대강 정비사업이 식을 줄 알았던 대운하문제를 논쟁의 중심으로 재점화시켰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4대강'이든 '대운하'든 직설법으로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충언하고싶은 것은 물에 대한 사업은 '물'과 상의하고 '물의 영혼'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치수사업이란 수천만년 굽이쳐 흘러온 물줄기를 겨우 강제로 펴놓는 식의 반환경적인 사업이 대세였다.어쨌든, 대통령은 어떤 분인가.인생의 전반기에서 그분은 '불의 아들'로 살았고, 인생의 후반기에서 그분은 '물의 아들'이 되고자한다. 곳간만 쟁여놓는다고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경제를 살리는 일 못지않게 지금 중요한 것이 '물의 정신'이라고 할 때, 그분은 정말, 청계천, 대운하, 4대강이 표상하는 바, '물의 아들'로 변모했는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그분은 어쩌면 '불'같았던 젊은 날로부터 한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걱정이다. '물'을 '불'의 방법으로만 다루면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물'의 조화나 균형이 없다면 세상은 계속 사막화가 진행될 것이다. 이 사막화의 세상에 맑은 '샘물'을 끌어오는 대통령이 되어야 마지막 성공신화를 쓸 수 있다./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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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26 23:02

[금요칼럼] 절망 넘어 희망으로 - 정목일

2008년은 너무 가혹했다. 미국으로부터 발진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금융 태풍은 전 세계를 경제공황과 위기로 내몰았다. 이 태풍의 기공할 공포와 위협은 이제 시작일 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있다. 경보도 없이 들이닥친 경제 태풍은 우리 삶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다. 코앞에 닿은 2009년의 설계와 기대를 깡그리 깨트려버리고, 한해를 어떻게 보내야하는가, 한숨과 걱정 속에 떨게 만든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2008년은 큼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돌발적이고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요동쳤다.금년 시발부터가 시커멓게 변해버린 태안반도의 갯벌과 바다를 씻어내는 일부터 시작됐다. 청정 바다가 시커먼 기름바다로 변해버렸다. 생명의 보고였던 갯벌이 검은 기름으로 뒤덮여 죽음의 바다가 돼버리자 온 국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 하얀 면(綿) 옷가지와 이불깃으로 기름을 닦아내었다. 갯벌과 바다의 검은 기름을 한 장씩의 타올로 얼굴과 마음을 씻어내듯 닦았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바다가 오염되고 생명을 잃은 것에 깊은 반성과 함께 마음을 닦아냈다.국보 1호 숭례문의 화재와 소실은 국민들에게 경악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졌다는 허망함만이 아닌, 민족 자존심과 문화 정체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다. 국민들이 TV로 숭례문 전소 장면을 시청하면서, "이럴 수가!" 가슴을 치면서 통탄하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국보 1호를 잃은 것은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에 대한 무관심의 결여가 가져온 참변이었다. 민족 자존심의 상징물이 어이없게도 국민들이 TV 생중계를 보는 중에 허물어 내리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쇠고기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무려 100일간이나 한국사회를 마비시켰다. 촛불군중이 광화문과 시청 앞을 메우고 경찰과의 시위군중의 대치로 한국의 중심이 무질서와 함성으로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촛불시위는 국회와 행정도 무위로 만들었다. 국회도 없었고, 정치도 실종되었다. 나라의 원로도 보이지 않았고, 타협과 모색도 없었다. 경찰의 물 대포 앞에 유모차가 등장했다. 극과 극의 대치와 충돌이 있을 뿐이었다.2008년은 국민적인 기대와 희망의 팡파르가 울린 가운데 시작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해이여서 큰 기대와 전진을 바랐다. 하지만 1년의 결산은 구겨지고 멍든 시련의 자국들로 채워졌다. 2008년의 대형 사건들은 대비 부족과 안일한 사고 풍조가 빚어낸 재앙이었다.더욱 기막힌 일은 2009년에 대한 공포이다. 금년보다 가혹한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만 겪는 경제위기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난국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내년의 화두요, 당면 과제다. 나라와 민족마다 있는 힘을 다해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한파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이 재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경제고속성장의 탑을 무너뜨리게 된다.지금 우리는 역사와 민족공동체의 역량을 결집하여 난국 극복에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위기와 난국 때마다 민족애와 애국심으로 일치단결을 보여주었던 우리 민족이 아니었던가.극단적인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우리'라는 민족공동체의 횃불 아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제 난국을 이겨 나가야 한다. 기름으로 뒤덮인 태안바다의 갯벌과 바다를 전국 수백만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자신이 입었던 속옷이나 이불 천으로 닦아내듯내일의 희망을 찾아내야 한다. 숭례문을 잃고서 깊은 반성과 각오로써 민족의 영혼과 애국심을 다졌던 것처럼 우리는 한마음이 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가난과 소외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웃을 돕는 일에, 경제 한파를 녹이는 일에, 다함께 마음과 실천의 촛불을 켜들 때다.2009년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역량이 새로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2009년을 희망과 중흥의 새 찬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2008년의 교훈을 거울삼아 민족화합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동방의 해뜨는 나라'로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부과된 시대적 임무이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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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19 23:02

