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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이기호

미국의 작가 레이몬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소설엔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그들 부부의 아이가 세상을 뜬 것은 우연한 교통사고 때문인데, 그날은 마침 아이의 여덟번째 생일날이기도 했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미리 주문해놓은 생일케이크 따위는 잊어버린 채 슬픔에 빠져 있던 부부에게 제과점 주인은 왜 만들어놓은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느냐며 화를 낸다. 제과점 주인은 당연하게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주문만 해놓고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무책임한 손님들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품 말미에 가서야 사정을 알게 된 제과점 주인은, 젊은 부부에게 사과하며 자신이 만든 롤빵을 내민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스토리로서만 바라보자면 어쩌면 제목 그대로 별것 없는, 밋밋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가 감동스러운 것은, 슬픔과 허기를 같은 위치에 두고, 허기를 통해 슬픔을, 슬픔을 통해 허기를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것이 뻔한 부부에게 내미는 롤빵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고, 커다란 도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그 빵을 통해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에서 롤빵을 세 개나 먹는 것으로 묘사됐다. 개인적으론 그 부분이 소설에서 가장 슬펐다. 아이를 잃고 롤빵을 세 개나 먹을 수밖에 없는 엄마. 그녀의 허기.지난주엔 일 년 가까이 지연되었던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들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다음날, 어느 한 신문의 사설에선 유가족이 받은 보상금이 1인당 6억원이라는 액수를 강조하며, 그 대가를 대한민국 국민이 두고두고 치를 것이라고 일갈했다. 장례식 전전날엔 역시 사설을 통해 희생자들이 정당한 공무집행에 맞서 불법 폭력행위를 일삼다 숨진 사람들임을 강조했다. 사설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순 없으나, 정말이지 꼭 누구인지 알아내어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무려 다섯 명이나 불에 타 죽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이 죽은 일이었다. 정파적 입장을 떠나서, 사람들이 죽은 자리에, 죽은 사람들이 떠나는 자리에, 꼭 그런 말들을 쏟아내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예의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과연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인가를 묻는 질문이다.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용산참사에 관련된 법정에 꼬박꼬박 참석한 어느 한 후배작가의 글을 보면, 용산역세권 재개발로 인해 발생하는 건설사의 이익은 일조 사천억원이고, 조합원의 이익은 천팔백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막대한 이익을 위해서 권리금과 시설투자비 포함 이억 육천만원이 투자된 음식점 주인에겐 이주보상비로 오천만원이 나왔고, 일억 이천만원이 들어간 중국집 주인에겐 육천만원을 주겠으니 나가라고 했단다. 엊그제까지 평범한 중국집 주인이었고, 갈비집 주인이었던,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들은 그래서 이름도 생경한 '전철연'에 가입했고, 아내의 귀를 때려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배를 걷어차는, 깡패용역들에 맞서 망루에 올라갔다. 그들이 사고(이 단어는 쓰고 싶지 않으나, 참고 쓴다)로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그 죽음이 억울해, 희생자들을 냉동고에 보관한 채 일 년 남짓 거리에서 싸워왔다. 그리고 끝내, 어쩌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재개발조합 측과 합의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잃고 롤빵을 세 개나 먹은 소설 속 엄마와는 같을 수 없겠지만, 유가족들이 받은 합의금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어떤 비릿한 아픔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과연 '떼를 써서' 받은 돈처럼 보이는가? 그 돈이 과연 금액으로, 1인당 얼마 하는 식으로, 셈할 수 있는 돈으로 보이는가?우리가 어느 한 사건, 어느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건 속으로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그 노력 다음에, 우리는 어렵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사람이 죽었을 땐 특히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때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일이기 때문이다./이기호(소설가광주대 문예창작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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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15 23:02

[금요칼럼] 타이거 우즈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전용배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성추문은 2009년 연말 지구촌을 강타한 최대의 가십이었다. 적나라한 사생활 폭로로 한 인간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시각은 극히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을 뿐 모든 것이 노출되어, 그동안 쌓아왔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라는 찬사를 들었던 타이거 우즈는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 단순한 개인의 일탈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함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판단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타이거 우즈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현역시절 도박과 여자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도박은 중독수준이었다. 그 이외에도 세계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스포츠스타들 중에는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사례가 적지 않다. 결론은 극심한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이다. 연예계, 정계, 스포츠계는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 곳이다. 즉 승자독식구조이다. 승자독식구조는 참가선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승리 아니면 죽음을 다오'이다. 승리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일시적으로 안겨주긴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달콤한 열매'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끝없는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연예계 스타는 '자살의 그림자'가, 스포츠 스타는 '일탈의 그림자'가, 주목받는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의 그림자'가 운명처럼 드리워져 있다. 최고가 아니면 용서가 되지 않는 환경이 이들을 자극한다.원래 스포츠는 단순한 놀이에서 출발했다. 근대 유럽에서 발전한 스포츠는 '유희성'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오락이나 재미와 관련이 깊다. 이러한 스포츠가 미국에 전파되면서 새롭게 탄생했다. '경쟁성'이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세계질서를 장악하면서, 스포츠의 '경쟁성'은 미국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물론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는 하지만, 스포츠는 미국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무한경쟁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경쟁력 있는 '스포츠 영웅'의 출현이었다. 영웅이 없는 오늘날 유일하게 영웅대접을 받는 것이 스포츠스타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들은 영웅이 아니라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생존해야하는 나약한 인간 일뿐이다.타이거 우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에 '페인 스튜어트 사건'이 있다. 니커보커스 복장에 중절모가 트레이드마크인 페인 스튜어트는 1999년 여름 US 오픈에서 우승하고, 그해 가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협회는 PGA선수권대회의 일정을 조정하여 참가 선수들이 조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모든 선수들이 플로리다 주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타이거 우즈만 빠졌다. 장례식후 치러진 PGA 선수권대회에서 타이거 우즈는 당당하게 우승하고 개인적으로 묘소를 참배했다. 타이거 우즈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회를 앞두고 스튜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보편적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지만, 극심한 경쟁이 상존하는 스포츠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원하는 건, 현실에서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경쟁은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았는데도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 밤 타이거 우즈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브레히트의 시(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살아남은 것이고, 누가 살아남지 못한 것인가. 과연 이것이 타이거 우즈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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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8 23:02

