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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인터넷 저작권과 어린 네티즌 - 한승헌

전남 담양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매어 숨진 한 소년을 애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열여섯 살 난 그 학생의 죽음이 하필이면 저작권법 위반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는 뉴스는 저작권학도인 나를 매우 침통하게 만들었다. 마침 저작권문화학교 강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마음이 착잡했다. 그 고교생은 인터넷에서 한 편의 소설을 내려 받은 일이 있는데, 경찰에서 저작권법 위반으로 출석요구서가 날아오자 고민 끝에 자살이라는 극한수단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 세상은 정보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로 엄청난 콘텐츠가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 중에는 사진, 영상, 영화, 소설 등 저작물이 홍수를 이루어 파일 공유 사이트나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네티즌들이 얼마든지 퍼 올리거나 내려 받아 듣고 볼 수 있다.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그 일을 무슨 준법의식으로 막기는 어렵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장이나 행길에 책이나 디브이디를 쌓아놓고 손대면 안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범죄를 옹호하거나 고소인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인터넷범죄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갈 사정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저작권의식은 아직도 낮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조차 대담하거나 지능적인 표절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드물지 않고, 더러는 그런 일을 약점 삼아 마땅치 않은 상대방을 쓰러트리기도 한다. 그 상대방이 손을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표절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는 없고 그것을 요격미사일로 삼아 명중 격추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부도덕성에서는 피차일반이다.대학생들은 어떤가? 부산의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의 리포트 채점을 하려고 보니, 110명의 학생 중 39명의 리포트가 똑 같아서 표절로 처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이 공유파일에서 영화나 음악을 내려 받는 일은 다반사가 되어 있다.대학 교수와 대학생들의 저작권의식이 이러할진대, 10대의 어린 세대들에게 어른들도 외면하는 준법을 기대하기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우선 그들은 지능이나 지각 또는 판단력이 어른들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어디서 교육을 받거나 계몽을 받은 적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소년에게 경찰에서 난데없는 소환장(출석요구서)이 날아왔으니, 그 두려움이 어떠했겠는가?서울의 어느 경찰서의 경우, 그런 종류의 저작권법 위반사건의 고소가 한 달에도 3백 건 내지 5백 건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사건에서 누가 그 많은 이용자를 추적하여 범인(?)을 알아냈단 말인가?보도에 따르면, 모 법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그런 작업을 해가지고 무더기 고소를 해놓고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합의금을 받아내곤 한다고 한다. 그 어린 학생들에게 사전에 주의나 경고 한번 주지도 않고 그런 무자비한 짓을 하는 곳이 다름 아닌 법무법인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린 학생들을 표적 삼아 무더기 고소를 해서 큰 이득을 챙기는 변호사라면, 그 과오가 어린 네티즌의 내려 받기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다 큰 성인들에게는 몰라도 청소년들을 상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무더기 고소, 그것은 법의 극은 무법의 극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저작권 침해의 예방에는 무엇보다 교육과 계몽이 중요하다. 저작권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침해행위를 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는 교육이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에 앞서서, 또는 그와 아울러 교양교육이나 연수, 훈화, 세미나 등에서도 저작권 존중사상을 고취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전문분야를 불문하고 저작권법을 적어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표절을 비롯한 남의 저작물 무단이용에 대하여 엄격한 제재가 따라야 한다.저작권법 위반을 두둔하거나 눈감아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위법행위 예방을 위한 교육과 계몽, 경고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사안(事案)의 경중과 정상을 고려한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벌금을 바치면 될 일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의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변호사도 자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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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30 23:02

[금요칼럼] 남북회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 이우영

2007년 정상회담의 약속대로 남북 총리회담이 2박3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비록 임기 말이고 선거 국면이라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8개도 49개항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제2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2개의 부속합의서를 채택할 정도로 성공적인 회담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합의서의 채택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회담 분위기도 좋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회담의 합의사항들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총리회담의 진행과정을 볼 때, 국방장관 회담을 포함하여 남북한간 다양한 회담은 순항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이것은 곧 바로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한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북한 핵문제 해결과 남북한 평화정착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남북한간의 대화가 활발해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현재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회담간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핵심이 되었던 장관급 회담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리회담이 정례화되면서 기존 장관급회담은 소멸되는 것인지 아니면 총리회담과 별개로 지속되는지가 불투명하다. 만일 국방장관 회담도 순항하면서 정례화되고, 부총리급이 주도하는 경제관련 회담이 성사된다면, 그리고 남북한간에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가 가동되면 통일부 장관이 참여하였던 기존의 장관급 회담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 이산가족 문제 등 남북관계 전반에 관련되어있으면서도 총리급 회담을 비롯한 전문분야 회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을 수 있다. 2007년 정상회담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으면서도, 합의사항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회담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문제가 앞으로 진행될 각종 회담의 수준을 혼란스럽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실무회담, 장관급 회담 그리고 총리급 회담과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각급 회담에 다루어야할 주제들의 차원과 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최고위급이 결정하여야 하는 북한의 딱한 사정을 고려할 때,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사항 도출이 불가피하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북한간 소통구조의 정비는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간 회담이라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합의가 중요하겠지만, 먼저 남쪽 내에서 각급 회담의 위계관계 정립과 각급 회담 담당 부처 및 회담 간 대상 정리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총리급 회담이 정점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각 회담을 관련 주제별로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회담간의 위계 문제 등은 단순히 회담의 정비를 넘어서서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과도 연결된다는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남북관계가 활성화되면서 통일부만이 남북관계 업무를 관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경제문제는 재경부, 문화교류는 문화부 그리고 인도적 지원문제는 복지부의 전문성이 절실해지면서 통일부의 능력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담의 정비는 곧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의 재고가 필요하게 된다. 정권 교체기에 정부의 업무분장을 새롭게 하기는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남북관계의 활성화로 비롯된 각급 회담의 증가과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회담간 관계를 정비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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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23 23:02