[금요칼럼] 의사, 판사만 꿈꾸는 아이들 - 김용택

중고등학교로 강연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꿈을 물어보게 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자기의 꿈을 말하려 들지 않다가 조금 보채기 시작하면 하나 둘 자기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들의 꿈은 대게 네 가지 정도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의사가 되는 게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판사나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고, 또 하나는 교사가 되는 게 꿈이고, 나머지 하나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무원이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꿈을 이루면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 봅니다. 모두들 하나 같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 한다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옛날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물어 보면 우리들은 하나 같이 모두 조국과 민족을 들먹였지요. 공허한 빈말이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빈말이라도 좋으니, 지금의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단 한명도 그런 '공공의 꿈'을 말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나는 또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물어 봅니다. 모두들 입을 모아 홍익인간이라고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홍익인간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봅니다. 하나 같이 모든 인간에게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주 잘 배운 아이들의 이 정답과 꿈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 속과 겉이 다른지 나는 놀랍니다.▲'직업'이 곧 '꿈'인 학생들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은 서울대지요. 인간들의 위대한 꿈과 이념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왜소한 개인이지요. 쩨쩨하고 이기적인 욕심뿐이지요. 우리나라 학부모님들이나 학생들의 꿈이 하나 같이 의사요 판사요 교사요 공무원이라는 현실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버리지요.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의 꿈이 겨우 의사가 되는 게 꿈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 어머니들의 한결 같은 꿈이 자기 딸이 교사가 되는 게 꿈인지, 생각하면 그 꿈이라는 것이 초라하기만 합니다.얼마 전에 하버드와 예일대와 엠아티 대학을 다녀왔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한국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아이비리그'에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큰 문제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하나 같이 하버드에 들어오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인생의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이 더디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답이 딱 하나 밖에 없는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학생들이 하나의 정답을 찾느라 헤맨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토론에 약하고 에세이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토론과 에세이는 늘 새로운 사고를 원하는 다양한 창조정신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창조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학습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것이지요.▲ 창조적인 삶을 찾아야 할 시기꿈이 의사요 교사요 판사가 나쁘다는 게 아니지요. 또 개인의 꿈을 누가 간섭할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꿈이어서 대통령이 되면 무엇 합니까. 정말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국민들에 환호를 받는 좋은 대통령이어야지요. 대통령이 꿈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인생의 한 과정일라는 말이지요. 의사가 꿈이 아니라 훌륭한 의사가 꿈이어야지요. 교사가 꿈이 아니라 정말 위대한 교육자가 꿈이어야지요. 학생들의 꿈이 일자리에만 매달리는 그런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 모두를 불쌍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점수를 가지고 이리저리 뛸 입시 철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나중에 잘하게 되고 사회에서 자기의 몫을 찾을 것입니다. 직업인이 아닌 창조적인 삶을 살 길을 지금 찾을 때입니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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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12 23:02

[금요칼럼] 원자력으로 기후변화를 막자 - 장인순

우주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 무엇일까? 바로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물질과 에너지가 같으며, 서로 변환된다'는 상대성 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하고 40년 만에 실증된 바로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핵융합, 핵분열)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이 원리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핵반응에 의해서 에너지는 물론 원소와 분자를 생성하고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흙, 곧 지구를 탄생 시켰다.45억년이라는 긴 지구의 역사 동안에 자연은 핵반응에서 생긴 에너지 곧 햇빛을 화석연료 속에 화학에너지 형태로 저장하여 땅속 깊숙이 묻어 두었다. 약 200년 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석탄이라는 대량에너지를 이용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화석에너지의 사용이 급증하였으며, 앞으로 100년 이내에 고갈될 것으로 전망될 뿐만 아니라, 이의 남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효과로 지구상의 생명체의 생존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전 세계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화석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화석에너지의 남용은 인류의 미래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기에, 대량의 저탄소 청정에너지 개발은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 그 해답은 바로 우주의 탄생과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지배하는 핵반응이라는 원자력 기술이다.원자력의 에너지밀도는 화석에너지의 100만배 이상으로서,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자원 의존형이 아닌) 두뇌 의존형의 청정에너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두뇌 바로 과학기술이 만든 에너지이다. 그 뿐인가. 가장 값싸게 해수를 담수화할 수 있는 해수담수화 원자로, 차세대 청정에너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수소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수소생산원자로 등 인류가 필요한 에너지와 마실 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이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을 이용해서 인류의 에너지와 물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겠는가!원자력기술은 고온, 고압, 내 방사선, 내진 등 극한 상황을 아우르는 최첨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종합적인 복합기술로서 모든 분야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이끄는 모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산업은 여러 첨단 분야에서 국내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불과 4반세기 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원자력 발전소 이용률이 단연 세계1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 아니라, 20기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으로 국내전기의 40%공급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양질의 가장 값싼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조국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고 온실가스를 규제하기 시작하면 우리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원자력도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과학 기술인에게는 원자력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기술분야에서 안전성이 최우선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과학기술과 안전성은 언제나 하나이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용률 1위라는 것은 바로 원자로의 안전성과 관련된 원자로 유지보수실력이 세계 최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안전성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원자력 발전 선진국으로 진입시킨 이 땅의 원자력기술인에게 맡기고, 원자력 계에 따뜻한 이해와 격려를 부탁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후손들이 에너지가 풍부한 사회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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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05 23:02