[금요칼럼] 도시의 산소 탱크, 가로수 터널 - 전상국

지난 18일 폐막한 덴마크 코펜하겐의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 총회는 130여 나라 정상들이 참여한 그 규모면에서나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세계의 환경운동가들 수만 명이 매일 회의장 밖에서 벌인 환경 관련 시위만으로도 지구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두 번째 지구는 없다' '말만 하지 말고 지금 행동하라' '부자 나라는 기후변화의 빚을 갚아라' 등의 시위 구호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행동하는 양심,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의 마지막 희망 메시지, 그 절규만 같았다.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높은 굴뚝을 쳐다보며 우려했던, 인간 스스로 자초한 지구의 재난, 곧 인류의 멸망을 예언하는 여러 징후들은 남극 대륙의 빙하가 녹으면서 생기는 해수면의 상승 수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무 심는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다든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는 그 식재가 쉽지 않던, 주렁주렁 열매를 단 감나무들을 보면서 어찌 기후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지구 온난화에 대비한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은 현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앞 다투어 벌이고 있는 갖가지 온실가스 감축을 통한 각종 녹색성장 사업이야말로 지구 살리기는 물론 그것이 곧바로 우리 모두의 건강과 복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녹색은 색체 구분으로 볼 때 안전진행구급구호 등을 뜻하는 안전색체로 통한다. 더 넓게 우리는 살아 있는 자연만을 녹색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녹색이 곧 생명이며 그 구원이라는 것을 뜻한다,그 녹색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녹지의 걷잡을 수 없는 도시화는 물론 골프장 등 산림의 난개발로 수십 년 된 나무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구호가 왜 그리도 허황된 말로 들리는지. 자동차 한 대가 한 달 동안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8백 그루 이상의 잣나무를 심어야 한다니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산 나무들의 그 주검이 어찌 예사로 보이겠는가.온실가스 배출 그 공해를 줄이기 위한 답은 처음부터 있었다. 나무가, 숲이, 자연이 그 그을음을 정화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이룬 저 숲이 바로 녹색 생명, 산소 탱크라는 사실.모든 나무는 인간이 해치지 않는 한 인간보다 몇 배 더 긴 시간을 이 지구에 머물면서 묵묵히 지구를 정화할 것이다. 마을의 한 그루 정자나무는 수백 년 동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됐음은 물론 그 마을 사람들의 삶을 정화하는 신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수백 년 나이의 고목들이 터널을 이룬 파리 등 유럽 여러 도시의 가로수 거리를 생각한다. 청주의 관문인 플라타너스 터널 길을 지나면서 그 가로수를 지켜낸 이들의 위대한 승리를 생각한다. 무더운 도시라는 오명을 안고 있던 대구가 푸른 도시 가꾸기로 온도를 낮춘, 담 없는 건물들과 하나가 된 근린공원이며 가로수길 등 도시의 그 숲을 걸으며 놀라고 놀란다. 경주의 보문단지 가로수 길을 차로 달리면서 새삼스레 고도의 자연을 예찬한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 벚나무 아치로 도심 속의 숲을 가진 진해하동 등 가로수 터널을 가진 도시들을 지날 때마다 그 속에 사는 시민들이 달리 보였다.그러나 이 겨울 터널은커녕 가지들이 모두 뭉툭 잘려나간 채 그 나무줄기만 앙상한 고목 가로수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녹색 성장에 역행하는 검은 그을음 살리기를 저지르고 있는 여러 도시의 가로수 관리를 고발한다. 고목 한 그루가 전봇대 수십만 개보다 몇 배 더 효용가치가 크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인가. 나무들이 그 수난 속에서도 저처럼 거대한 고목이 될 때까지 전깃줄을 땅 속에 묻을 생각도 못한 관리들의 그 무능을 나무의 이름으로 성토한다.지구 기후 변화의 주범, 온실 가스 배출 피해를 줄이는 가장 가까운 길, 산과 물이 도심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도시의 숲, 가로수 터널로 녹색도시를 디자인하자./전상국(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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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25 23:02

[금요칼럼] 해가 바뀔 때면 드는 생각 - 윤방부

필자가 제일 싫어하는 글은 마치 수도사 같고, 설교투의 글이다. 참으로 역겹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번 글은 바로 이런 류의 칼럼이라서 독자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이해하기를 바라며.미국유학시절 미네소타 대학에서 전문의 과정을 보낼 때 이야기다. 병원의 입원환자를 보면서 깜짝깜짝 놀란 것은 한국사람이 꽤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회진할 때 누워있는 환자가 영락없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위 Native American(미국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인디언들이었다. 정말 너무나 똑같이 생겼다. 가끔 병원 백인의사친구들이 나를 Are you native American? 이라고 물을 정도였다. 인디안 마을에 관광을 가서 보니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게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11월이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싱싱하던 자연의 모든 생명 현상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때를 가리켜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니 참 재미있다.우리는 해가 바뀔 때가 되면, 지난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과거가 모두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그저 흘러가 버리기만 하는 것일까?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 시간은 분명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 아름다운 추억, 슬픈 기억, 아쉬움, 새로운 희망을 뿌려놓고 간다.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지난 일년의 다사다난했던 일들이 없다면 다가 올 새해의 꿈도 없는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숲은 보면서도 그 속에서 지난 시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다가 올 봄의 새싹을 미리 내다볼 줄 알았던 지혜로운 인디언들처럼, 시간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도 좀 더 겸허해지면 좋겠다.언제부턴가 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획이나 희망을 세우기 전에 현재 내게 남아있는 것들을 먼저 돌아보게 된다. 한때는 나도 현재의 나를 돌아보기 전에 내일의 나를 꿈꾸는 일에 바빴다. '새해에는 이런 일을 해야지', '새해에는 꼭 이걸 이루어야겠다' 등등 무언가는 채우고, 더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앞으로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이 눈에 더 띄었다. 집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자꾸만 내게 부족한 것들을 먼저 생각했다.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보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아끼고 살아가는 일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요즘은 해가 바뀔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았을까? 지금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버려 할 것은 무언일까? 이런 생각들을 곰곰이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 앞에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욕심이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 GAMZU YAVOR - This too shall pass!!벌써 2009년도 지나가는구나!새옹지마 - 새처럼 옹졸하게 지랄하지 마라!Spero Spera -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이해인 시인의 "한 해를 뒤로 보내며" 몇 구절을 옮기며.한 해를 뒤로 보내며 / 이해인우리가 가장 믿어야 할 이들의무책임과 불성실과 끝없는 욕심으로집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무너져 슬펐던 한 해한 해의 마지막 달인12월의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나요?사랑과 기도의 삶은 뿌리를 내렸나요?감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남에겐 좋은 말도 많이 하고더러는 좋은 일도 했지만바쁜 것을 핑계로일상의 기쁨들을 놓치고 살며혼자서도 얼굴을 붉히는 제게조금만 더 용기를 주십시오다시 시작할 지혜를 주십시오.한 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저녁놀을 바라보는 겸허함으로 /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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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8 23:02

[금요칼럼]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 전용배

고교시절 기억하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몇 년 앞두고 스포츠시설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던 시절.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시민운동장 담을 넘어 봄 정취를 사진에 담고자 했던 필자는 경비에 발각되어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 보안과에 넘겨졌다. 어린고교생에게 고문은 없었지만, 하루꼬박 걸린 담당형사의 모욕적인 수사방식은 지금도 치욕으로 남아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헌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원칙이 최소한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한국정치를 항상 비아냥거리고 난도질하지만 아시아국가 중에서는 민주주의 지수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보다 경제적 양극화와 불균형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 거대언론사와 중소언론사, 서울지역대학과 지방대학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부는 그래도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구호라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구호조차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선진국 운운하는 것은 레토릭에 불과하다.기득권과 거대보수언론사들은 세종시로 일부 정부부처가 옮겨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수도가 분할된다느니, 효율성이 떨어진다느니 하면서 떠들고 있지만 실상은 '서울공화국'이 유지되어야 배를 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구상 어느 국가가 수도에 이렇게 국부(國富)가 집중되어 있는지. 미국, 일본, 중국,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도와 지방간의 극심한 불균형에 대해 어떤 해답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넘어 한 국가의 모든 명문대학이 한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지방 사람들이 기대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지방경제는 오래전부터 근간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방송사와 언론사 중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광고가 중요한 수입원이 되는 곳도 있다. 광고할 기업이 지방에는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울의 거대보수언론사들은 용비어천가만 부르고 있다. '한국경제, 회복속도가 빠르다', '더블 딥,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다', '올해 플러스성장 가능'등.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어떠한 팩트를 적용시키느냐다. 2009년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호의적으로 추정해서도 0.25%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중국은 9%대이다. 주가, 국민소득, 외환보유고는 참여정부시절보다도 못하다. 반면에 외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부패지수와 개인의 자유도는 매년 추락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 평균 경제성장률 4.4% 기록한 참여정부를 '경제파탄 정부',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집권당과 거대보수언론은 지금의 정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옳은가. 국어사전에서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힘들 것이다.참여정부가 고성장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도 서민들의 삶은 팍팍했고 힘들었다. 그래도 참여정부는 실천은 못했지만, 추구하는 지향점이 있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현 정부는 조금은 솔직해져야 한다. '서울공화국'의 기득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거대보수언론사의 눈 밖에 나면 정권재창출이 안된다고.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역학구도 상, 지방민이 단결하기 힘들지만 언제까지 침묵할지는 알 수 없다. 국가마저 자본과 기득권의 논리에 지배된다면, 국민들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방민은 영원한 3류 국민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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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1 23:02