[금요칼럼] 정치, 그 따위 없는 곳에 살고 싶다 - 김열규

누군지가 '정(政)'이 뭐냐고 묻자, 공자가 답했다. '정(正), 곧 바른 것, 정당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라.'政은 바를 正에 움켜잡을 복(?)이 달라붙어 있으니 공자의 해석은 일단은 전적으로 옳은 것 같아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공자 말대로라면 오죽 좋을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그러면서 우리들은 다들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게 될 것 같다. 부정을 택하여서는 거기 악착같이 달라붙곤 하는 비중이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데 공자의 해석은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政이란 글자의 겉모양만 보고 내린 해석이기 때문이다. 워낙 그 엄밀한 어원을 캐면 , 正과 征은 또 政, 이들 세 글자는 모두 꼴불견의 개망나니들이다. 발음이 모두 같은데다 뜻도 셋이 모두 그게 그것이다. 正을 '바를 정'이라고 미화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그 으뜸의 의미는 남을 치고 부수고 뺏고 하는 폭력을 의미했었다. 그러기로는 정복의 征이 다를 것 없다. 그리고 정치의 政도 마찬가지다. 셋 다 다같이 깡패고 폭력이고 부당한 무력(武力)이다. 남의 고을이나 집단을 쳐서는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해서는 뜯어낼 것, 깡그리 뜯어내기로는 이들 셋이 한 패거리다. 하긴 그렇다. 인류 역사에서 상고대부터 중세기까지 한 집단 또는 한 국가의 정사(政事)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던 것이 침략이고 전쟁이고 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政자 풀이가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 또는 일부 집단 전체의 규모에 걸친 정치로서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 현실에서 政은 공자의 말을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征과 통하고 부당한 폭력이나 싸움질과 통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것 같다.아니 판단을 망설이고 뭔가를 궁금해 하고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건 장담해도 좋다. 워낙 正은 치고받고 하기 그 자체 또는 그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했다. 거기에 박살내고 휘갈기고 한다는 뜻의 복(?)이 야합해서는 政자는 생겨 난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의 政은 이 본시 의미를 알뜰하게 살뜰하게 지켜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폴리티션'과 '스테이츠맨', 이 두 낱말을 구별한다. 어느 쪽이나 우리말로는 정치가라고 번역이 될 텐데도 저들은 그 둘을 다르게 쓴다. '스테이츠맨'은 공자의 말대로, 옳을 正을 지켜내려는 정치가들이다. 이에 비해서 폴리티션은 政의 흉측한 어원 풀이가 그대로 적용될 정치가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의 이른바 '대선(大選)'은 거의 그 대부분이 서로 헐뜯기고 서로 피 보기다. 심지어 상대방 밑구멍을 훑어 내보이려고 덤비기도 하는데 그 때 본인의 밑구멍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날 건지 어떤지 국민들은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가 하면 소위 통치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곤 하는, 전 국가 규모에 걸친 정치는 무지와 독선과 횡포로 넘쳐 있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그들끼리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흉물스럽게 뭉치다 보니 부패와 부정으로 권력 상층이 부분적으로 문드러져 가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든 간에 공자의 政자 풀이가 적용될 여지를 찾아내기는 쉬울 것 같지 않다.20세기의 중간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인 토마스 만은 그의 '비(非) 정치인의 성찰'이란 에세이집에서 말했다. '현대인에게 정치는 숙명이고 운명이다.'그는 현대인이 유감스럽게도 피치 못하게 '호모 폴리티쿠스', 곧 '정치인'이 아닐 수 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더러운 운명, 흉측한 숙명을 타고 난 꼴이 된다. 적어도 우리 한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딘가 정치라는 그 흉물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간절한 소망 이루고 살고 싶다. 한데도 그 망할 것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니, 이를 어찌한담? 소망의 간절함이 큰 만큼, 슬픔도 아픔도 크다./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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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16 23:02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코는 벌름거리게 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혼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걷는 일이 유아독존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일이라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 세계는 우리의 걷기에 동참한다. 풍경은 우리가 떠나온 곳이 궁금해 천천히 뒤로 지나가고, 달빛과 별빛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따라온다. 바람은 귀밑머리를 간질여 줄 것이며 땅은 발바닥을 떠받쳐 줄 것이다. 웅덩이는 웅덩이대로, 돌부리는 돌부리대로 유심히 우리의 걷기를 보살펴 줄 것이다. 승용차가 별로 없던 시절, 불과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참 많이 걸었다. 자동차는 걷기의 추억 따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수밭머리에 해 지는 풍경도, 마른 수숫대 위에서 뛰는 방아깨비도 보여주지 않으며, 수숫대가 서로 몸을 비비며 서걱대는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사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하는 풍경과 소리들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차창 밖으로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일 뿐이다.자동차가 적으면 당연히 오래 걷기 마련이다. 북한을 방문하면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는 북쪽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불 보따리만한 짐을 등에 지고 걷는 할머니도 있고,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걷는 소녀도 있고, 앉은뱅이책상 같은 걸 어깨에 메고 걷는 소년도 있다. 이제 남쪽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걷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걸을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거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걷는 다리의 수고를 덜어주니까 말이다. 남쪽 사람들이 걷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건강을 위해서다. 비로소 도시의 강변이나 등산로는 아침저녁으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걷는 것으로는 모자라 뜀박질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건강마라톤 대회는 참가자들이 매년 급증하고 있는 덕분에 주최 측이 밑질 일이 없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술자리를 나가봐도 걷기 예찬은 끊이지를 않는다.한쪽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걷고, 또 한쪽은 먹고사는 일에 배가 불러 살을 빼려고 걷는 현실이 나를 참 아득하게 만든다. 남과 북의 경제력의 차이일 뿐이라고, 콧방귀 한번 뀌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는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걷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내 뱃살이 두꺼워질 때 누군가 꼬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게 걷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의 도리다.나는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학교 앞 거리에 어느 날 이런 현수막이 나붙었다.이유 없이 배회하는 자를 신고합시다학교 부근 파출소에서 내걸은 이 현수막의 폭력성 앞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대한민국은 이유 없이 배회할 자유도 없는 나라라는 말인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라는 멋진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다/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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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9 23:02

[금요칼럼] DJ납치사건과 일본의 책임 - 한승헌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중에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한 납치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지난번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처사에도 강력한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의 유명환 주일대사가 위 납치사건으로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데 대하여 일본 외무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를 사실상 사죄라고 했다. 마침 일본 현지에서 이런 보도를 접하게 된 나는 쓰던 글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쓸 수밖에 없게 됐다.국정원의 진실규명위원회가 지난 달 24일 공표한 김대중납치사건 조사결과는 지금까지 34년 동안이나 은폐되어 왔던 권력범죄를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그만큼이라도 밝혀냈다는 점에서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그 조사보고는 의혹의 두 가지 핵심에 관해서 결론을 내려놓았다.첫째, 범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둘째, 단순 납치가 아닌 살해 목적을 가진 범행이었다는 점 등이다. 문장 상으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는 묵시적 승인 등 우회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건 조사의 제약과 고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박 대통령의 지시 여부 및 살해 목적의 유무가 국내적 관심사인데 반해서 범죄 발생지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영토주권의 침해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번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는가 하면, 새삼스럽게 무슨 수사라도 할 듯 한 제스처까지 보였다.지난 34년 동안, 한일 두 나라의 시민단체와 언론 등 각계에서 사건의 진상 및 책임의 규명을 그처럼 줄기차게 요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동풍 격으로 이를 묵살해온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의 진상조사 발표가 나오자 마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이 피해자 사정청취와 한국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실인즉 일본 당국은 1973년 8월 이 건 범죄 발생 당시 피해자 신변의 위험을 사전에 간파하고도 응분의 안전보호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범죄 발생 후 육로와 해상의 경비 검문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범인들의 도주 및 납치를 가능케 하였다. 당시 피해자는 일본에 적법하게 입국하여 체류 중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박정권의 탄압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정부는 그의 신변의 안전을 비롯한 기본인권을 지켜 줄 법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뿐인가, 일본 측은 범죄 발생지 관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초동단계부터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밝혀낸 사실마저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자국의 국내법상 이 사건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사를 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30여 년을 허송해왔다.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타나카 수상과 일본 국민에게 진사하였으며, 그 후 또 한번의 정치결착을 함으로써 두 정부는 이 사건을 더 이상 거론치 않기로 합의하였다.(그때를 전후하여 타나카 수상에 대한 금전 제공설까지 나돌았다.)한국정부에 대한 사과 요구는 기본적으로 두 나라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그 엄청난, 범죄를 방임했거나 자기 영토 내에서 검거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과 검은 유착을 하여 성급하게 수사도 중단한 일본 당국이 그러한 자기 과오는 접어두고 한국정부에 대해서 떳떳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설령 한국정부에 사과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사건 발생 후 한국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친서를 갖다 바치며 일본 수상에게 사과한 이상 일본정부가 또 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일본정부의 여러 과오를 생각한다면 일본정부 또한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여야 마땅하다. 지난날 두 번에 걸친 한일 간의 소위 정치결착은 어디까지나 정부끼리만 서로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고,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 대한 두 나라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정부의 사과의무는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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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2 23:02

[금요칼럼] 정상회담 이후의 평양 - 이우영

지난 18일부터 21일부터 평양을 다녀왔다. 대북지원 단체 남북어깨동무가 평양 영유아들을 위해 마련한 콩우유 공장 준공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가 적지 않았다. 전세기를 타고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의 평양 순안 공항의 외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베트남의 국가수반의 방문으로 베트남항공 비행기가 대기 중이었는데, 최신 기종의 베트남 비행기와 초라한 북한 고려 항공의 비행기들이 대비되어 속은 편하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은 전화에 시달리는 베트남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살았는데, 지금의 처지는 비행기 차이만큼 역전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 만에 방문한 평양거리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자동차를 포함하여 전차,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의 왕래 빈도가 높아졌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교통량의 증가는 시민의 유동성 증가를 의미한 것으로, 군밤과 군고구마를 파는 길거리 매대의 증가와 더불어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동강 중간의 양각도의 호텔방에서는 강건너에 있는 시장이 보일정도로 컸었고, 기념품점은 가는 곳마다 있어 남쪽 손님의 지갑을 탐내고 있었다. 그리고 상점의 점원들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밤거리는 이제 야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고, 새로운 건설 현장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외양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양시민들이 활기를 되찾았다는 점이다. 지난번 방북때 함께 갔던 남한의 어린이들이 소년궁전의 북쪽 어린이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뒤로 빠지거나 쭈삣거리던 아이들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응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부담스러웠을 남한 손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과거와 달리 남북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부딪치고, 담소하는 것을 막지 않은 북한 당국의 결정도 의미 있었지만, 평양의 공공장소나 묘향산의 등산길에서 만난 북한사람들 대부분이 남한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맞아주었다. 평양의 외면적 변화나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의 활성화와 유통되는 상품의 증대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동안 꾸준히 지속된 대북지원과 다양한 사회문화교류가 남한이 북한 사람들을 회유하여 체제붕괴를 유도할 것이라는 북한의 의구심을 약화시킨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동행하였던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만 하더라도 근 10여년동안 평양에 어린이 병원을 지어주고, 춥고 굶주린 아이들을 꾸준히 보듬어 온 결과 상호이해가 돈독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어깨동무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북쪽의 아이들을 볼 때는 답답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적지 않은 분노감에 휩싸였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그 만큼 문을 연다면, 북의 어린이들의 고통은 크게 줄어 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이외의 지역은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는데, 일차적으로 북한 당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남한 당국이나 남한의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콩우유 공장 기계를 소독하기 위한 솔조차 어렵게 구하는 북한, 어린이 병원의 기초적인 물품을 절실하게 부탁하는 북한의사들을 여전히 괴물과 같은 공포의 대상으로 각색하고 있는 남한의 어른들을 생각하니까 참담한 마음마저 금할 수 없었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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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26 23:02