[금요칼럼] '남의 떡'에 대한 정보를 버려야 - 박범신

남쪽의 항구도시에 내려갔다가 이틀 사이 세 개의 도시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속 철도가 생겨서 서울에서 A시까지 이제 명실상부 일일생활권으로 묶였다."고속철도로서 이렇게 가까워졌으니, 경제도 좀 나아졌겠네요?" 내가 말했고, A시에 사는 상대편은 대뜸 고개를 저었다. "나아진 건 서울뿐이지요. 고속철도 때문에 A시 사람들이 이제 쇼핑을 서울로 하러 가니까요. 우리 A시 경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빠른 내리막길입니다. 게다가 수도권 규제까지 풀린다니, 정말 큰일이에요."나는 고속철도를 한 시간 정도 타고 D시로 올라왔다."요즘 B시 경제는 어떻습니까?" 내가 또 물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단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A시에서 올라온 걸 알고서 "그래도 A시가 우리보다 낫지요. 우린 아예 결딴나게 생겼습니다. 정부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도권 사람들만 국민이라는 건지 원." 하고 말했다. 내가 다음 날 C시로 올라간다고 하자 "C시는 행정도시다 뭐다 해서 우리보다 경기가 훨씬 나을 겁니다."라고 그는 또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그러나 C시 사람들의 대답은 딴판이었다."아이고, 우리는 그놈의 행정도시 때문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왜요?" "행정도시 해줬다고 생색내며, 정부에선 그 외엔 아무런 배려도 없었거든요. 차라리 행정도시 그거,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 솔직히 말해서 A시나 B시야 중앙정부 덕본 게 훨씬 많지요. 우리 C시는 빛 좋은 개살구 격인 행정도시 때문에 오히려 원망이 많습니다."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수도권의 한 친구는 A시와 B시와 C시의 불만을 한 마디로 냉정히 쓸어덮었다. "수도권이 살아야 지방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도시다 행정복합도시다 하면서, 그동안 수도권을 묶어 놓고 지방에 온갖 재정지원을 해온 것은 명백한 정책적 오류라고 그는 지적했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사는 수도권 규제를 "확 풀어놔야" 그 혜택이 지방에 골고루 미친다는 논리였다.깊이있는 논의는 물론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의 발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은 나 또는 우리보다 너 또는 너희의 '떡'이 크다는 것이었다. 개발의 연대를 숨가쁘게 지나오면서 우리도 모르게 키워온 이 '남의 떡'에 대한 과대 포장의 습관과 감수성은 이제 우리 모두의 집단 무의식 속에 돌이킬수 없을 만큼 너무도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남의 떡이 크다'는 정보로 가득차 있을 때 만나는 심사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에 따른 분노일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는 너와 나를 위험하게 가르고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도덕성을 무화無化시킬 뿐 아니라 설령, 실질적으로 살림살이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나아진 살림살이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요컨대 행복과 스스로 거리를 벌리는 결과가 자초하고 마는 것이다.'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지점'.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남의 큰 떡'에 대한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환경속에 놓여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정상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의 떡'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남의 정상에 대한 정보일 뿐이므로 설령 '남의 떡'을 내가 그대로 가진다고 해도, 내게 그것이 '만족하는 지점'은 결코 될 수 없다. 자신이 인생에서 참으로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 자신만의 정상을 꿈꾸기 때문에 '남의 떡'에 그다지 흔들리지 않으며, '남의 떡'에 대한 갖가지 정보 때문에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당장 비를 피할 집도 있고, 크든 작든 테레비 냉장고도 있고, 어쩌면 자가용도 갖고 있는 당신,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 논리가 세뇌시켜준 서열주의에 따른 획일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어쩌면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를, '만족하는 지점' 곧 행복을 찾아 내가 품고 갖는 일이다. '남의 떡'을 쳐다보는데 바빠서 곁에 둔 '행복'을 혹시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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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1.28 23:02

[금요칼럼] 아들내외로부터 받은 감사장 - 정목일

근래 아들내외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작은 액자에 넣은 것인데, 아들내외가 손녀를 안고 찍은 사진도 들어 있었다.'수향이가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항상 저희를 먼저생각하시고 큰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중략) 수향이가 밝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우리 가족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두 분께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감사장을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이런 감사장은 처음이어서 얼떨떨하기도 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데, 나는 부모님께 한번도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고 말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며느리가 손녀를 출산하기 전부터 우리 내외는 큰 고민에 빠졌다. 맞벌이를 하는 아들내외가 출산하면 누가 양육할 것인가. 아내 역시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퇴직하고 손녀를 양육하는 일을 맡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손녀의 양육은 외가에서 맡기로 결정이 났다. 아들내외에게 아이 셋을 낳아달라고 부탁하던 나는 머쓱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책도 없이 필요성만 강요한 셈이다.젊은 사람들에게 출산을 권유하며 "이것이 애국하는 일이다."라고 하면, "우리나라 환경으로선 아이를 많이 가질 수 없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국민연금을 낸 것만큼 받지 못하는 원인은 저(低) 출산 다(多) 고령자 현상에 있다. 저 출산문제는 국가경제와 민족번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나라는 차츰 노인국이 돼가고 있다.유엔인구기금(UNFPA)이 발표한 전 세계 156개국을 분석한 '2008년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인구 감소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는 평균 자녀 수(평균출산율)가 1.20명으로 홍콩(0.96명)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낮다.한국에 사는 20대 후반과 30대 여성들은 육아해결을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로 꼽는다. 저 출산과 고령사회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국가발전과 민족장래는 어둠의 터널로 빠져들고 말 것이 분명하다. 아무 걱정 없이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장려책이 나와야하고,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별로 세 자녀를 출산할 경우에 장려금과 아파트청약에 우선순위를 준다는 정도로는 실효성이 없다. 이제 자녀출산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아선 안 된다.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국민의 자녀라는 개념에서 출산환경 개선과 제도 개선을 단행해야한다. 임신에서부터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는 복지정책을 펴야 한다.국가재정 문제의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저 출산문제를 가정에만 맡겨두는 태도는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한 인식이다. 한 아이의 출산으로 부모, 친가, 외가의 어른 6명이 고민에 빠지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출산기피 현상은 지속될 것이고, 민족의 앞날은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손녀 첫돌을 맞아 아들내외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외가에서 양육하기 때문에 간혹 만나는 날이면, 얼굴이 낯설어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다. 그러나 이건 다행한 경우에 속한다. 손자가 외국에 있어서 일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 노인들도 많고, 결혼시킨 자녀가 오래 동안 손자를 낳지 않아 안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손자와 간신히 안부를 주고받지만, 노인들은 혈연의 정을 아쉬워한다.현대의 핵가족제도는 조손간(祖孫間)의 단절을 가져왔고 노인들에게 애정결핍을 안겨주고 있다. 조손간의 따뜻한 혈연관계의 복원은 가정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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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중
  • 2008.11.21 23:02