[금요칼럼] 실용정부와 녹색성장 정부 - 한정호

정부나 회사나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체는 좋은 정체성 (Identity)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가 일 잘하고 회사가 돈 잘 벌면 되지 무슨 정체성이 필요하냐고 반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조직체 경영에 있어 정체성은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무엇하는 사람들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해 창조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조직은 저마다의 역사와 개성과 문화가 있기 미련이며 이를 반죽시킨 것이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없으면 조직은 오래가지 못하고 힘을 극대화 시키기 힘들다. 좋은 조직은 자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을 담합시키며 환경에 반응한다.조직체 정체성의 전문가인 로렌스 애커먼은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을 위한 7가지 조건을 설명한다. 첫째는 실존성이다. 조직체는 마치 사람 같아서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나름대로의 조직의 존재가치를 추구해야 이 문제가 풀린다. 둘째는 개별성이다. 다른 조직체와 달라야 한다. 사람도 모두 다르듯이 조직도 자기 만의 특색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일관성이다. 창업이나 출범 때부터 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아무리 조직체가 변해도 면면이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 의지이다. 정체성은 앞으로 이 조직체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가능성이다.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실 정체성 자체가 미래지향적이다. 여섯째는 관계성이다. 정체성에 의해 조직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다르게 설정이 되어야 한다. 조직체가 좋은 정체성을 가지면 아래, 위, 옆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만난다. 마지막은 이해성이다. 조직체의 정체성이 남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체성도 너무 복잡하거나 애매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실패한다.뚜렷하고도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은 조직체 관리의 효율성을 최대화시킨다. 인사, 행정, 재무, 기획의 여러 정책들이 흩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며 정책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명백하게 해준다. 정체성이라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해도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쉽게 나타낼 수 있다.정부의 경우 정체성은 한 정권이 다른 정권과 달리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나를 보여준다. 그 정권다운 특성으로 목표를 세우고 사람들을 결집하고 색깔을 드러낸다. 정부의 정체성의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의 리더십은 바로 정체성의 발현이다. 대통령이 행하는 인사, 이벤트, 사업, 발언, 정책, 대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좋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궤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MB정부는 4대강 살리기, 세종도시, 자원외교, G20 회의, 녹색 성장, 서민정책 등 수 많은 사업들을 계획, 추진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이 모든 것을 잇는 무언가의 축이 느껴져야 한다. 그 축이 무언지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좋은 정체성을 가지면 자연스레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름이 붙여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러한 뚜렷한 정체성이 대통령의 머리와 마음 속에 있는가하는 것이다.MB 정부는 스스로를 실용정부라고 부르고 이를 정부의 정체성으로 주장하며 자기변호를 열심히 했다. 아마도 과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상응하는 정부의 정체성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체성으로 그 정부의 이름을 불러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MB 정부는 스스로를 실용정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리낄 필요는 없다. 실용정부는 괜찮은 이름이다. 이대통령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 실용주의의 철학은 이념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으로 부터의 탈피를 강조하고 실제 (practice)적 성과를 강조하는 이른바 존듀이의 실용주의 (pragmatism) 노선을 따르는 것인데 실용정부는 이러한 정신을 높이 사는 것으로 설명하면 된다. 그러나 실용정부에서 말하는 실용은 스타일이지 정체성은 아니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실용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좋으나 자신의 통치의 정체성을 실용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도데체 실용이라는 축으로 지금과 미래의 사업과 정책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그런 면에서 MB정부의 정체성은 차라리 녹색성장정부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비록 외교나 국방, 안보면에서 설명력이 떨어지나 사업과 정책의 중점을 환경과 인간을 강조하는 질적성장으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실용정부보다는 훨씬 나은 정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다만 녹색성장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더 이상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서민을 중요시 여기는 인본주의와 과학기술에 바탕한 환경주의. "나는 한국적 녹색성장의 주춧돌을 놓는 사람"이라는 개인적 정체성이 "실용주의 정부의 책임자"보다 더 낫다고 본다. 이제집권 2년이 되어 가는 마당에 굳이 정권의 이름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용주의 정부는 MB정부의 일하는 스타일을 명명하는 것으로 역할이 충분하다. 대통령의 머리와 마음 속에 자신 있게 형성한 정체성이 있으면 된다. 그 정체성이 성공적인 것이면 이 정부가 끝날 때 쯤 멋있는 이름을 언론들이 붙여줄 것이다. 현재까지 내 놓은 것으로는 "녹색성장정부"가 제일 좋다./한정호(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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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04 23:02

[금요칼럼] 아이들, 정보의 노예로 키울 것인가 - 전상국

'알아야 도둑질도 한다.' 는 속담이 있듯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교육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표어는 우리네 교육열을 세계 최고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그러나 '모르는 것이 상팔자다.' 혹은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종이다.' 등 때로 그 앎이 불러올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불편함을 넌지시 경계하는 속담도 꽤 있다.아는 것이 병이 되지 않기 위해 알 것을 제대로 가려 알자는 이런 뜻의 말이야말로 정보화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가 새겨들을 만하다.정보가 한 개인이나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 한다. 국어사전은 정보란 낱말을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된 데이터를 실제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해석하고 정리한 지식이나 그 자료.'로 정의하고 있다.정보는 내가 앞서가기 위해 상대방에 대해 아는 일이며 무엇을 미리 헤아려 짐작하거나 그 중 어떤 것을 가려 뽑기 위한 판단의 결정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예측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 그 성찰과 판단을 흐리게 하는 정보로 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결정적으로 훼방 놓는 그런 정보를 우리는 잡음정보라 일컫는다.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유용하고 그 쓰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재빨리 알아내는 정보 마인드를 유연하게 작동시키는 것이 유익정보라면 잡음정보는 오히려 그 촉수를 마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유익정보도 그것이 너무 넘칠 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감당하기 힘든 그 정보에 완전히 함몰되어 생각의 갈피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정보의 홍수, 정보의 공해가 정보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그 무한량의 정보 온라인화 앞에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완전히 기가 죽었다. 무섭게 진화하면서 오직 빠른 기능만을 필요로 하는 첨단 기기 앞에서 사람들의 사고력은 점점 위축되거나 황폐화하고 있다.특히 정보는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누구보다 먼저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허겁지겁 마구잡이로 주워들으면서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특히 속도는 생각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남들을 따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남들 흉내만 내고 있을 뿐 자기 생각, 자기 인생을 깡그리 잃어버리게 된다.서구 선진국에서 어린이들의 인터넷 사용이나 그 속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남들이 아는 것, 가진 것을 그와 똑 같이 갖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남들의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아직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 마음의 안정, 그 여유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어른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 규제가 가능할 것이다.제대로 된 정보화 사회는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잡음정보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어른들을 필요로 한다. 나이 많은 사람도 무엇이 유익한 것이고 무엇이 잡음인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직 판단력이 제대로 잡히기 않은 아이들이야말로 정보의 홍수, 그 잡음정보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아이 기죽이지 않겠다고 값비싼 휴대폰을 손에 들려주고, 몇 시간이고 인터넷 앞에 죽치고 있는 얼빠진 아이를 천재 났다고 자랑하는 어른들이 아닌, 진정으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런 어른들이 나설 때다.정말 필요한 지식 정보를 얻기 위해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상혼이 낄낄거리고 있는 게임 위주의 인터넷 사용은 마약 중독보다 더 나쁘다.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아이들의 창의력과 올바른 생각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 백해무익한 잡음정보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다.종이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그 나이에 벌써 자기만의 생각 찾기, 그런 마음의 여유로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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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27 23:02