[금요칼럼] 문학은 고통의 축제다 - 안도현

작가들의 글쓰기를 흔히 출산의 고통에 비유한다. 예술 작품의 탄생이 그만큼 엄혹한 진통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또한 작가들은 생의 환희나 행복보다는 고통과 결핍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이 아무런 아픔 없는 태평성대라면 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게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이렇듯 문학작품과 작가는 고통이 낳은 자식들이다. 다음 달 8일부터 14일까지 전주에서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에 참가하는 외국작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이들의 생의 이력은 하나하나 기구하고, 아프고, 눈물겹다. 그야말로 고통의 축제를 보는 듯하다.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오는 루이스 응코시라는 소설가가 있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극심하던 60년대에 흑인소년과 백인소녀 간의 성관계를 묘사한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편도 기차표만 받고 강제추방을 당한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후 30여년을 잠비아, 보츠와나, 말라위 등지의 인근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로 유랑한 작가다. 그는 1994년 최초의 흑인 정권인 만델라 정권이 선 이후에야 조국을 찾을 수 있었다. 1994년 벌어진 르완다 학살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다. 3개월 간 거의 일백만 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작가 욜란드 무카가사나가 이번 행사에 참여한다. 그녀는 학살 당시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생소한 나라 기니 비사우에서 오는 작가 로우렐은 돌고 돌아 한국에 온다. 그는 자국 내에 국제공항이 없어 인접국인 세네갈까지 버스 편으로 이동을 하고 세네갈에서 다시 유럽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대장정에 돌입한다. 아시아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베트남의 여성 소설가 레 밍 쿠에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유소년 자원군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력이 있다. 그녀는 5년의 군 복무 기간을 마친 뒤 1969년에 하노이에 돌아왔지만, 전장과 떨어진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정글로 돌아가 종전될 때까지 정글에서 군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전사다. 소련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하던 당시 유명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파타우 나데리는 감옥에서 시를 쓰던 시인이다. 그는 끊임없는 감시와 위협, 모욕 속에서도 담뱃갑 속에 끼워진 은박종이에 시를 썼고 자신을 보러 온 아내에게 그것을 은밀히 건네주었다. 우리의 김남주 시인이 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그리고 이집트의 작가 소날라 이브러힘은 1959년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이 좌익분자 처벌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지식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투옥하던 시기에 7년형의 강제 노역을 언도받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작가 파미다 리아즈는 계엄 정권하에 잡지를 발간하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력의 소유자다. 지구촌의 마지막 하나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이러한 작가들이 일정한 시기에 한데 모인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45개국에서 80명에 가까운 작가들이 오는 것은 80여 개의 외국 언론이 한국에 오는 것과 같다. 80여 개의 찬란한 고통과 80여 개의 순결한 영혼이 한국으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어쩌면 문학올림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여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소설가, 그리고 문학평론가 2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 독자들과 함께 축제의 장을 펼친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한국작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기 그지없다. 고은, 신경림, 송기숙, 최일남, 김주영, 전상국, 황석영, 한승원, 현기영, 강은교, 박범신, 김훈, 김용택, 황지우, 도종환,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윤대녕, 김인숙, 문태준, 김선우.고통스러운 세상에 뿌리를 둔 문학을 읽고 즐기는 것은 고통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모처럼 마련되는 품격 있는 축제를 이제 마음껏 즐길 일이 남았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한국의 작가가 수상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할 일은 아니다. 11월에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은 우리 한국문학의 힘을 확인하는 축제가 될 것으로 본다./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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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9 23:02

[금요칼럼] 권력과 능력과 서비스 - 김열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잖은 한국인들에게 권력은 매력 덩어리다. 그러기에 조선조 시대에 과거 시험 보러 가곤 하던, 그 소위 '선비'란 이들이 남긴 전통이나 내림은 지금도 퍼렇게 살아 있을 것 같다. 이건 정말이다. 온 세계의 동화에서 그 소년 주인공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탐색의 길', 곧 '참음의 길'에 오르게 되어 있다. 멀리 있을 무엇인가 매우 귀하고 희귀한 것을 혼자서 찾아 나서게 된다. 한데 한국의 동화에서는 정해 놓다시피 '과거' 보러 나선다. 그 뻔한, 그 지천인 벼슬 찾아서, 권력 찾아서 나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온 세계에서 가장 속된 동화가 이 땅의 동화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그러지 말아야 할 테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절로 메스껍다. 그리고 세계의 동화 대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소년의 꿈이 권력과 벼슬에만 걸려 있다면 그건 결코 '청운의 꿈'이 될 수 없다. 그건 짙은 비구름의 '흑운의 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소위 국가 권력이나 정치권력의 세가 크면 클수록 또 그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한 나라는 후진성을 면하기 어렵고 못난 꼴 면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할 때, 과거 보러가곤 하던, 그 전통, 그 내림은 차라리 저주스럽다. 그게 지금껏 남아 있는 게 안타깝다. 상당수의 한국인 가운데는 권력은 커녕 권(權) 자만 들어도 오금을 못 쓰는 사람, 아니면 어깨에 힘주는 사람 또는 군침 삼키는 사람 등등은 수두룩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인간들 앞에서 무턱대고 굽실거리고 따리 붙이고 하는 족속인들 적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저 못 된 권력이란 게 온 사회에 걸쳐서 흉을 떨칠 대로는 떨치고 나부댈 대로는 나부대고 설치고 하기 때문일 것 같다. 거의 만능의 힘, 마술의 힘 노릇을 하게 때문일 것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의 고위 층 비서관들이 두 사람씩이나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꼴로, 우리 한국 사회가 '권력 만능 사회'란 것을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준 것은 그 증거 치고도 일급의 증거다. 그들은 각 종 기관을 제 욕심대로 떡 주무르듯 했다. 경제고 문화고 무엇이든 상관없이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권력은 '도깨비 방망이'나 다를 게 없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경우,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두들겨 댄 ,저 '사람 도깨비'들도 문제지만 그들 방망이질 따라서 춤춘 당사자들도 문제다. 우리의 권력은 이처럼 부리는 자에게서나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서나 다같이 '요술 방망이'인 셈이다. 그런 게, 지금 우리나라의 소위, 권력이다. 그건 요컨대 괴물이고 요물이다. 운래 權은 나무 이름이다. 그러던 게 저울이 되고 무엇인가 방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선 權은 속임수가 되었다. 다음으로 뭐든 헤아리고 측정하는 것도 權이 되었다. 이게 바로 權의 음지와 양지다. 사회의 독(毒)이 되고 악이 되는 한편으로 사회의 만사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권모술수(權謀術數)라든가 권사(權詐)라는 말은 權의 음지 중의 음지다. 권사는 사기 치기와 같은 말이다. 權은 그 꼴이다. 사기 치기인가 하면 준칙(準則)이고 기준이다. 그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제 마음대로 재주넘는 게 權이다. 그러다 보니, 권세, 권도(權道) 등이 그렇듯이 권력도 그 양단 사이에서 버꾸를 넘게 되었다. 권력은 그걸 쥔 자의 개인적 욕망과 야합을 하고는 설쳐대게 되었다. 올바른 저울 노릇하면서 사회의 준칙이 되고 기준이 되어서 사회를 좌지우지해야 할 권력이 권모술수며 권사(權詐)에 기울어서는 사회를 제 마음 대로 움직여보려고 들게 되었다. 그게 일부 전직 청와대 비서관들의 권력이었다. 이제 참 다운 민주 사회답게 국가 권력이 변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이제 국가 권력도 사법 권력도 국가와 사회를 올바르게 저울질해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서비스고 봉사라야 한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사회의 온갖 힘들과 병존하고 공존해야 한다. 이제 국가의 힘은 경제다. 그건 정치권력 보다 윗자리에 앉으면 앉지 내리 앉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며 글로벌리즘을 계기로 삼아서 문화의 힘도 마찬가지로 세가 매우 커져 가고 있다. 교육이 팔을 걷고 활개 치면서 그 힘을 과시해도 당연하다. 이렇듯이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사회의 힘과 나란히,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야 한다.아니 스스로 그들 아래에서 굽실거리면서 서비스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통치란 말은 정치가 저 잘났다고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이제 그런 묵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는 것이 사회와 국가를 위한 권력이 될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국가 권력, 정치권력 그 자체를 위해서 경사스럽고 기꺼운 일이 될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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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2 23:02