[금요칼럼] 정직성이 생명이다 - 장인순

청소년.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싱싱하고 정의에 불타며 무엇보다도 정직한 이름이 아닌가?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온 한국 청소년의 반부패 인식지수가 10점 만점에 6.1이라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청소년 18%가 "10억을 번다면 10년을 감옥에 가도 좋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성인들의 반부패지수는 몇 점이나 될까, 참으로 참담하고 두려울 뿐이다. 아침이 조용한 나라에서 백의민족으로 살아온 은근과 끈기의 후손들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선현들의 말씀은 세살 먹은 아이도 안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부정부패는 못 배운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는 자 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권력이 없는 자 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통사람 보다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저지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이 참담한 현실을 치유할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평생동안 선진국, 후진국 등 40여 개 국을 다니면서 도대체 선진국과 후진국은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선진국을 만드는 요인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나라 국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고유한 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을 배우면서 느낀 점은, 그토록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유사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선진국은 인재를 중요시하는 창의적 교육정신을 바탕에 둔 수월성 교육을 시키는 훌륭한 교육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진국 국민은 정직하고, 책을 많이 읽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다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선진국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은 국민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정직성은 인간관계와 사회에 믿음과 신뢰를 주는 묘약으로서 인간 모두가 추구하는 자유의 원천이며, 이 자유는 곧 인간조건의 신비와 매듭을 푸는 열쇠로서 바로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독서력은 그 국가의 성장 동력이며 동시에 정직성을 회복하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한다.또한 여성인력을 많이 활용하는 것도 선진국들이다. 공직사회에 여성인력이 많으면 보다 깨끗해질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거의 모든 부정부패는 국가제도를 만들고 관할하는, 힘 있는 공무원과 그리고 권력있는 자들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다.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어 국가의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수호해야할 국회의원들이 여야 할 것 없이 동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정행위를 눈감아주고 서로 보호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범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고 귀를 열어 놓으라고 충고하고 싶다.입시준비를 위한 책 이외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인성교육과는 거리가 먼 이 땅의 청소년들은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보면서 자란 진정한 피해자가 아닌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데, 청소년들의 가슴에 드리우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방법은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부모라는 윗물이 맑으면 아이들은 정직할 수밖에 없다. '땀의 미학'을 알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땀 흘리고 정직하게 사는 부모의 삶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생명력이 있는 교과서이다.우리는 분명 균형감각을 상실한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자연과학이 인문사회과학과 함께 어우러진 교육을 통해서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느림의 미학'을 위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우리국민 모두의 소망이 있다면 바로 정직한 정부, 정직한 공무원이다. 이와 함께 힘 있는 자, 교육자 그리고 공정한 언론과 함께 믿음과 신뢰가 넘치고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싶은 것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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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1.07 23:02