[금요칼럼] '영감님의 증거' - 윤방부

전세계 80세 이상의인구가 2050년에는 30명당 1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도 노인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한국도 곧 노인왕국이 될 것 이라고 한다.얼마 전 헬스클럽에서 가끔 만나던 분들과 골프를 쳤다. "윤 교수님과 골프 한번 쳐보는 게 소원" 이라며 하도 익살을 부리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그런데 골프를 치는 내내 그들은 서로를 '김 영감' '이 노인'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다들 사회에서 한자리 하는 분들이니, 평소에는 '이 사장님' '김 이사님'으로 통했을 텐데 그날은 장난기가 발동해서인지 마치 노인정에서 만난 노인들처럼 서로 영감, 노인 하며 재미있어했다.나도 그날만큼은 '윤 영감'으로 통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이 싫지 않았다. 이젠 나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영감이란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따지고 보면 나도 영락없이 영감이다. 이미 손자 손녀가 있고 환갑도 지났으니 할아버지가 아닌가. 조선시대 같으면 이미 황천객이 되어 제사상 받을 나이이고, 1950년대만 해도 틀림없이 뒷방 늙은이가 되었어야 할 나이이다.그날 골프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하고많은 호칭 중에 왜 하필이면 '영감'이냐고 물었다. 한 분의 대답이 참 명답이었다."늙었다는 세 가지가 증거가 있는데, 첫 번째 부드러운 것이 딱딱해지고 딱딱한 것이 부드러워지며, 둘째는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안 할 것을 하고, 셋째는 금방 한 얘기는 잊고 3일 전 것은 기억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도 이런 증세가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영감이지요."속으로 꼽아보니, 다행히도 나는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아직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늙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지 않는가.중국의 옛말에도 '하루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도 늙어 쇠하면 걸음이 느려져서 둔한 말이 앞서게 되고, 영웅도 늙으면 보통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새뮤얼 울먼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청춘이란 연령이나 연령이 제한하는 육체가 아니라,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나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대의 청년보다 60대 노인에게서 더 싱싱한 청춘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그러니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가슴속에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과 인생을 헤쳐나가는 용기, 삶을 이끌어가는 강한 힘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젊은 청춘으로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다.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을 늙음에 대한 각자의 철학이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Longfellow)는 비록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지만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밝고 싱그러운 피부를 유지하며 활기찬 노년을 보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비결을 물으니 "정원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이제는 고목이지, 그러나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어 그것이 가능한 건 저 나무도 매일 조금씩 계속 성장하기 때문일세 나도 마찬가지야."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국가에서 주는 경로우대증이 있지만 노인이라는 것이 싫어서 공공 교통기관을 이용할 때 사용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해도 사양하고, 젊은 오빠 또는 아저씨로 불러주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인생은 어차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법이니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다고 그렇게 서러워할 이유는 없다.영감! 이 명칭이야말로 조물주가 수여하는 인생 최고의 훈장이다./윤방부(가천의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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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20 23:02

[금요칼럼] 야구와 축구 그리고 국가정체성 - 전용배

하나의 사물이나 유기적 조직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정체성(Identity)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파악이 어렵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대표적인 구기종목인 야구와 축구도 깊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일단 야구와 축구가 동시에 인기 있는 나라는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미국과 일본을 축으로 하는 야구문화권은 야구가 주류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럽을 거점으로 성장해온 축구문화와 시스템은 유럽의 세계관을 등에 업고 전 세계로 파생되었다.몇 년 전 사이언스지(誌)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스포츠종목가운데 가장 예측 불가능한 종목으로 야구와 축구를 꼽았다. 이 예측불가능성이 오늘날 야구와 축구를 번창시킨 본질적인 요소이다. 먼저 기능적인 메커니즘 관점에서 보면 야구와 축구는 차이가 있다. 축구는 기본적으로 유연성과 예술성을 기저에 두고 있다. 쉽게 말해 천재들이 하는 운동이다. 골 결정력은 노력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 물론 어느 종목이든 스포츠는 '천재'가 유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특히 축구가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현란한 개인기에 유럽은 시스템으로 겨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야구는 게임수가 많은 관계로 '일상의 스포츠'이다. 야구 천재들이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기는 하나 장수하는 경우는 드물다. 야구는 스스로 변하고 관리(Well Organizing)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공부처럼 반복훈련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또한 적응의 스포츠이기에, 정신적인 면이 깊이 영향을 미친다.시스템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야구와 축구는 보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축구는 열린 문화이다. 동네 팀도 세계적인 클럽 팀과 겨룰 수 있는 제도가 구축되어 있다. 프로리그는 승강제를 통해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축구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근본이유는 이 오픈 시스템과 '서민친화적인'요소 때문이다. 또한 축구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 3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도, 축구가 갖고 있는 정치성과 내셔널리즘 때문이다. 반면에 야구는 고비용 구조와 폐쇄성으로 인해 세계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국내리그의 성공을 이루었다. 시장주의와 엘리티시즘을 근간으로 하는 야구는 자본주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편이다. 게임 수가 많은 야구는 구조적으로 오픈 시스템을 취하기 힘들다. 야구와 축구는 각자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번영을 구가했다. 즉 자기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정치적으로는 축구의 오픈 시스템이 사회가치에도 영향을 미친 유럽은 '친서민정책'이 핵심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기회평등과 분배, 증세는 유럽사민주의의 근간이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국가는 전통적으로 좌파정부가 득세했다. 반면에 야구가 득세한 미국과 일본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쟁을 통한 효율성에 초점을 두었기에, 보수주의와 엘리티시즘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상이한 색깔을 가진 야구와 축구가 동시에 인기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은 어떤 색깔과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헌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좌와 우의 공존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사회는 민주적 가치에만 함몰되어 공화(共和)적 가치는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공화적 가치는 무엇인가. 어원과 기원을 따지기 전에, 한마디로 '공공선(公共善)'에 대한 가치규정이다. 무릇 국가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과, 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조직의 이해관계를 절충해야 하는 역사적 운명이 있다. 세종시와 혁신도시가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지방으로 올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공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균형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다. 현 정부는 이 나라가 '민주'그리고 '공화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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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13 23:02