[금요칼럼] 법대의 미래, 오해 바로잡기 - 한승헌

법학전문대학원법(로스쿨법)의 발효에 따라 로스쿨 인가경쟁은 한층 더 긴박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입학 총 정원의 책정에 이어 설립인가 심사가 시작되면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에서 47개나 되는 대학들이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나서는 과열현상은 보기에도 딱하다. 저러다가 인가에서 탈락되는 쪽에서 무슨 격한 반응이 나올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법학교육위원회 위원들에게 임명장과 아울러 방석모를 하나씩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부 고위인사에게 농담을 건넨 일도 있다.로스쿨도 어디까지나 대학원의 일종이다. 그런데도 그처럼 전력투구를 하는 것은 단순한 경쟁심리라고 이해할 수만은 없다. 이 나라의 법조인 양성제도가 올바른 법치주의나 국민을 위한 법률 서비스 향상에 중요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해서일까? 아니면 거기서 양성되는 판 검사, 변호사가 대단해서일까?어쨌든 로스쿨 인가를 못 받는 대학은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야말로 올인을 하는 양상이다. 그러면서 일부에서는 기존의 법과대학(또는 법학과)은 이제 무슨 강등이라도 당하거나 효용이 떨어진 듯이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다.로스쿨 인가를 받은 대학에는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이하 법대, 정확히는 법학에 관한 학사학위 과정)를 둘 수 없고, 로스쿨 없는 대학에만 법대가 남게 된다고 해서 그 위상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겼다고 해서 의과대학(학부)의 존재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법대는 법대로서의 고유한 존재이유가 있고, 로스쿨의 선행 교육기관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 법대이다. 물론 로스쿨법에 의하면, 그 입학자격은 다양한 전공자 흡수를 위해 비법학 전공자에게도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로스쿨 입시에서 법학(지식)시험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법대의 매력이 반감되는 이유로 보는지 모르겠다.그러나 이런 의견도 있다. 학부에서 법학 전공 4년에 로스쿨 3년, 도합 7년 동안 법학 공부를 한 사람과 로스쿨에서 3년만 법학 공부를 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 중에 누가 변호사시험에 유리할까? 7 대 3으로 법대 졸업생이 우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로스쿨법에 입학생의 3분의 1 이상을 비법학전공자로 해야 한다는 규정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법학전공자가 사실상 입학에 유리하거나 로스쿨 쪽에서 환영을 받을 여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전공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법대 출신의 합격을 제한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법대의 우세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본다.판 검사나 변호사의 배출이 법학교육의 유일한 목적일 수는 없다. 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법대의 일반 대학원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법조 실무교육에 치중하는 로스쿨보다는 법대와 그 대학원에 가야만 한다.뿐만이 아니다. 법학사의 학력(실력)을 필요로 하는 직역도 얼마든지 있다. 3부의 공무원을 비롯하여, 기업, 학교, 각계 민간단체, 그 밖의 여러 분야에 법대 출신들이 맡기에 알맞은 직종은 부지기수다.또한 로스쿨의 입시에는 대학 학부의 성적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학부의 성적이 좋아야 로스쿨 입학에 유리하기 때문에 로스쿨은 법대 교육의 정상화 및 면학분위기에도 일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로스쿨의 도입은 결코 법대의 위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어떤 이는 법대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쿨이 없는 대학은 판검사, 변호사를 배출하는 대학 축에 못 끼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조인 배출에 있어서 로스쿨과 법대의 역할은 직접이냐 간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배출이 아니면 보람도 못 느끼고 권위도 서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너무 공리적이다. 역전경주로 말하자면, 골인 지점에 들어오는 최종 주자만을 안중에 두고, 첫 번째나 중간구간을 역주한 선수의 공로는 폄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로스쿨 대신 법대가 있는 대학을 마이너 리그 쯤으로 여기거나, 스스로 그렇게 자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한승헌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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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05 23:02

[금요칼럼] 남북정상회담 논의 구조의 문제점 - 이우영

며칠 후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7년만에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만난다. 두 번째 만남인 까닭에 처음 만남만큼의 설렘은 없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모두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안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회담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213합의 이후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는 북한핵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로 얼룩지워진 지난 반세기의 분단구조가 종식되어 평화체제로의 전환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을 가장 반기고 지원해야 할 남한내 분위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심지어는 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하는 여론마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동안의 북한문제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논의 구조의 비정상적인 경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흔히 남남갈등으로 표현되는 북한관련 논의 구조는 대북정책 자체의 문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북한문제를 국내정치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좀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정부의 포용정책이나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문제는 정책자체에 있기 보다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즉,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대북정책을 이용하여왔다는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은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정립된 이래로 근본 철학이나 이념이 바뀐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골간은 전쟁이 아닌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그리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13합의 이후 한나라당 일각에서 포용정책이 원류는 자신들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이 만들었던 정책을 그 동안 스스로 비판하였다는 논리적 모순을 고백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북정책이나,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이 그동안의 포용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남남갈등은 내적으로 정쟁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남남갈등이란 말 자체가 특정 언론사가 만든 조어로서 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담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논의 구조가 국가와 민족이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상회담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가하는 식의 건설적인 논의가 아니라, 회담 개최의 당위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 회담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정쟁적인 논란들이 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2차정상회담 발표때부터 논란이 중심이었던 대통령 선거와의 연관성도 과거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설득력이 없는 문제이다. 이미 2000년 정상회담 발표에도 집권당 득표에 도움이 안되었던 경험이 있다. 오히려 KAL폭파 사건과 같은 남북관계에서 부정적인 사건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만, 대북지원이나 교류확대와 같은 긍정적 사안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검증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논의구조가 문제가 있는 것은 일파적으로 보수기득권세력의 정치적이고 정쟁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만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차 정상회담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집권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설득이나 배려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필요하고 정당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의 수렴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정책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무시한다는 것이 교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추진하는 정책자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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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8 23:02