[금요칼럼] 산악인들이 고봉에 오르는 힘 - 박범신

산악인들은 왜 명줄을 걸고 산에 오를까.특히 7천,8천이 넘는 고봉들은 직벽에 가까운 벼랑이 많은데다가 만년빙하가 쌓여 있기 때문에, 8천 미터 이상되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곳을 일찍이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산소가 모자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빙벽은 물론 위험한 크레바스가 거미줄같이 깔려 있으며, 극한의 추위와 눈사태 등의 위험이 상존하니 그야말로 죽음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수많은 산악인들이 일상의 희생을 무릅쓴 채 돈을 모으고 시간을 모아서 그 '죽음의 지대'에 기꺼이 도전하고 있다.왜 그들은 산에 오를까.돈이나 어떤 명리를 위해서?아니면 좋아서? 미쳐서?산악인들이 고산에 올라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극히 소수가 누리는 부가가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자기 명줄을 걸고 정상에 올라도 현실적인 어떤 보람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등반가는 이르기를, 고산등반을 하려면 첫째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둘째 가족과 직장으로서 버림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셋째 등반을 끝내고 돌아와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어야 비로소 프로등반가라 할 수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참으로 비장한 출정사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좋아서 그들은 오르는 것일까.단순히 좋아서, 라고만 말하고 말면, 위의 비장한 출정사에 비해 그 낱말이 너무 범박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또 미쳐서, 라고 말하면 표현의 천박함 때문에 산악인들이 혹시 화를 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저렇게 따져 보면, 산악인들의 고산등반엔 확실히 어떤 합리적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쾌락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야성적인 등반가였던 쿠쿠츠카는 고산 등반에서의 '몇일'은 일상에서의 '몇년' 혹은 '몇십년'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그 어떤, 내적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내적가치의 전제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반대급부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싶은 인간 본연의 욕구와 맞닿아 있다.일상의 삶은 어떠한가.우리는 매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하지만 빙벽에 들러붙은 산악인은 다르다.그는 빙벽에 붙는 순간 습관과 권태로울 뿐인 안락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는 완벽한 단독자이고 모든 선택권을 쥔 절대적인 자유인이며 자신과 빙벽과의 관계만으로 승부하는 실존적 존재가 된다. 한순간 한순간이 놀랍게 생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감각과 야성과 이성적 판단이 한통속으로 완벽하게 융합하는 전에 없는 경험 속으로 빠진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능동성을 발휘해 그를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과감하게 분쇄해 나간다. 허위의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고, 엉뚱한 유혹에 빠져 길을 잃어서도 안되고, 타인의 어떤 조력도 구할 수 없다. 그에게 욕망과 모랄이 있다면 철저히 자신의 목숨값이 기준이다. 그러니 이성에 눌려있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를 것이고, 합리성과 구조에 눌려 있던 야성이 빅뱅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쿠쿠츠카가 말한 바, 고산에서의 몇일이 일상에서의 몇십년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그렇다면, 산 아래에서 사소한 안락과 기득권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만을 나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습관적 일상의 눈으로 볼 때, 아무런 명리에의 소득도 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그들은 '미쳤다'.안락은 좋은 것이지만 권태롭다.위험한 시간은 우리에게 단독자로서의 강한 의지를 불러오고 집중력과 능동성을 드높이며 최종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킨다. 티베트에선 이런 위험한 순간을 '거꾸로 매달린 틈'과 같다 하여 '바르도'라고 부른다. 어떤 것은 끝나고 어떤 것은 시작되는, 또 어떤 것은 추락하고 어떤 것은 상승하는 과도기의 시간이다.요즘 경제가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한다.야수와 같이 갈 용기가 있다면 불리한 조건들을 기회의 병풍으로 삼을 수도 있다. 길게 보면 영원한 추락은 없다. 빙벽에 들러붙어 제 몸의 이성과 감성과 야성을 완전히 융합해 마침내 한 봉우리를 넘어서고마는 산악인들의 의지를 배울 때가 아닌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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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31 23:02

[금요칼럼] 이순신 장군의 붓 - 정목일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인물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한 때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 있었다.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좋은 정치를 편 대왕으로,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민족의 태양' '성웅'으로 불려진다. 이순신장군상에는 어김없이 긴 칼을 잡고 있다.경상남도는 역점사업으로 '이순신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순신 장군을 세계화하고 남해안 시대 문화관광을 선도하기 위해서 1천500여 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알리기, 거북선 건조 등 세계화작업과 이충무공 정신선양, 거북선 탐사 등 19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라남도에서도 함께 추진하고, 일본에서도 참여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이순신 프로젝트 중 흥미로운 것은 거북선 찾기이다. 경상남도에서 이번에 거북선을 찾는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거북선이 수장된 된 곳으로 예측되는 거제 칠천량 해저를 샅샅이 뒤져 거북선 잔해를 찾아내자는 것이다.이순신 장군은 광화문 대로에 긴 칼을 든 구국의 영웅으로 서있다. 이순신의 손은 칼만을 잡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한 손은 붓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해군의 사령관으로서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수행해 23전 전승으로 조선을 구하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찬란한 기록을 남겼다.이순신은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하였지만, 한 손은 붓을 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으로서 어느 누구보다 휴식과 수면이 필요했다. 그의 건강은 곧 국가존망과 결부돼 있었다. 밤이면 보초 이외에 모든 군졸들이 취침해 내일의 전투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장군만은 잠들 수가 없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와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군졸들이 잠에 빠진 밤중에 장군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야 했다. 장군은 정신의 피로 먹을 갈았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붓을 들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전투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느꼈다.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망각의 바이러스를 풀어 사실과 진실을 퇴색시키고 소멸시켜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임진왜란은 조선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했고, 전쟁 중에 가장 고단하고 고뇌하고 잠 못 들어 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그는 7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잠 들 수 없었다. 그의 손엔 칼과 함께 붓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가 기록되지 않아 훗날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한낱 전설이 되고 설화가 되어 떠도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과장되고 와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장군이 잠들지 못하고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기록해 놓은 '난중일기'는 그의 일생 전부이자 생명이나 다름없었다.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국난을 수습한 인물을 가려 공신을 책봉했다. 일등공신에 오른 인물은 육군에 권율 장군, 해군에 이순신, 원균 장군이었다. 이 세 사람은 당시 무무백관들에 의해 일등공신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이순신과 원균의 평가는 너무 대조적이다. 이순신은 민족의 태양, 성웅, 불멸이라는 최상의 상징성으로 추앙되지만, 원균의 경우는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순신과 원균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통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고, 원균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점이 큰 차이를 만든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1592년(선조 25)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한 달 전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일기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으므로 본래는 이름이 없었으나,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찾기는 해저 속에 묻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금속은 시간에 의해 녹슬고 형체도 없이 해체되고 소멸되는 것이어서 그 잔해를 건져낼 수 있을까 관심이 쏠린다. 이순신장군이 남긴 '난중일기' (국보 제 7호)는 영원 속에 그대로 남아 그를 역사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위대성은 구국의 영웅에 그치지 않고, 그가 치룬 전쟁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와 진실을 증언하고자 한 점이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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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24 23:02