[금요칼럼] 과학적인 공익 캠페인의 절실함 - 한정호

매년 국내 전력소비량을 돈으로 환산하면 30조에 이른다. 산불로 인한 피해액은 한 해 1,200억원에 달하며 음주운전에 의한 사망자수는 매년 6,000여명이며 피해액은 무려 2,100억원이나 된다. AIDS에 의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1,200명에 달하며 1인당 경제적 비용이 4억원으로 추정된다. 흡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9조 가까이 된다. 이 엄청난 손실을 줄일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문제들의 공통점은 법적인 조치로는 한계가 있으며 개개인의 자각이나 참여 없이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도와 정책은 강제로만 규정하기에 한계에 이른다. 때로는 벌금으로, 때로는 형벌로, 때로는 포상으로 해결해보려 하지만 한계가 있다. 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서 동기를 부여받거나 사회적인 이득을 위해 자발적인 협력을 보여야만 이루어진다.이러한 공익적 손실문제나 목표달성을 해결하는 데는 3E의 조치단계가 있다. 첫 번째 E는 Enforcement로 법적인 강압조치이다. 둘째는 Engineering으로 기술적인 차원에서의 조치이다. 셋째는 Education으로 교육적인 조치이다. 산불방지를 예로 들면 법적인 조치는 산 근처에서라도 흡연을 하면 과중한 벌금을 부가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기술적 조치는 안전한 곳에 캠프촌을 만들어 준다든가 산불이 나기 쉬운 진입로는 폐쇄조치를 하는 것이다. 교육적 조치는 효과적인 산불방지 캠페인이나 계몽교육을 전국적으로 벌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인 조치와 기술적인 조치는 그런대로 강한 편이다. 음주, 흡연, 산불 안전벨트 등에 대한 법적인 규제와 기술적인 조치만 해도 괄목할만한 수준의 강화나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적인 면, 즉, 계몽과 공익 캠페인의 수준은 그러하지 못하다. 선진국에 비해 두드러지게 낙후하다. 과학적인 조사나 이론 없이 마구잡이식 구호가 난무할 뿐이다. 가장 눈에 많이 뜨이는 교통안전의 예를 들면 전국도로나 고속도로에는 아직도 "쉬어가요 졸음운전, 두고 가요 음주운전 "식의 4, 4조 구호가 대부분을 이룬다. 어떤 표현이나 소구방법, 전략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진지한 고려는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이 문제를 과학적 이론과 조사연구와 결부시켜보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학문적으로도 이 분야는 낙후하다. 심리학, 마케팅학, 커뮤니케이션학, 광고홍보학, 사회학 등 관련분야에서 간헐적으로 연구가 나오고 있기는 하나 매우 빈약하다. 정부에서는 해당 이슈에 따라 표어 공모전을 벌이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학적 접근의 가장 좋은 예는 공익 캠페인에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는 시도이다. 이른바 마케팅 이론의 핵심인 제품 (product), 가격 (price), 장소 (place), 촉진 (promotion)의 4P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개발도상국의 경우 AIDS방지를 위해 콘돔보급을 확산시키기 위해 먼저 콘돔을 여러 가지 색상으로 제작했으며 (product), 편의점에서도 쉽게 콘돔을 구할 수 있도록 했다 (place). 정부에서 보조하여 콘돔의 가격을 낮추고 (price) 인기가수의 노래를 통해 사랑의 책임을 강조 하도록 했다(promotion). 미국의 스모키 베어 (Smokey Bear) 캠페인은 1950년 산불로 화상을 입어 연기에 그을은 새끼곰의 상징을 이용하여 60년째 지속되고 있는 공익캠페인으로 매우 다양한 교육과 이벤트가 전략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은 과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하다는 것이다. 감각에 의존하지 말고 실증적인 조사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강에다 불법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공익광고를 보면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들도 쓰레기를 강에 버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산불방지를 위해 맥과이어 같은 학자들은 무려 16가지 인식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밤에 동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산이 인간들의 심신단련장이 아니라 동물들의 마을과 같은 곳이라는 인식을 주는가 하면 (마을에 어떻게 불을 지르나!) 산불을 방지하는 행동자체를 짜증스런 일이 아닌 스릴과 도전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방법은 마치 기업의 브랜드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듯 다양하며 큰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공익 캠페인에 거는 일반인의 기대는 대체적으로 미미하지만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공익캠페인 전문가들은 효과적인 에너지 전략 캠페인으로 5%의 절약목표를 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조 5천억의 거금이며 같은 목표치를 적용하면 음주운전의 경우 한 해에 300명의 목숨을 구한다. 60억원의 산불피해를 줄인다. 공익캠페인의 비용은 법적인 조치나 기술적인 조치에 비해 훨씬 적다. 운이 좋으면 히트한 공익광고 하나로도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과학과 전략의 영역이다. 소득수준의 증대로 복지가 향상되면 공익 캠페인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암과의 전쟁, 자연보호, 산성비 피해 줄이기, 낙태 줄이기, 청소년 음주 방지, 대중교통 이용하기, 안전벨트 착용하기, 비만예방조치 등 수 많은 사회적 과제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이를 위해서는 결국 법적인 강제조치는 최소수준에 머물고 많은 부분이 공익캠페인에 의존하게 된다. 이제 OECD 국으로서의 면모를 살려 과학적인 공익캠페인의 개발과 지원에 눈을 돌려야 한다./한정호(연세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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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06 23:02

[금요칼럼] 고령화사회, 나잇값하기 - 전상국

기차역 기다림방에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매표구 역무원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역무원이 뭔가 정중히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계속 자기 할 소리만 거친 욕설을 섞어 내쏟았다. 그 소동을 구경하던 젊은이 하나가 혼잣소리하듯 말했다. 나잇값 좀 하시지.'나잇값'은 그 연륜에 비해 행실이 좀 가볍거나 덤벙대는 사람을 질책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나잇값, 나잇살-. 젊은 사람보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을 겨냥해 낮잡아 쓰는 말이라 바야흐로 고령화 사회의 노인 깔보기 키워드가 됨직하다.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7%, 곧 인구 열 사람 중 한 명이 나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라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하는 생산 가능인구 수도 10년 전 10.4명에서 올해 6.8 명으로 대폭 줄어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고령 인구가 증가하는 원인인 사망률 감소는 노인들이 자나 깨나 자신의 건강관리에 철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몸이 건강하다고 모두 나이대접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몸은 씽씽 건강한데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건강한 몸에 비해 마음 건강이 신통치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와 달리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몸까지 병약해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사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음이 건강한 이들만이 누리고 사는 복이다.고령화 사회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사는 길은 오직 자기 절제의 겸허와 행실의 부드러움으로 그 나잇살에 걸맞은 나잇값을 하며 사는 일일 것이다. 고령화 사회, 노인들을 위한 각종 복지 정책과 시설 갖추기도 중요하지만 그런 복지 혜택을 주문하고 누리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자격 갖추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어려운 시대, 어른 모시고 자식들 위해 헌신하며 열심히 살아온, 그 공든 탑을 깡그리 허물어 내고야 세상을 뜨는 그런 어쩔 수 없는 늘그막의 비애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늙은 자기를 왜 그처럼 가까이 하기를 저어하는가를 아는 일이다.내가 네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 공치사하기. 그 불편한 심기가 불쑥 치밀면 불 같이 화내기.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기.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냅다 무지르는 고집불통. 고집은 늙은이 병중 가장 더러운 것이다. 게다가 귀까지 어두우니 남의 얘긴 아랑곳없이 자기 목소리만 점점 높아질 밖에. 감투 벗은 지 오랜 뒤에도 그 감투 위세하며 살기. 내가 잘 나갈 때 그 놈이 날 찾아와서는, 집에 금송아지 키우던 그 놈의 왕년 병은 현재의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마음 불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로 그 말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가소로움에다 깊은 연민까지 불러일으킬 뿐이다.나이 먹을수록 마음속에 생기는 갖가지 마음 불편함을 스스로 덜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를 원망하는 일도, 무시당해 화가 나는 일도, 자기 말이 안 통하는 그 울화도 모두 자신의 마음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새벽안개 속에 두부 배달을 하는 등 그 나이에도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인들의 밝은 얼굴. 어린이 놀이터나 길가에 다니며 비닐주머니에 휴지를 줍고 있는 팔십 노인의 근면, 안녕하세요, 이웃 사람들한테 언제나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 할머니의 곱게 늙어가는 모습, 이 모두가 건강한 마음으로 나잇값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얘들아, 조용히 해! 지금 할아버지 책 읽고 계셔.할아버지 할머니의 책 읽고 있는 모습, 이런 것이 진짜 가정교육일 터.나이대접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잇값을 하는 그 즐거움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얻어질 것이다.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이 나이쯤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면서도 그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굳어진 행실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쌓아놓은 것도 없으니 허물어질 것도 없다는 체념의 비애, 그 자위가 고작일 뿐.문제는 고령화 사회를 넘어 나잇값을 하며 살기가 지금보다 몇 배 더 어려울 것이 분명한 고령사회의 주인공인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다.'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젊어서 덕을 쌓지 않으면 늙어죽을 때 고기 없는 빈 연못을 지키는 따오기처럼 쓸쓸하게 죽는다./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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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30 23:02