[금요칼럼] 지금도 사투리, 표준어 따지는가? - 김열규

서울을 떠나서 남행하는 열차 안에서 생긴 일이다.  막 서울역을 나서서 남행하기 시작한 열차의 어느 칸이 시끌벅적했다. 부산과 대구 등지의, 이른바, '남도 여성'들이 많이 탄,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 여성들이 귀를 틀어막고는 견디고 있는 사이에 기치는 마침내, 동대구역에 닿았다. 대구 여성, 한 무리가 내렸다. 기차가 종착역, 부산을 향해서 출발하자, 여자들은 이젠 살았다고 귀를 막은 손을 내렸다. 한데 웬걸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부산 지역 여성만 남았는데도 서울 여자들, 귀는 여전히 따가웠다.  견디다 못한 서울 여자 승객 한 사람이 친구들을 대표해서 부산 여자들이 모여서 앉은 쪽으로 갔다.  '그 좀 조용할 수 없을까요?' 부산 여성이 대뜸 받아서 소리쳤다. '그래, 이 칸이 말칸 니 칸이다 칸은 거가?' 서울 여자는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저기 저 여자들 다 일본 사람이야?' 이렇게 투덜대고는 한숨을 토했다. 이건 남도 사람들이 들으면 여간 재마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 비해서 서울 사람들은 무순 이야기인지 전혀 못 알아듣고는 어리둥절할 게 뻔하다. 거기에는 영남말의 멋과 흥이 넘실대고 있지만 서울 사람 귀에는 외국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 여성 귀에 일본말로 들린 부산 여성의 발언을 서울 사람 알아듣기 쉽게 옮겨 보자. '그래, 이 (기차) 칸이 몽땅 네 칸이라고 말하는 건가?' 이쯤 될 테지만 그래 가지고는 흥겨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부산 여성의 발언은 짧은데도 '칸'이 자그마치 네 번이나 되풀이 되어있다. '칸, 칸, 칸, 칸'의 반복이 신난다. '프랜치 캉캉'의 춤사위 같다. 일행시(一行詩)가 아니면 , 무슨 경구나 속담처럼 재미있게 들린다.  하지만 그걸 서울말로 옮기고 보면, 영 맨송맨송 해서, 무슨 맹꽁이 울음 같다. 재미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그런데도 참 딱한 말버릇이 지금도 버젓이 활개 치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니고 서울 시민가운데서도 중류의 말을 '표준어'라고 떠받들고, 서울 아닌 다른 고장의 말은 '사투리'라고 퉁을 주는 일이다.  '사투리/ 표준어'의 이분법은 지금도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다. 설쳐대고 있다. 아니, 망언을 떨고 망발을 해대고 있다. '사투리/ 표준어'로 온 나라 안의 말을 양단(兩斷)한 것은 일제 치하의 저 욕된 식민지 시대의 일이다. 한데 그 본보기가 된 게 뜻밖에도 일본이다. 그 당시 이미 저들은 그들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方言)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으로 다분히 치욕스러운 한국어의 양분법이 거기 꿈틀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다. 한데 그게 언젠데, 그게 지금도 나부댄다면 그건 분명히 시대착오다. 이제 모든 면에서 지역차별은 없어져 마땅한 이른바, '지역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중앙집권적인 지역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림짐작이긴 해도 '사투리'란 낱말은 '서툴다'와 사촌 간쯤 될 것 같다. 당치도 않게 각 고장의 고유한 말이 서투르고 시원찮다고 해서는 욕되게 부른 것이 다름 아닌 '사투리'란 그 고약한 낱말일 것 같다. 물론 '방언(方言)'이란 낱말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야 한다. 방언이란 낱말을 곧이곧대로 풀면 어떻게 될까?  그건 '중안 아닌, 변두리, 외딴 곳의 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이, 그나마 중앙은 섬기고 떠받들고 지방은 깔아뭉개고 하던 아주 고약한 묵은 시대의 이분법이며 그 악습이 거기 엉겨 있다.  모르긴 해도 한 나라 안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 또는 사투리와 표준어로 나누고 있는 국가는 흔할 것 같지 않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양분법이 통하고 있는 나라로 우리들이 알만한 나라는 아마도 일본뿐 일 것 같다.  '시엄씨 몰래 술 뚱쳐 먹고 이 방 저 방 다니다가 시엄씨 궁뎅이를 밟았네'  진도 며느리들의 아리랑 타령은 진도 말이라야 제대로 멋 부리고 익살을 떤다.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밀양 아리랑을 뜯어 고쳐서 '날 좀 보세요' 한다면 상대가 천하의 절색이라도 바라볼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 '사투리와 표준어'의 이분법은 그만 두자. 호남 말, 강원 말, 충청 말 , 영남 말과 나란히 서울말이 있을 뿐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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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1 23:02

[금요칼럼] 엄살과 투정의 시대 - 안도현

며칠 전 출근길에 모처럼 연탄을 싣고 가는 트럭을 보았다. 반가웠다. 연탄 실은 트럭이 마치 흑백사진 같았다. '연탄' 하면 줄줄이 떠오르는 기억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했다. 아직도 연탄으로 차가운 계절을 나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직도 연탄으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물을 데우며 겨울을 나야 하는 가구가 20만이다. 북녘에서는 겨울나기 연료로 연탄마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고 한다. 엄살이 아니다. 나는 '연탄 한 장'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이 가을에 스스로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인가?" 삼시 세 끼 배곯지 않고 먹고 살만 한 호시절이라는데, 한쪽에서는 영 글러먹은 세상이라고 삿대질로 세월을 다 보내고, 또 한쪽에서는 옛적보다 사는 게 수월찮다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있다. 도처에 투정과 엄살이 넘쳐나고 있다. 경제를 탓하고 정권을 탓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탓하지는 않는다. 이게 문제다. 귀성길에 고속도로가 막히면 길게 늘어선 다른 차들을 탓하지 자신의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의 하나라는 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파트 시세의 급상승을 어찌 정부의 정책 부재 탓으로만 돌리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분명히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입으로 밥 들어가는 일도 투정 아니면 엄살이다. 잘 생각해보자. 더 맛난 것을 혀끝으로 찾으려는 욕망과 더 몸에 좋은 것을 섭취하려는 욕망의 부추김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점점 속물이 되어온 건 아닌지? 먹는 일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도시에서 먹는 일에 한사코 목을 매달고 살지는 않았는지? 남보다 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으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것은 아닌지? 요즈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정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거머쥐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다가오는 대선에 이겨 그 한을 풀겠다는 뜻이다. 엄살의 극치다. 이건 선술집 같은 데서 울분을 참지 못해 술상을 내리치며 내뱉어야 할 소리다. 이런 신파조의 엄살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가 없다. 그들은 10년 동안 권력을 잃었을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은 이 기간에 참으로 소중한 민주주의를 얻었다. 비로소 성취한 민주주의를 향후에 어떻게 잘 가꾸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 타령은 안 된다. 다시는 '겨울공화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따뜻함이다.참여정부의 실패와 무능에 대한 지적도 엄살과 투정으로는 곤란하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따뜻함에 대한 배려의 실패이다. 객관적인 논리와 투명한 일 처리의 배면에 따뜻함은 전무했다. 여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이른바 경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따뜻하지 않은데, 누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겠는가?곧 추석이 다가온다. 고향은 따뜻한 밥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누구도 고향에서는 투정과 엄살을 부리지 않았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알았고, 반찬을 서로 권할 줄 알았다.명절은 그렇게 더불어 밥 먹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시간이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고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고향에서는 성공했다고 떠벌이며 자랑할 일이 아니며, 실패했다고 기죽어 고개 숙일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밥상 앞에서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다. 올 가을엔 제발 따뜻한 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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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14 23:02

[금요칼럼] 피랍자 생환이 최우선 아닌가 - 한승헌

아프간 피랍자들의 생환은 누가 뭐라던 정부 당국의 적절한 대응으로 이끌어낸 성과였다. 생존자 전원 석방 합의가 공식 발표되었을 때, 그동안의 피말리는 극한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 하고 간절히 염원하던 모든 국민들은 감사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다각적인 노력을 평가했다. 그러나 거개의 언론들에서는 정부 측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은 별로 하지 않은 채, 이런저런 문제점만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외국인의 시각, 현실을 무시한 평가, 정부 폄하의 속셈까지도 드러나 있다.두 목숨의 희생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나머지 피랍자를 45일 만에 무사히 생환시킨 마당에 그 과정상의 방법이나 조건을 가지고 이런저런 말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불과 며칠 전 만하더라도 피랍 후의 상황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던가. 지난 7월 19일 아프간에서 한국인 23명이 반정부 무장단체 탈레반에 의해 납치당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절망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탈레반은 처음엔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한국정부가 연내 철군방침을 밝히자 이번에는 탈레반 죄수 23명과 인질의 맞교환을 석방조건으로 내세웠다.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의 시한을 정해놓고 인질 살해의 협박을 되풀이했다. 탈레반 포로의 석방은 우리의 힘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아프간 정부와 미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테러집단과의 협상은 없다는 그들의 원칙론 앞에 달리 돌파구가 없었다. 배형규 목사의 피살, 대통령 특사의 아프간 파견, 고도로 계산된 탈레반의 언론플레이와 심리전, 심성민씨 추가 살해, 한국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는 탈레반의 전략, 양측 대면협상의 개시, 여성 인질 두 사람의 석방, 대면협상의 재개, 전원석방 합의에 이르기까지.탈레반의 총부리 앞에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인질들의 절망적 표정을 동영상으로 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 국민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람만 무사히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런 간절한 요망에 부응하고자 정부는 전력을 다했다. 밖으로 알려진 보도만으로도 제반 악조건 속에서 정부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전원 석방의 합의가 발표되고 나자 언론은 곧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입을 모아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문제 삼았다. 아프간이나 미국이 냉담했고 달리 사태를 풀어갈 방도가 없는 가운데,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인질을 두 사람이나 살해하는 마당에, 무장단체의 직접 협상 요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우리 쪽에서 직접 대면을 요청하고 싶은 판국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자국민이 무장집단의 총구 앞에 떨고 있는 마당에 테러집단과의 협상금지원칙에 묶여있을 정부가 얼마나 있을까. 사태 해결 전후의 외국 언론의 비난에 대해서 우리 언론이 좀 더 분명히 반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테러집단과의 협상 불가, 몸값 불가원칙만 준수하고 있다가 우리 형제가 몰살당했다면, 그때 언론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분명코, 인명이 최우선인데 운운했을 것이다. 아니면 국제사회의 원칙을 지켰으니 잘했다고 할 것인가. 우리 정부의 선택은 트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잘 한 일은 (누가 했던 간에) 잘했다고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연말 철군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서 협상에서의 이점을 놓쳤다고도 한다. 철군 시기는 어차피 계획되어 있던 것이어서 초동단계에서 인명의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발표였다. 만일 그와는 달리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한국군의 아프간 철수시기가 결정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이야 말로 씻을 수 없는 굴욕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시종 탈레반에 끌려 다녔다고 비판했는데, 이번 같은 특수상황 하에서 무슨 수로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는지 묻고 싶다. 국정원장의 과잉노출과 과잉홍보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전 게임 몰수를 하듯이 정부를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흔히들 공과(功過)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공으로 과를 씻을 수 없듯이, 과를 이유로 공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다음 정권을 맡아보고 싶은 정당이나 지도자라면 지금의 국가공직이 바로 다음번의 내(우리) 자리라는 가정을 하고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옳다.우리는 이번 인질사태를 조성한 탈레반의 비인도적 만행에 대하여 분노한다. 동시에 우리 정부의 해외파병정책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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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07 23:02