[금요칼럼] 생각대로 쓰다 - 김용택

미국산 쇠고기 파동, 유가의 급등과 미국 발 금융위기, 그리고 중국산 분유 사태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랜 가뭄과 늦더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러한 기후변화의 낌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바꾸려 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위기가 우리 살림살이의 위기가 될 줄을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고, 어마 어마하게 잘 사는 나라의 은행이 망할 지를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런 사태에 대응하는 나라 일군들의 긴장된 얼굴들을 화면으로 보며 우린 그냥 덜컥덜컥 겁이 날 뿐이었습니다. 넥타이 풀고 회의하는 그들의 입과 얼굴을 살피는 언론들도 모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숨이 차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아우성만 칠 뿐 이 명백한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그 어떤 현실적 타개책도 장기적 계획도 대안도 없이 슬그머니 위기의 꼬리가 사라지려고 합니다.▲일상 속에 다가온 위기위기는 문제의 핵심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지요. 이런 위기를 맞아 모두들 입을 모아 어렵다고 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거리에 차량의 물결은 넘치고 주말이면 차들이 고속도로와 산과 들을 매웁니다. 식당과 술집은 사람들로 넘치고, 거액을 쏟아 부은 지자체들의 내용 없는 축제의 에드벌룬은 이 고을 저 고을의 가문 하늘에 둥둥 뜬, 뜬 구름을 잡습니다. 위기라는 말이 뻥 같지요. 혹 이 위기의 국면만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에라, 모르겠다. 그러려면 그러라는 똥 뱃장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위기는 또 옵니다. 다시 올 위기의 파고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구체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혼돈과 공포의 파고는 일순간에 우리들의 일상을 덮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이번 금융위기는 말 그대로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글로벌하게 실감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글로벌하다 해도 문제의 단초는 우리에게 있고, 그 해결 방법의 실마리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을 제일로 치는 가치와 덕목을 재고할 때가 왔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진정한 자기 혁신이 필요 합니다. 글로벌이란 무엇입니까. 지식과 자본의 세계적인 공유를 의미합니다. 지식은 세계화 되고 다국적 시장에 맡긴 자본은 큰 물방울로 쉽게 빨려갑니다. 자본과 지식의 공유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사고를 요구합니다. 큰 문제는 교육의 틀을 바꾸는 일입니다. 시험만 잘 보는, 나 홀로 똑똑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이미 그 생명력을 다 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는 풍요로운 인간정신에서 오는 창조적인 인간이 요구 됩니다. 더불어 자본에 기댄 삶의 가치척도는 폐기되고 자연과 생태와 순환에, 그리고 땅에 대한 투자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을 끝없이 파괴합니다. 지속발전 가능한 삶과 자연! 친화적인 가치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가까이 다가갈 때입니다.▲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 파괴새로운 세기의 날은 밝은지 오래 되었는데 우리는 지금 눈을 감은 채 몽당 빗자루를 붙잡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구시대적인 낡은 가치에 기댄 모든 장치는 새롭게 수리되거나 폐기 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독점은 한군데가 무너지면 다 함께 망한다는 뜻입니다. 왜 아직도 우리는 새로운 가치 창출에 이리 인색합니까. 왜 아직도 우리는 낡은 이념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씁니까. 사회의 모든 독점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음모지요. 경제의 민주화는 인류 생존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우리 인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시대를 거쳐 기후변화에 대처해야하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다다랐습니다. 한정된 지구 자원 고갈은 인류의 미래를 약속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괴테의 시입니다. 지금 음미할 만한 내용입니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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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7 23:02

[금요칼럼] 이땅의 교육은 어디로 - 장인순

지구상에서 이 땅의 학생과 학부형 같이 힘든 삶을 사는 나라가 또 있을까!세계에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고, 정부 예산 10%를 초과(1년간 20조원)하는 세계 제일의 사교육비를 쓰는 나라에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탈감 그리고 무기력뿐이라니. 진정 교육의 왕도는 없는 것인지?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크게는 자연의 질서로 가르치는 것, 지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키우는 건, 작게는 교육 그 자체는 머리에 처넣은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사고력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초, 중, 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고학력이 될 수록 질문이 적을 뿐 아니라 학교수업이 점점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70%이상이 4년 동안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다면 이런 교육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고학력으로 갈수록 입시에 매달려 암기 위주의 반복적인 학습과, 문제를 이해하지(why)않고 푸는 방법(how)만을 강요하는 일률적인 강의로 학생들이 흥미를 잃은 재미없는 교실로 전략되었기 때문이다.▲ 질문과 토론의 교실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 보낼 때 하는 말의 거의 전부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이다. 한편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 가서 질문을 많이 하라"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엄마가 아이들의 입술에 달콤한 꿀을 발라주고 "배움이란 이렇게 달콤한 거야"라고 가르친다. 지극히 적은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모든 학문분야에서 세계정상에 우뚝 서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에서 어떻게(how)가 아니고 왜(why)라고 하는 접근 방법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하게 되고 거기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동시에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 사고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교육은 일률적으로 머리에 처넣는데만 급급한 반면 유대인들은 머리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교실이 토론과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곳으로 학생들이 가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진정한 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과 용기 있는 교육자란우리말에 용장 밑에는 졸장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훌륭한 교육자 밑에는 훌륭한 학생들이 있다는 뜻이다. 훌륭하고 경쟁력 있는 교육자 밑에는 학생들이 변화 할 수밖에 없으며 반드시 경쟁력 있는 학생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 있는 교육자의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이루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고 열을 알아서 하나로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한두 개를 알고 하나를 가르치면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피곤할 수밖에 없다. 많이 알수록 지도하기 쉽고 배우는 학생도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은 예술 (Teaching is art)이라고 한다. 교육자의 가르치는 행위는 예술가가 새로운 자기 작품에 영혼을 불어 넣은 것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아는 용기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가르치는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서 자신의 장단점을 깨달음으로써 좋은 점을 더 좋게,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어 자신을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자의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교육자가 교원평가제에 기꺼이 참여하며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동료들의 평가가 어떤 것인지 자기를 돌아보고 변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과 교육자와 학부형이 하나 되는 것으로 즐거운 교실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력이 있는 교육자이다.▲ 마르지 않은 교육의 샘이 시대를 시간이 뜨거운 시대 바로 무한경쟁시대이며, 자원전쟁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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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0 23:02