[금요칼럼] 대학총장 선거제 폐지하자 - 윤방부

몇 년전 일이다. 집사람이 여자들 모임에 갔다 와서 묻는다. "혹시 당신 학교에 총장후보자로 나온 사람들 알고 있어요?" 아니, 잘 모르는데. 사실 오늘 여자 몇 명이 모이는 모임에 갔다가 좀 황당한 일을 당해서 그래요. 뭔데. 어느 부인을 소개 하는데 이번에 모 대학 총장 후보였던 000 교수의 부인이라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래도 꽤 이름깨나 있는 교수니까 여자들 모임에서 기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면서 참 희한한 소개라고 한적이 있다. 최근 청문회를 통해서 난도질 당한 전직 대학총장이 있다. 어느 신문에서 하도 거짓과 허위가 많아 가면 갈수록 문제가 생겨 "양파"라고 불리기도 하고 재직시에 하도 외부기관과 단체의 자문, 고문 등등을 많이 맡아서 "고문총장" 등등의 별명이 있다. 우선 안타까운 일이다. 명색이 필자도 대학교수생활 40년이고, 작지만 알뜰한 대학의 부총장직을 맡고 있으며 나 자신도 대학교수 평균 보다는 아주 많게 각종사회단체의 장, 고문, 이사 등등을 맡고 있어서 솔직히 이런 글을 써야 할까? 망설여 지기도 한다. 그러나 각종매스컴에서 또 사적으로 참여하고 만나는 모임에서 대학총장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편견을 감지 할 수 있고 더구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유명했던 S대 윤일선 총장, Y대의 백 낙준, K대의 유진오 총장의 이미지와 개념으로 소위 대학총장이라는 직책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또 역시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추억, 경험, 기회의 잣대로 생각하는 것을 정말 때로는 심각하게, 또 시세말로 뼈저리게 느껴서 이 칼럼을 쓴다. 노태우정권때 6.29선언이 나오면서 선거만능주의가 탄생되었다. 무조건 선거로, 직선제로 결판내자는 사회풍조가 그때부터 만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도 선거로 결정하자는 말이 있었을 정도니까? 이러한 사회풍조에 가장 보수적으로 대응해야 할 대학의 교수사회가 가장 재빠르게 대응하는 집단으로 변하였다. 그때 나온 것이 교수협의체인 현재의 교수평의회였다. 쉽게 말해 교수들의 모임 체를 만들어 학교행정 내지는 경영 등등에 참여하자는 취지의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나온 의견중의 하나가 총장선거를 교수들이 직접하자는" 총장직선제가" 탄생되었다. 마치 그 동안 총장직선제가 없어서 학교발전이 안된 것처럼그 동안 국립대학교는 정부에서, 사립대학교는 이사회에서 총장을 선임하는 방식이었다. 하여튼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총장>이라는 감투가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총장선거가 시행 되었다. 총장이 교수들의 선거로 결정되다 보니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이 제도를 이용해서 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총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교수들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인맥을 동원하고, 학맥을 동원하고, 출신지역을 동원하고, 전공분야, 대학별로 동원되고, 선거본부가 생겨서 투표작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선거방식을 꼭 빼 닮고, 더러는 배운 게 있으니까 선거방식을 더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일례로 호텔에 선거본부를 차리고, 예산을 쓰고, 또 각급 단위 별로 조직책을 선정하여 선거전략을,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또 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고, 때로는 금품 제공, 골프접대, 식사접대 등이 자행되는가 하면, 연설회 때 박수부대 동원하고, 때로는 오직 선거에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는 거의 단말마적 행위를 자행하여 눈살을 찌프리게도 하였고. 또한 총장선거제도가 생기니까 너도나도 미래 지향적으로 언젠가는 한번 당선되겠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출마하여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하여 10년 만에 당선된 사람도 있었다. 또 선거가 끝나고도 계속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고 계속 승리한 측과 패배한 측이 세상에서 생각할 모든 짓거리를 과감히(?)실행하여서 개인의 사생활까지 파고들어 들추어 내기도 하였다. 또 당선된 측은 자기들 측만 소위 학교보직을 싹쓸이하여 임명하는 등등 한마디로 흔히 사회에서의 각급, 각종선거에서 보는 모든 방법이 가감 없이, 어떤 경우는 한 수 더 떠서 소위 '지성인' 이라고 하는 교수들의 선거 <총장 직선제>가 그 동안 시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일부 뜻있는 교수들과, 비교적 나이 들고 보수적인 교수들은 총장선거제 뿐 아니라 학내 선거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중단할 것을 생각했고 요구했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투표하여 뽑아야지만 이사회의 눈치를 안 본다든지 또 학교가 발전되고, 교권이 확립된다는 교수들의 반론과, 특히 젊은 층 교수들의 생각도 만만치 않다 보니 지금까지 <총장선거제도> 등 학내선거가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거제도에 어떤 종류의 교수가 출마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소위 대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는 교수들은 능력이 없어서인지(?) 또는 혐오감을 느껴 출마하지 않게 되었고 흔히 교수들 중 사회성 있고, 명예욕 있고, 또 가장 정치성이 있으며 나아가 정계나 행정부의 진출을 원하는 다시 말해 <총장>직위를 이러한 곳에 자의든 타의든 연결시키기를 원하거나 연결이 가능한 교수들이 출마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거제도를 통한 총장은 흔히 우리가 머릿속에, 추억 속에 그려있거나 그리고 있는 예전 총장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확신한다. 그 동안 유수한 대학교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총장이 됐던 분들이 정계에, 행정 계에 진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본인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게는 개인을 위해서나 출신대학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이번에 또 한 명의 대학총장 출신이 정계에 진출 하였다. 아직도 언론과 국민들은 선거제도에 의한 대학총장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언론에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대학총장이 운운" 되는 것을 보니.「대학총장선거」라는 허울 좋은 명칭 하에 펼쳐지는 창피스럽고 한심한 총장선거제도 이제는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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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23 23:02

[금요칼럼]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 전용배

직장 때문에 부산에 거주한지 거의 6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곳 사람들의 야구 사랑이다. 집착에 가까운 야구 사랑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여러 갈래로 해석해 보려하지만 쉽지 않다. 본질적으로 스포츠는 허구(虛構)의 세계이다.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재미나 오락적요소가 있다고 여기지는 영역들은 자세히 보면 예외 없이 허구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이러한 세계에 쉽게 몰입하는 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현실을 직시하는 기성세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들해진다. 순수한 감정이 사라지면 스포츠나 예술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순수해서 야구에 몰입하는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수많은 이유가 내재되어 있다.엘리스 캐시모어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스포츠, 그 열광의 사회학'에서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를 현대사회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예측가능한 일이 많아 졌으며, 그에 따라 삶은 과거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이다. 즉 삶이 너무 뻔해지다 보니 무언가 자극적인 것이 필요하고, 예측불가능 한 영역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라고 규정하였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편에서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팬들을 향해, 스포츠의 비합리적 낭비성을 질타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스포츠가 가난과 가정불화, 인종차별 또는 기타 현대사회의 어떤 병리현상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스포츠에 열광한다.도대체 스포츠의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는가? 첫째는 도전과 응징이다. 인간의 본성은 도전에 맞서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진화적 적응의 일부이다. 인간이 하나의 종(種)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도전에 맞섰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승부는 도전과 대립 그리고 극적인 결과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공정한 경쟁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적용되고 있다. 문제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실력이 있음에도 좌절하는 경우는 다른 많은 영역에서는 흔하디 흔하다. 세상이 꼭 실력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확한 잣대를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어떤 영역에서든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사파무림(邪派武林)'의 고수는 널려있다. 그러나 적어도 스포츠 세계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많지 않다. 아무리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를 폄하해도, 실력이 있으면 벤치에 머물지 않는다. 관중석의 팬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경기력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는 오게 되어 있다. 그냥 쓰러져간 다른 영역의 '무명용사'와는 확실히 다르다. 셋째는 대리만족이다. 인생과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 스포츠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한 그들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는 것'이 바로 스포츠이다. 때로는 좌절하지만 다행히 스포츠에서는 영원한 패배자가 없기에 언젠가는 승리하게 되어있다. 물론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러한 대리만족은 희망을 상징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일본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는 75년 팀 역사상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직 한번 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열광적인 팬을 거느리고 있으며, 게임당 평균관중이 4만 명이 넘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일본인들도 스포츠 앞에서는 '비이성적'이다. 게임당 2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롯데자이언츠도 성적만 보면 초라하다. 지난 27년 동안 정규리그 1위는 해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팬들은 열광한다. 비록 스포츠가 허구와 비이성의 세계임에는 분명하지만, 적어도 스포츠는 조작이나 편집이 없는 진검승부이다. 우리가 스포츠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는가./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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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16 23:02