[금요칼럼] 남북 합작드라마 '사육신' 유감 - 이우영

북한에서 제작된 드라마 '사육신'이 지난 8일부터 방송되고 있다. KBS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이 제작을 시작한지 2년여만의 일이다. 사육신은 명실상부한 최초의 남북한 합작 드라마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동안 남북한간에는 다양한 방송교류가 있어왔다.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등의 제작협조가 있었고, 보도부분에서도 현지 진행 방송 등이 시도되어왔다. 또한 태조왕건의 오프닝 장면 등을 현지에서 촬영하는 등 드라마 부분에서도 부분적인 교류가 있었다. 드라마 사육신은 기존 교류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과거의 교류가 대부분 일회적이고 이벤트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한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적지 않은 사회문화교류가 있었으나 그 성과가 축적되지 못하였다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경우는 그 동안 남북이 쌓아올린 신뢰와 교류과정에서 이해하게된 상대방의 기술적 문화적 특성을 종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세상에 내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KBS는 이번 '사육신' 제작을 위해 북한 총 210만 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 가운데 70만 달러가 현금이며 140만 달러는 방송 장비다. 또 카메라 기술, 조명, 세트, 의상, 분장, 디지털 오디오 편집 기술 등 각종 방송 기술을 북측에 전수되었고, 이는 향후 북한의 드라마 제작 인프라로 활용될 전망이다. 어쨌든 남한 방송에서 북한 배우들이 나오고 연출가 등 북한 제작자들이 엔딩 크래딧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남북한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의미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사육신은 시청자들로부터는 외면 받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7%대로였던 시청률이 3주가 지나면서 2%대로 떨어졌는데, 이는 TV방송에서 마지노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애국가 시청률 3%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렇게 시청률이 낮은 것은 낯선 배우들, 이해하기 어려운 억양과 말투, 느린 진행 등이 남쪽의 시청자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시청률이 반드시 높을 필요는 없다. 또한 남한의 드라마도 그 정도의 시청률을 보인 경우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육신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작품자체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일단 정치적 이유에서 작품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 드라마 제작과 방영을 퍼주기의 결과라고 하면서, 법적 제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북한 것이니까 무조건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막무가내식 반대도 있다. 문화적 차이가 드라마를 외면하는 원인이라는 사실도 문제가 없지 않다. 북한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경향 즉, 문화적제국주의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지불한 비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남한의 드라마 제작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제작비는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총 비용 가운데 제공된 방송장비는 앞으로의 방송교류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문화적 차이가 더욱 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획일성, 문화적 배타성이라는 작품외적 이유에서 사육신을 외면하는 한 앞으로의 남북한 사회문화교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교류나 남북한간 이해 증진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눈에 띠는 교류아이템을 찾아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 내의 반북적인 사고, 냉전적 문화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스스로의 성찰이 없는 한 심지어 완벽한 합작 드라마라도 방송을 타기 어려울지 모른다. 더 나아가 사회문화적 접촉이 남북간의 거리감을 확대시킬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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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31 23:02

[금요칼럼] 서울 올라간다니? 이제 그만하자 - 김열규

'서울 올라가서 부산 내려 온다' '대구서 서울로 올라 간다' 지금도 이렇게 말하는 지역주민들이 적지 않다. 올라가긴 도대체 어디로 올라간단 말인가? 내려오긴 도대체 어디로 내려온다는 걸까? 서울이 어디 하늘 꼭대기에 붙어 있고 부산이나 대구 등의 고장이 어디 땅바닥에 내려 박혀 있다면 모를까, 그런 말 이제는 쓰면 안 된다. 그것도 멀쩡한 지역 주민이 그런 묵고 낡아 빠진 말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모르다가도 또 모를 일이다.  일반적으로 '위아래'란 말은 단순히 방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분이며 처지의 높낮이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무슨 물건일 때는, 그 가치며 값을 따져서 상품(上品)과 하품(下品)으로 차별지울 때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심지어 좋고 나쁜 것, 제대로 된 것과 엉터리인 것의 구별도 상하로 나누어서 매길 수 있다.  윗자리와 아랫자리, 웃어른과 아랫것, 손위와 손아래, 윗분과 낮은 것. 사람 가지고도 이같이 위아래를 따지고 높낮이를 구별한 것은 그렇다 쳐도, 그게 지역 간에까지 설치고 나선 것은 이젠 용납할 수 없다. 조선왕조는 세계사 전체를 보아도 아주 별난, 아주 강한 중앙집권의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겠는가? 거기 담긴 고약한 지역차별이 '서울 올라 간다'를 관용어로 굳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나부대고 있다. 조선조 이래의 낡아빠진 시대에는 예사로들 '상경하고 하향(下鄕)한다'고들 말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 고향 가는 걸 하행(下行)이라니 말도 아니다. 이제부턴 당당하게 '상향(上鄕)한다고들 말해야 한다. 요즘에도 여전히, 이 따위 말을 남들에게서 예사로 듣게 될 적마다 필자는 결코 떠올려서는 안 될 걸 문득 떠올리곤 한다.  그 흉악한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서울에서 대구나 부산으로 가는 기차 길은 상행선이라 하고 부산서 서울로 가는 철길은 하행선이라고 했다. 저들은 저들의 수도인 일본의 동경으로 하여금 중앙에 자리하게 하고 또 최상층에 버티고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가 차라리 낫다고 부산이나 대구 사람들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하나 마나다. 이 따위를 지금 새삼스레 연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문득 모르는 새에 떠올리곤 하는 것이 본인으로서는 부끄럽고 괴롭다. 못난 필자는 스스로 그 따위 고약한 것을 연상하게 되지 않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싶다.  그러니까, 이제 각 지역사람들은 떳떳하게 서울은 내려간다고 하고 제 고장은 올라간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어느 곳이나 위아래로 매길 것 없이, 그냥 광주 가고 서울 가고 한다고 그렇게만 말하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한데 비슷한 보기는 또 있다. 그건 다름 아니고 '너 언제 서울 들어 왔냐?' '당신, 언제 충주 내려 갈 거지?' 이런 말이다. 여기서 서울은 안이고 내부다. 지역은 한데고 바깥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울은 중심에 들어가서 자리 잡게 되고 지역은 가장자리나 변두리로 밀려 나서 처져 있게 된다. 이것도 극심하게 낡아빠진 중앙집권제의 퇴회된 유물이다. 오래 전, 조선왕조 시대라면 '대국 들어가서 조선으로 나온다'고들 말했다. 물론 여기서 대국(大國)은 중국이다. 따라서 조선은 소국(小國)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창피한 말버릇은 일제시대로 이어져서는 요즘의 대명천지에서도 여전히 서승대고 있다.  '나 내일 미국 들어가!라는 말버릇이 바로 그렇다. '들고 난다'는 말에 담긴 조선조 사람들의 자기비하(自己卑下)나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 비하나 요즘의 각 지역 사람들의 자기 깔보기나 하나도 다를 것 없이 창피한 일이다.  올라가고 들어가는 곳이 서울이고 내려가고 나가는 곳이 지역이라면 국토 전체를 두고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그건 다름 아니고 나무 그림이다. 서울이 당당히 중심 근간에 위치하고, 그것도 최상층에 자리하고 지역들은 아랫부분의 곁가지 끝에 달랑 달랑 붙어 있는 그런 나무 모양이 연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극히 최근의 사회구조나 국가 구조는 흔히 '리좀'이란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땅위의 나무 모양이 아니고 지하의 뿌리들에 견주어지기도 한다. 거기엔 위아래의 구별도 중심 바깥의 차별도 없다. 그러기에 서울 올라가고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도 보통 착오가 아니다. 이제 제발 그만두자! 서울 올라간다는 그 말! 모든 지역 사람들이시여!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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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24 23:02