[금요칼럼] 우리가 잊은 가난 - 박범신

지난 해, 멀고 먼 터키에서 독자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베이한 도안즈. 터키의 중부도시 카르세르에 있는 에르지에스 대학 한국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번역원이 주최한 한국문학 독후감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고 그 부상으로 변역원이 초청해 방한의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에다가 눈이 커서 더욱 영민해 뵈는 이 터키처녀가 선택한 텍스트는 나의 초기 작품 '우리들의 장례식'. 단편 '우리들의 장례식'을 쓴 것은 아마 서른 살 무렵, 197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서 일주일에 서른 시간 넘게 수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밤에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퇴근하고 대학원에 갈 때는 매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면 늘 졸기 바빴다. 그날도 졸다가 제때 내리지를 못하고 그만 대학 앞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졸다 깨고 보니, 아주 낯선 곳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버스가 부르릉 하며 사라지고나자 갑자기 적막해졌고, 그 적막 속으로 개천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낮은 지붕과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초겨울이라서 개천은 벌써 얼어있었고, 루핑으로 된 판잣집 지붕들 위로 고압선이 도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히끗히끗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이 장위동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나는 무엇에 홀린 듯, 대학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장위동 달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고압선 전신주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니까 고압선 철제 전신주 사이로 뚫려진 길이었다. 어둑신한 길을 따라 오십여 미터를 들어갔을까. 판잣집 추녀 밑에 싸구려 나무관 하나가 기대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나무관의 아랫도리는 가린 것이 없어 골목길에서 그대로 진눈개비를 맞고 있었다.삐죽이 열린 좁은 재래식 부엌에서 늙수구레한 부부가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노모가 죽었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서 조문객은 물론 이웃사람 하나도 와있지 않았다. "눈을 맞는데, 왜 관을 방에 들여놓지 않나요?" 나는 그만 묻지 말아야할 것을 묻고 말았다. 남자가 말없이 방문을 열고 어둡고 비좁은 방안을 보여주었다. 노모의 시신이 아랫목에 뉘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방이 너무 작아서 기성품 나무관을 도저히 방 안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나는 다음날 대학원 수업에 가지 않았다. 하루 여섯 시간이 넘는 수업에 지칠 대로 지쳤으나 나는 퇴근해서 곧장 내 셋방에 돌아와 앉아 '분노'로 밤새워 소설을 썼다. 발표할 곳도 없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70년대의 혹독한 가난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한 분노로 내 자신이 이미 '화염병'이 되었으므로, 난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우리들이 장례식'을 썼다. 노모가 죽었으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한밤중 달동네 복판을 가르고 지나가는 개천 바닥에 노모를 남몰래 묻는다는 이야기였다."이 작품을 쓸 땐 당신처럼 먼 데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는 독자를 만날 날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어요. 소설 속 이야기는 당시로선 단순한 픽션이 아니었거든요"나는 터키에서 온 처녀에게 말했다.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쓴 우리나라의 '70년대 풍경'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간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지금의 젊은 제자들보다 멀고 먼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날아온 처녀와 말이 더 잘 통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내 젊은 제자들과 내 '새깽이'들이 다 잊어버린, 이해하지 못하는, 그렇지만 불과 30여년밖에 안되는 그 역사를 터키의 처녀로부터 비로소 이해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당신은 지금 어떤가?세상은 이제 남의 가난이나 불행에 대해선 아무도 분노하지 않을 만큼 발전했다. 그렇지만 때로 나는 묻는다. '발전'한 것이 맞기는 맞는가. 고통 받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꿈꾸는 것은 어쩌면 '꿈'이 아니라 천박한 '욕망'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허겁지겁 욕망을 쫓다 아우성치며 달려가다가도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애당초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가 가난이 오히려 선(善)이라고 말했던 세월을 한번 쯤 굽어볼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게 아직도 터무니없이 적을 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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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03 23:02