[금요칼럼] 유명 브랜드 없는 국가 브랜드 - 한정호

국가브랜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국가브랜드라는 명칭과 개념은 노무현 전대통령시절부터 강조해왔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에서는 정부 출범 후 바로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본격화 했다. 국가브랜드란 무엇인가? 국가이미지와는 무엇이 다르며 국가 신인도 (country risk), 국가 명성 (reputation), 국가 정체성 (identity) 등 유사한 개념과 무엇이 다른가? 국가브랜드를 알려면 우선 브랜드에 대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브랜드는 주로 특정한 상품명에 대한 반응과 평가를 바탕으로 한다. 구찌, 조지 알마니, 나이키라는 브랜드의 이름을 접하면 소비자들은 금방 높은 질과 젊음, 고급, 귀함 등과 같은 좋은 연상을 한다. 브랜드가 된 제품은 남다른 혜택을 누린다. 소비자들은 자신과 잘 맞는 브랜드를 선택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브랜드 충성자들이 생긴다. 소비자들은 브랜드가 된 제품에 대해서는 빨리 구매를 결정하며 위험부담도 쉽게 한다. 고가에도 구매한다. 한 브랜드명으로 다른 제품에도 확산이 가능하다. 나이키라는 슈즈 브랜드로 골프공, 양산, 수영복 등 브랜드확산이 가능하다. 반대로 브랜드, 소위 명품이 되지 못한 제품들은 이 모든 면에서 찬밥신세가 된다.국가브랜드는 한 나라 이름에 대한 세계인들의 반응과 평가를 총칭한다. 이에 반해 국가 신인도는 한 국가에 투자하는데 대한 위험도를 말하며 국가 명성도는 그 국가의 능력에 대한 기대의 정도이다. 국가 정체성은 그 국가가 스스로 내세우는 자기의 위상이다. 국가이미지는 반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국가에 대해 가지는 종합적인 인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브랜드는 매우 경쟁적이며 상업적인 의미가 크다. 국가 명성이 획득하는 것 (earned) 것이라면 국가 브랜드는 쌓아 올리는 것 (build) 이다. 오랜 반복적 노력 끝에 어떤 국가에 대한 외국인들의 유사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Korea 국가브랜드의 값을 올리자는 것이 국가브랜드위원회의 설립 목적이다. 그러나 국가브랜드는 제품과는 달리 너무나 변수가 많다. 관광, 문화, 안보, 외교, 산업 등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된다. USA, France, Japan 등의 초강국 브랜드는 오랜 기간 많은 변수들이 흩어 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잘 발전한 결과이다. 그러나 Korea의 경우는 매우 불리하다. IT 강국과 월드컵의 신화, 박세리의 신화가 무언가를 이룰만하면 북핵과 김정일의 이슈가 강타한다. 한반도의 안보문제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거론된다. 정말이지 이런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뿐이다. 지금까지 잘 사용해온 "Dynamic Korea"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교체를 검토 중이지만 이 개념을 능가하는 좋은 국가브랜드의 컨셉을 만들기 힘들다. 좋은 브랜드이름은 결국 그 브랜드 다운 짓을 계속하는데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구찌는 구찌답고 구찌스러운 짓만 계속했기 때문에 구찌가 된 것이며 나이키는 나이키다운 가치와 나이키만의 행동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키의 브랜드가 된 것이다. Korea는 Korea 다운 짓을 계속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브랜드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브랜드 정체성 (Brand Identity)는 스스로 만들어 내세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브랜드 철학과 브랜드의 이상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Korea의 국가브랜드에서는 전 세계인을 상대로 어떤 한국적 가치나 원칙을 내세우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The Morning Calm) 를 깨고 역동의 나라 (Dynamic Korea)를 택했을 때 이미 국가 브랜드 정체성의 극적인 변화를 천명하고 실천한 것이다. 제 3의 국가 브랜드 정체성의 방향을 찾기 매우 힘들다. 만약 굳이 또 새로운 국가 브랜드 정체성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오랜 기간을 사용할 수 있는 컨셉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나빠서 보완하자는 네거티브 어프로치로 힘들다. 또 하나 우리나라 국가브랜드 설정의 최우선 순위는 산업과 무역이라는 점에 이해를 같이해야 한다. 관광도 중요하고 외교도 좋지만 결국 Korea의 국가브랜드는 국내 기업과 제품의 해외진출과 마케팅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관광과 외교와 문화수출과 산업간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산업적인 측면을 우선해야 한다.그런 측면에서 Korea 국가 브랜드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Korea 제품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세계 500대 명품 브랜드에 한국의 브랜드는 거의 없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G20의 핵심국가라고 하기에는 세계의 소비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알아주는 브랜드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21세기 국가브랜드는 역시 제품브랜드를 통해 자연스레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수출에 모든 것을 거는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제 한국의 삼성, LG, 현대와 같은 재벌기업들의 이름은 바로 기업브랜드이자 제품브랜드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국가브랜드를 높이고 있다. 비록 구찌나 샤넬과 같은 제품브랜드가 없다면 당분간은 LG와 같은 기업브랜드로서 승부하는 것도 좋다.이 모든 일은 기업에 맡겨야 한다. 국가브랜드위원회는 매우 거창하고 그럴듯 하지만 실제 위원회 주도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기업들의 글로벌 활동을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국가브랜드 값을 높여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대통령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일을 국가실천목표로 할 수는 없다. 구찌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 하나라도 만들도록 독려하는 것이 우선이다./한정호(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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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9 23:02