[금요칼럼] 언어의 진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눈시울을 뜨뜻하게 적시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시위를 하러 떠나는 고등학생들의 눈 밑에 교사가 치약을 발라주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영화의 이 사소한 장면은 그 사소함 때문에 빛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막아서도 안 되는 역사의 흐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오늘날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먼 옛날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광주'는 여전히 현실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민주주의를 지켜온 사람들은 이를 '광주항쟁'이라 부른다. 얼마 전 유력한 대선주자의 한 사람은 이를 두고 스스럼없이 '광주사태'라고 말해버렸다. 놀라웠다. 이 용어는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나 '불순분자'로 내몰던 자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이미 폐기처분 되었어야 할 잘못된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이 제5공화국 수준이라는 뜻이다. 과거로의 화려한 회귀일 수도 있다. 언어는 의식을 반영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사태'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사태'이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그 이전에 의식을 바꿔야 하고, 또 의식을 바꾸려면 치고 박는 경선 준비보다는 '화려한 휴가'를 몇 번 더 보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무릇 하나의 명칭이란 단순히 사건의 기호에 머무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이 시작할 때부터 마무리될 때까지를 두루 아우르면서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푯대가 되는 것이다. 1894년에 이 땅에 일어난 큰 사건이 있다. 이를 부르는 명칭도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하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오농민전쟁'이 최근에는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건은 '동학란'이었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슬그머니 '동학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197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에는 '혁명'이 없었다. 아니, '5.16혁명'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달달 외우고 성장한 세대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한테 잘못 가르쳤다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독 나를 잘못 가르친 어른들에게 따지고 싶어지는 것일까?언어는 변화한다. 그것도 그 형태와 의미가 변화할 뿐만 아니라 식물처럼 영양분을 먹고 쑥쑥 자란다. 물론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언어도 있다. 때로는 언어에 유기체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한국전쟁'이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6.25동란'은 우리 눈앞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한편 우리가 떠나보낸 '동무'의 자리를 '친구'가 차지하고 앉아 있기도 하다.남북교류가 잦아지면서 북한에 출입하는 이들한테 정부에서 누누이 교육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상대방을 부르는 용어다. 북한을 '북측'이나 '북쪽'으로 부르라는 것이다. 왠지 어색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에 서로 합의한 언어이므로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머지않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남북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북측'과 '남측'이라는 말로 상대를 부를 것이다. 한때 북쪽을 향해 우리는 '북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불러대던 적이 있었다. 만약에 그 '북괴'라는 말을 지금 누군가 다시 꺼내 쓴다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것인가.1980년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대학생인 우리는 '북괴가 남침하면 우리도 총을 든다'는 벽에 적힌 구호를 보아야 했다. 그 속에는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해 광주는 무법자들에 의해 온 도시가 빨간색으로 물들어야 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데, 이 참에 한 번 묻고 싶어진다. 언어는 과연 진보하는가?/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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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17 23:02

[금요칼럼] '직구'만 아는 정치인의 언어수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다음 바로 그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영국의 처칠 수상, 그는 유머리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그가 낸시 에스터라는 영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과 벌인 설전은 들어볼만하다.낸시; 당신이 만일 내 남편이라면 당신의 음료수 잔에 독을 넣고 말겠소.처칠; 그래요. 만일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독을 마셔버리겠소.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 언제라도 한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다만 그 시기가 일각이라도 늦게 오기를 빌고 있을 따름이다.처칠은 학생 때 성적이 최하위권을 맴돌았다는데, 어디서 그런 재치와 순발력이 나왔을까이미 정치 유머의 고전이 되다시피 한 또 하나의 이야기도 역시 영국산.수의사 출신의 한 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는 중에 반대당 의원이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수의사라면서? 그러자 이 수의사 의원 왈, 그렇소, 당신 어디 아프시오? 진찰해드릴까요?정치의 세계에서는 상대당 또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필수적인데, 그러다보니 말이 격해지기 쉽다. 그래선지 위에 든 바와 같은 정치인의 수준급 유머는 아직 한국에서는 흉년이다. 언젠가 국회에서 한 야당의원과 경제부총리 사이에 이런 말의 혈투가 벌어졌다.의원; 그렇게 치고 빠지지 말라. 부총리;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자꾸 그래요?의원; 어디에다 대고 신경질을 부리느냐? 부총리; 인격적으로 모독하지 말라.바야흐로 대선의 계절, 정치판에는 음해와 막말이 횡행한다. 상대정당과의 본선도 아닌 집안끼리의 예선 리그에서 저렇게 치고받고 해서야 패자가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승자를 도와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심지어 당 대표가 사생결단의 비방은 말라고 호소한다. 어떤 일간지의 李 갈리게, 朴 터지게라는 기사 제목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1차 방정식 밖에 모르는 말솜씨들이다. 직구만 알고 커브나 서브마린의 위력과 묘미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미테랑 대통령과 시라크 총리가 각기 사회당과 보수당을 이끌고 기형적인 동거정부를 꾸려가고 있던 1990년대의 이야기. 미테랑이 이런 자화자찬을 하였다. 과거에는 출산율의 저하로 고민했는데,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한 후에는 출산율도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보수파의 시라크 총리가 아주 점잖게 반박을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출산율 상승은 사회주의의 성과라기보다는 프랑스 국민 개개인의 노력의 성과라는 것을 대통령께서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개개인의 노력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진미를 알 수 있는 말이다.)도대체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가겠다는 인물이라면, 식견과 도량, 신념과 교양,품격과 신뢰감 등 여러 면에서 무언가 남다른 데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검증 평가할 수 있는 내신과 수능성적이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말과 행실에 의해서 채점된다. 그런데 적어도 말의 품격에 관한 한 우리 정치인들은 낙제 근처의 수준이다. 그렇지 않은 극소수를 예우하는 뜻에서 대부분이라는 말을 붙여 주자. 나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언행에 오염되어 사고와 언어생활에서 건강성을 잃어가는 국민들을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공직 선거 후보자(그 지망자 포함)들에게 일정 기간 언어교육을 시킨다. 둘째 선거과정이나 의정생활에서의 발언을 개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반칙을 통고하거나 공개한다. 셋째 학교교육 및 사회교육에서 민주시민에 합당한 언어교육과정을 밟게 한다. 넷째 저질 발언을 상습적으로 일삼거나 음해성 발언으로 한몫 보려는 후보를 가려내어 정계에서 도태시킨다.한 야당의 유력한 경선후보들 사이에 여론조사 설문사항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누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와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놓고 서로 막무가내다. 당에서 내놓은 절충안 ....누구를 뽑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는 양편에서 모두 손사래를 젖는다. 자기네 이해에 직결되는 표현에는 이처럼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 희화적이다. 평소 상대방에 대해서 말할 때도 이처럼 한 마디 한 대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후보야 말로 민주사회에 합당한 지도자로서 알맞는다고 할 것이다./한승헌(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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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10 23:02