[금요칼럼] 나비의 삶 - 정목일

이 세상에서 나비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을 듯하다. 몸통보다 몇 배가 큰 날개로 춤추듯이 나르는 모습만으로 환상과 행복을 느낀다. 몸 자체가 예술품이다. 형형색색 무늬와 현란한 색채미학, 두 장의 날개는 대칭미의 완성품이다.나비의 삶은 우아하며 평화롭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투지도 않는다. 꽃을 사랑하면서 희망과 미래를 준다. 꽃에게 꿀을 얻는 대신 식물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와 씨앗으로 번성과 풍요를 갖게 만든다.나비는 언제나 무도복 차림새이고 걸음걸이는 곧 춤이다. 꽃에 다가갈 때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벌과는 달리, 곡선을 그으며 다가간다. 다짜고짜로 꽃 속으로 파고드는 벌과는 다르다. 소리 없이 다가가 꽃에 눈 맞추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다. 오래도록 밀어를 속삭인다.나비는 꽃의 빛깔을 가장 잘 안다. 꽃의 향기를 가장 잘 맡는다. 나비야말로 빛깔과 향기를 알아내는 기막힌 감별사이다. 신이 보낸 미의 천사, 평화와 사랑을 위한 사자(使者)가 아닌지 모른다. 인간은 나비의 황홀한 빛깔과 무늬를 갖고 싶어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삶을 갖길 원한다.꽃이 어여쁘다고 한들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무료와 슬픔이 느껴진다. 꽃에 나비가 앉는 모습이야말로 평화와 행복의 표정이다. 유토피아의 구성 요소는 숲과 물, 여기에 꽃과 나비가 있어야 한다. 꽃과 나비는 사랑, 행복, 번영을 상징한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생명체의 숙명이며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비만은 살상을 하거나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한다.꽃가루받이를 통해 식물의 번식을 도모함으로써 생명체 모두에게 이로움을 안겨준다. 가장 연약하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나비는 모든 종(種)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타고 난 예술가이다. 나비가 꽃에서 꿀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일만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삶과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고 있다.꽃은 열매와 씨를 맺고, 열매와 씨는 다시 대지에 생명을 틔운다. 속씨식물은 동물을 유혹해 자기 씨를 멀리 퍼트리게 하려고 당분과 단백질을 생산해낸다. 그 덕에 세상의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온혈동물인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다.꽃이 없었다면 인간도 나타날 수 없었다. 인간은 꽃의 종류를 엄청나게 늘리고 꽃씨를 세상 곳곳으로 퍼트렸다. 그 대가로 과일과 씨앗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감각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꽃과 나비의 사랑과 공생이 있었기 때문이다.기상학에서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날개 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기상학이 아닌 생태학에서도 나비효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꽃을 찾는 나비의 날개 짓은 부드럽고 미약하지만, 인류와 전 생명체의 삶과도 유기적인 관계가 있으며 도움을 준다.나비의 모습과 삶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하면 유익한 나비 같은 삶을 가질 수 있을까. 나비처럼 모든 관계와 삶에 이로움과 축복을 주는 효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비처럼 경쟁, 대립, 갈등, 시기, 모함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삶을 가질 수 있을까.가끔 한 사람의 좋은 삶, 작은 선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켜 큰 힘이 되는 것을 본다. 말없이 쓰레기를 줍는 사람, 자신의 처지가 딱한 데도 이웃을 돕는 사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권력자는 권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부자는 빈자를 위해,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위해,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과 장애자를 위해, 스스로 베풀고 봉사한다면 '나비의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선행 하나씩으로 사랑의 등불을 켜면. 서로서로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는 나비의 삶을 취할 수 있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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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26 23:02

[금요칼럼] 이 가을에 시 한편 - 김용택

날씨가 가물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은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높고 눈이 부시게 푸르기만 합니다. 그 하늘아래 나무와 풀들은 있는 힘을 다해 햇살과 바람을 빨아들이며 익어 갑니다. 강변이나 논두렁이나 밭가에 구절초 꽃이며 쑥부쟁이며 고마리 꽃이며 물봉선화 꽃들이 만발 했습니다. 강아지풀도 억새도 갈대도 바라구 풀도 수크렁도 다 이삭을 피워냅니다. 밤송이들이 쩍쩍 벌어지고, 감은 붉은 얼굴을 세상에 내밉니다. 야산에 가보면 작은 오솔길에 밤과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발아래 툭툭 떨어집니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차창으로 언 뜻 눈길을 주면 거기에 가을꽃들이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오! 저 꽃들 좀 봐라! 누가 가꾸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도, 나와 언제 그러마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마치 지상의 모든 것들과의 굳은 약속인양 그렇게 눈이 시리게 피어납니다. 낮은 산자락 작은 마을 어느 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키 발을 딛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난간에다가 호박쪼가리를 한 개 한 개 널고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저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고향 같은 굳은 약속입니다.시인은 그런 사람일 터입니다. 저기 저렇게 꽃이 피어 있다고, 저기 저렇게 산과 들에 곡식들이 익어간다고, 저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있다고, 저기 저렇게 노을이 붉게 사위어 간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일터입니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대하고 찬란하고 높은 지위와 권력과 돈을 쥐고 세상을 흔드는 자들에게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1톤 트럭에 잡화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 가장의 어깨에 내리는 어머니같은 눈길일 것입니다.발아래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을 사랑해야 할 가을입니다. 정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캄캄한 절망이, 때로 그런 삶의 난간 앞에 서서 우린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절망 속에 서서 고개를 한번 돌려 보면 거기 마른 풀잎이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의 시든 풀잎에 바람이 되는 사람이 또한 시인일 터입니다. 이 가을에는 여러분들이 다 시인입니다.가을바람이 부내요. 시 한편 실어 보내드립니다.'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는/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충분한 음식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모든 사람들이/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가능함을/나는 믿습니다.//우리들이/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모든 이들이/똑같이 소중함을/나는 믿습니다.//선한 기독교도와/선한 이슬람교도가/선한 유대교도와/선한 무신론자들이 있음을/그리고 내가 신뢰하는/모든 이들의 마음에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만일 믿지 않는다면/어떻게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요./날마다/목마름에 슬피 우는 아이들이 있음을/그리고 날마다/싸움을 벌이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음을/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어린아이들은 피부색과 상관없이/서로 어울려 뛰어놀고 있음을/나는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그리고 부디 이와 같은/희망을 간직한 이들? ?많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며/동시에 내가 믿는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벤자민 스바냐의 시-아름다운 소망-전문.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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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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