[금요칼럼] 아프가니스탄 인질사건의 뿌리 - 이우영

봉사를 위해서 이국땅에 갔던 무고한 시민 23명이 텔레반에 납치 된지도 열흘이 넘어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걱정에 휩싸여 있다. 이미 한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잡혀있는 인질들의 고통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이 사건의 본질을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이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절대적 가치의 하나인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필요한 바를 얻으려고 하는 텔레반의 행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반인륜적 범죄라는 점이다. 사실 그 동안 납치나 인질 그리고 이를 포함한 테러는 우리와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이라크, 나이지리아 그리고 소말리아 등 여러 지역에서 한국 사람들도 납치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애꿎게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유에서 경제적 동기까지 납치와 같은 범죄의 대상이 된 까닭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세계화의 진전으로 한국 사람들의 활동법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프카니스탄의 경우에서 잘 보이지만 납치나 인질 그리고 이를 포함한 테러의 확대가 한국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시대통령의 장담(?)과는 달리 세상이 점점 안전하지 않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우리 국민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특히 부시정권의 일방적 패권주의가 테러 증대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 도처에서 테러관련 사건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당장 우리 국민들을 억류하고 있는 텔레반의 경우, 미국의 침공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테러 집단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부시정권 때문에 생겨난 집단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부시정권이나 미국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차원으로 시각을 넓혀 본다면, 텔레반 존재의 원인은 소련과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가장 불안정한 나라의 하나인 이라크도 그러하고, 해적(혹은 군벌)이 창궐하는 소말리아, 참담한 학살의 현장인 수단의 다르푸르, 만성적인 분쟁지역인 레바논과 팔레스타인도 근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분별한 침략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군대를, 때로는 종교와 사상을 앞세워 남의 나라를 지배하였던 국가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의 대소 정책의 산물이었던 무자헤딘이나 텔레반에 대한 미국이나 소련의 태도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세계적 분쟁지역이라고 한다면 마치 해당국가나 국민들의 문제로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잔인무도한, 반인권적인 테러집단과 이들의 문화(국민성과 종교성을 포함하여)가 원인이고 본질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분열과 상호 적대감 확산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지배정책의 산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식민지 경험이후 둘로 나뉘어 피튀기게 싸우고 있는 우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 식미지 경험으로 여전히 아픈 우리 국민이 또 다른 역사의 피해지역에서 겪는 고통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 못지않게 제국주의의 아픈 역사를 아직도 겪고 있는 우리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레바논과 같은 국가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명분이라 어떻든 간에 현지사람들은 우리를 가해국가의 군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납치사건의 본질을 따져보는 것이 텔레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질의 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히 비판하고, 가능하다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들의 행위와 존재 자체에 책임이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좀 과하게 말한다면 텔레반이 살인범이라면 이들은 교사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들에게는 입을 닫고 있는 것일까?/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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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03 23:02

[금요칼럼] "말, 그 함부로 하지 말것" - 김열규

'말 잘했다!'이건 칭찬인가 하면 나무람이고 또 핀잔이기도 한 묘한 말이다. 핀잔일 때는 '말 같지도 않는 말', '억지 부리는 말'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무람일 때, '말 잘했다!'는 이른바, 아이러니가 되는 셈이다. '말 같지도 않는 말'을 뒤집어서 비꼬는 것이 된다.요즘 우리들이 신문을 읽고 TV를 보면서 무심코라도 자주자주 '그 말 잘한다!'라는 아이러니를 내뱉게 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그나마 큰 자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발언하는 것을 들을 때, 드물지 않게 시민들이 '그 말 잘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신분이 높을수록 그들 말이 땅바닥을 뒹굴고, 진흙구덩이 속에 내리박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일반 시민으로서도 괴로운 일이다.그러자니 예부터 자주 써온 말이 절로 생각난다. '신언서판(身言書判)!' 바로 이 한마디다. 하지만, 오늘날 그게 잊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나마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그런 것 같아서 마음 아프다.그래서 새삼, 경구(警句)라고 해도 좋고 잠언(箴言)이라고 해도 좋을 '신언서판'을 되새겨 보자. 몸가짐과 말과 서예(書藝)와 그리고 판단력, 이 넷이 다름 아닌, '신언서판'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인간의 능력과 인품을 매기는 '4 대 기준'이 되어 왔다. 특히 '선비'며 벼슬아치에게서는 절대의 기준이었다.한데 오늘 날 서(書)가 컴퓨터의 자판(字板)찍기에 밀려나면서 덩달아서 '신언판'의 셋도 한꺼번에 퇴락하고 있는 것 같다. 언(言)을 말이라고만 했지만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언은 말의 내용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논리도 '언'이고 따라서 말투, 말버릇도 물론 '언'이다. 더욱이 언행(言行)이라면서 언이 행동이며 행위와 짝 지어서 사용된 것은 매우 큰 뜻을 품고 있다. 언행일치라면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이 곧 행동이요 행위가 바로 말임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말을 떠난 행동이 없듯이 행위를 떠난 말이 없다는 것도 십분 의미하고 있다.뿐만 아니다. 신(身)과 짝지어서 신언(身言)이 되면 몸가짐이며 행실이 곧 언어요 언어가 다름 아닌 처신(處身)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언행'이나 '신언'이나 어차피, 말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말임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말은 인간의 로고스요 이법(理法)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 판국에 누군가 말을 함부로 하면, 그나마 내뱉다시피 아무렇게나 하고 즉흥적으로 토하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가 막말을 해대고 쌍소리 비슷한 말도 해댄다면 어떻게 될까? 그나마 나라의 큰 자리며,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런다면 나라꼴은 또 어떻게 될까?물으나마나다. 답은 아주 뻔하다. 그의 행실도 처신도 인품도 파탄을 빚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시민들에게서 '그래 말 한번 잘한다'는 아이러니를 들을 적마다 나라꼴이 구겨질 게 뻔하다.언책(言責)이란 말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다. 그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복리를 위해서 마땅히 할 말 해야 하는 책무를 의미한다. 공중을 위해서 중론을 모아서 말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해도 좋다. 한데 또 다른 하나는 말한 사람이 그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져야하는 책임이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언책이 제대로 구실을 다하고 또 지켜질 것을 전제하고서야 공인(公人)은 공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언서판'이 살고 그의 인품도 지켜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아예 입 닫아야 한다. 정말이다. 함구무언해야 한다.오늘날은 여론의 시대다. 중론과 공론의 시대다. 그건 제 혼자의 생각을 잘난 척하고는 떠벌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인(公人)들의 공적인 발언은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바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차라리 현명할 것이다. 그들에게야말로 침묵이 금일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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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27 23:02

[금요칼럼] 글씨 잘 쓰는 사람 - 안도현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늘어났는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 컴퓨터 탓이다. 학생들이 꽤나 정성들여 작성한 제출한 리포트도 사정이 다를 거 없다. 글씨체가 너무 조악해서 봐줄 수가 없다. 대학생들의 글씨가 중학교 신입생만도 못한 게 수두룩하다. 우리의 교육과정도 글씨 잘 쓰는 공부는 제쳐둔 듯하다. 이대로 방치하다 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육필이라는 말은 매우 고색창연한 말이 되었다. 글을 치는 게 아니라 쓰는 작가는 이제 극소수다.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를 잊을 수 없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 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메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상이었다. 그러한 좀팽이의 글쓰기가 경이로워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서 내가 맨 먼저 배운 문학은 선배들의 글씨체를 흉내 내는 일이었다. 선배들처럼 글씨를 써야 적어도 선배들과 같은 수준의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는 만년필로 아주 예쁘고 멋진 글씨를 썼다. 함부로 흘려 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모범생의 필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문학청년의 냄새가 나는 글씨였다. 그 필체를 연습한 덕분에 나는 그 선배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고, 때로 선배의 소설을 원고지에 옮겨 쓰는 대필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 선배의 필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를 거쳐 몇 해 동안 내 후배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글씨를 통해 원고정서법뿐만 아니라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다.습작 시절에는 글씨 못지않게 어떤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는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는 첫 번째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기관이나 단체, 출판사나 신문사 이름이 찍힌 원고지를 손에 들게 되는 날은 대단한 문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원고지와 육필의 시대는 그 빛나던 야성을 잃었다. 가끔 문예작품 심사를 하다가 보면 그런 필체와 그런 원고지를 만날 때가 있다. 인쇄한지 좀 오래된 듯 원고지의 모퉁이가 바랜, 아주 유려한 만년필 필체로 정성을 들인 원고 말이다. 원고를 작성한 방법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연령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원고에 쓰인 언어는 수십 년 전의 정서와 감각에 머물고 있기 십상이다.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기를 놓친 원고를 옆으로 제쳐두면서 나는 원고지라는 형식의 종말을 쓸쓸히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나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여덟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자기나 컴퓨터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퍼스널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타자기와 달리 무진장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는 신비한 기능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시 한 편을 쓸 때 보통 수십 장의 파지를 내던 나는 서슴없이 글을 치는 쪽에 줄을 서버렸다. 문명의 편리함을 쫓은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필체가 시원찮은 시인이 되었다. 글씨를 쓰지 않으면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우표 뒷면에 침을 바를 일도 없어져버렸다. 원고를 이메일을 통해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원고 마감 시간 직전에 몇 번의 클릭으로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랄 만큼 편리해졌으나 이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작 석 줄밖에 안 되는 졸시 너에게 묻는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 연탄재로 바뀌는가 하면 수많은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모든 국민이 다 서예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어라는 글자 고유의 조형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글씨에 인격이 드러난다는 말은 케케묵은 관용구가 되었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책꽂이에 꽂아두던 펜글씨 교본 같은 책을 다시 우리 학생들의 손에 쥐어줘야 하나?/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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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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