[금요칼럼]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 윤방부

3代가 멸족하려면 국무위원 또는 국무총리가 되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소위 국무위원과 국무총리 등의 국회 청문회에서는 그 후보자의 모든 것이 들추어지고 해부되다 보니 결국 그 동안 감추어져 있던 치부가 노출되어 개인이 쪼개지고 난도질 당할 뿐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언론 등을 통해 개각이 예상되면 항상 짓궂게 전화하는 친지들이 있다. 전화 안 왔어? 무슨전화? 입각하라고 또 장난치는군, "아니야 미국말로 I am serious, 자네 같은 친구는 꼭 한번 입각해서 일해야 하는데" 항상 그 다음말이 나온다. "윤 교수는 군대도 갔다 왔고, 세금도 잘 내고, 자녀들도 속 썩이지 않아서 위장전입도 안 했고 또 부인이 부동산 투기에 소질이 없어서 안 했으니 장관을 시킬 만 한데 왜 개각 때마다 소식이 없는 거요" 그러면서 그래서 명단에 빠지는 것이니 장관이 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위장전입'이라도 한번 해서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또 교회를 바꾸어 다니면 될 텐데 능력이 아깝다고 한다.우리나라에 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0년이다. 이때 국무총리, 대법원장, 감사원장에 대한 청문회 법이 시작되었고, 2003년에는 4대 권력기관장이, 2005년에는 국무위원을 대상으로 하는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뿐이 아니다. 대통력직이 끝난 사람이거나 또는 무슨 의혹사건이 있으면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의 대상은 항상 대상이 될 만한 것도 아닌 경우가 있었고 또 청문회를 통하여 송곳 같고, 속 시원한 청문을 한 국회의원이 스타가 되기도 해서 소위 <청문회 스타>라는 용어도 생겼다.반대로 증인으로 나왔다가 오히려 스타가 된 적도 있었다. 하여튼 청문회는 진실을 가리는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청문회를 통해서 많은 사건과 유행어가 생기고 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는 욕구불만과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또 죄가 있을 법 한 사람에 대해서 청문회 감이라고도 하였다.며칠 전에도 개각이 되어 국무총리, 국무위원 몇 명, 대법관 등에 대해서 국회 청문회가 있었다. 청문회전에 각자의 인물평에서 또 그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군대 안 갔다, 위장전입 했다, 부동산 투기했다, 세금 탈루했다, 논문표절, 중복이 있었다는 말이 줄을 이었고, 또한 한결같이 청문회 때 다 말씀 드리겠다 죄송하다는 말들이 청문회 대상자들의 해명(?)이 반복되었다. 사실 청문회 때마다 회자되는 군대,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세금 탈루, 논문표절 등등은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게 한국사회다. 또 사실 뭐 그까짓 것 누구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무슨 잘못이냐? 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내가 잘 아는 미국 '볼티모어' 에서 사는 대학교 선배가 있다. 1973년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오래 전에 미국에 와서 잘 살고 있는 선배 댁에서 초대 받은 적이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자네 군대 갔다 왔지? 하고 묻는다. 네! 육군대위로 3년 3개월 복무하고 제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물으세요? 그 선배가 대답이 자네가 요사이 유학하기 어려운데 유학 왔고 해서 빽 쓰고 군대를 연기했거나, 뺀 게 아닌가 싶어 물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아는 지인을 통해서 연락이 왔더란 다 잘아는 후배 2명이 미국 유학을 가는데 '볼티모어' 공항에 내리니 차편도 제공하고, 2~3일 묶어 보내달라고 해서 뭐 힘든 일 아니니까 YES했다고 한다. 시간이 되어 공항에서 마중하고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오는데 심심하고 초면이라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는데 한다는 소리가 "군대는 왜가! 바보 같은 놈들" 하면서 유학 길에 오를 때까지 군대를 빠지기 위해서 노력한 무용담(?)을 들려주는데 결론적으로 군대를 빠지고 유학 길에 오른 것을 마치 큰 벼슬한 것처럼 자랑하더란 다. 그래서 성질이 곧고 급한 이 선배는 도저히 못 참겠어서 고속도로(Free way)에서 차를 멈춘 후 뒷 자석의 두 유학생을 차에서 내리게 한 후 문을 잠그고 출발하며 너희 놈들 구보! 하고 떠나왔었다고 하며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웃었다.그러면서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아주 멋쟁이 산부인과 여의사가 있는데 유태인이라고 하며 얼마 전에 남편이 미국에서 변호사였는데 중동전쟁에서 사망했다고 하였다. 얘기인 즉 슨 부인은 산부인과 의사, 남편은 변호사, 이 부부가 중동전쟁이 나자 자진해서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참전했고, 남편은 탱크 병으로 부인은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며 불행히도 남편은 전사 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그날 밤 그 선배와 "조국"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국민의 의무, 국가, 노블리제, 오블리제, 등등에 대해서 개똥철학(?)을 읊프며 떠들던 때가 생각난다.이스라엘은 국민이면 누구나 군대에 간다고 한다. 남녀의 구별도 없단다. 그리고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결함이 있거나 그 이외의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군복무를 안 했으면 이유불문하고, 공직(公職)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개인적인 사업이나 직업을 가질 수 있지만 公職은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국민의 三大기본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고 전혀 公職을 맡는 것 과는 상관없고,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은지? 그러나 결론적으로 어떠한 이유를 대고 별명을 하고 사과를 해도 군대를 안 간 것은 사실이 아닌가?혹자는 청문회가 도덕적 검증을 하는 것이지 않느냐 개인의 수행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을 것 같으나 기껏해야 1년, 1년 반 심지어 몇 개월 하는 국무위원 자리에 무슨 능력이 필요하겠는가? 오히려 능력이 있으면 설쳐 돼서 짐이 되거나 마이너스가 될 일이지? 솔직히 한마디 할까?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항상 군대 안가고, 위장전입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세금 탈루하고, 논문 표절한 인사 외에는!물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1년, 기껏해야 1년 반 정도 국무의원을 하는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소. 제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들 좀 임명 하시오 부탁 또 부탁합니다./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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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25 23:02

[금요칼럼] 애국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코미디 - 전용배

기성세대에 편입되면서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을 함에 있어 남의 입장을 한번 정도는 더 생각해보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었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왜 그리 크던지. 그러나 이젠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부터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타협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누군가는 외쳐야 할 상황에서도 그 누군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길 바랄 때도 있으니 숫제 비겁하다 못해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비약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바로 아이돌그룹 2PM의 재범과 국회인사청문회에 대한 이중적 잣대이다.그룹 2PM의 리더였던 재범은 4년 전 힘든 연습생 시절 개인 홈페이지에 "나는 한국인이 싫다"는 내용의 글을 남긴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그룹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집단이지메나 마녀사냥을 넘어선 '애국주의의 비극'이다. 사실 이번사태는 그냥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다. 청년시절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해 푸념한번 안 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그 아이돌스타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애국주의는 강요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2002년 월드컵 준결승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수천 명의 독일응원단이 독일 국기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팀의 깃발을 흔들면서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모습을. '위대한 독일'을 외칠수록 독일은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이번 해프닝은 한국사회의 폐쇄성만 만천하에 드러냈을 뿐이다. 굳이 볼테르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건 상식의 문제이다.반면에 국회의원 출신 일부 장관 후보자들이 증여세 탈루, 다운계약서, 이중소득공제, 위장전입 등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여론주도층들은 '의외로' 조용하다. 실정법을 위반해도 무덤덤하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관용적이 되었는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힘없는 서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정의사회 구현'을 그렇게 외치던 분이 정의사회 파괴하듯이, 입만 열면 그렇게 '법치주의'를 강조하던 그 많은 분들은 '그때그때 달라요'만 외치고 있다. 그들에게 법치는 '법이 다스린다'가 아니라 '법으로 다스린다'로 이해될 뿐이다. 물론 지난(至難)한 우리역사와 개인의 삶을 생각하면, 혼자만 올곧게 사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은 모르는바 아니다. 강자에 굴종하지 않고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반드시 남기고 싶습니다"고 '신념'처럼 외치던 전직 대통령은 자살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해 보였다.애국주의도 좋고, '법의 통치(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도 좋지만, 최소한의 이성과 논리는 있어야 한다. 젊은 청년이 청소년기 때 한마디 푸념한 걸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애국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실정법을 유린해도 강자라는 이유로 용인되어야 하는 사회가 이성적인 사회인가. 전혀 상관없는 아이돌 스타의 해프닝과 국회인사청문회가 필자에게만 한 묶음으로 연결되어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국가관을 심는 데는 네크라소프의 시구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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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18 23:02

[금요칼럼] MPR 시대와 저널리즘의 위기 - 한정호

마침내 미디어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신문과 방송, 대기업들은 새로운 미디어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분주하다. 신문과 방송의 교차겸영이 허용되고 대기업들의 미디어산업 진출이 보다 용이하게 되었다. 케이블TV에게도 KBS나 MBC 같은 종합편성채널이 허용되게 되었으며 뉴스채널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IT 강국에 이어 미디어 강국답게 우리나라는 이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인구 당 미디어의 비율이 높다. 공중파방송은 물론 케이블 TV, 위성TV에 이제 인터넷을 이용한 IPTV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핸드폰과 DMB 수신기에서도 온갖 프로그램이 쏟아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신문과 잡지의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불황에 허덕이면서도 그 숫자는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 라디오의 청취율도 떨어지지 않는다. 광고로만 운영하는 온갖 무가지들도 난무하고 있다. 인터넷 속의 신문과 방송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뿐인가? 블로그를 통하여 미네르바와 같은 파워 블로거들이 저널리스트 행세를 하고 있다. 네이버와 같은 포털들은 자기 마음대로 뉴스를 편집하여 신문사 역할을 하고 있다. 만 미디어에 대한 만 미디어의 투쟁이 시작된 기분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미디어산업의 발전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언론의 국제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디어의 폭발과 팽창은 예상하지 못한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불경기로 이러한 많은 미디어들의 재원이 되는 광고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미디어 범람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마케팅의 무기가 마케팅 PR (이하 MPR)이다. 노스웨스트 대학의 토마스 해리스 교수같은 사람은 이제 광고의 시대가 가고 MPR의 시대가 만개한다고 장담한다. MPR은 간단히 말해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미디어의 내용을 직접 노리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 해리스 교수는 결과적으로 유료광고는 줄고 비광고 미디어 공략형태의 마케팅전략이 늘 것이라고 내다본다. 특히 기존 일간신문과 방송 (공중파)의 광고는 큰 타격을 볼 것으로 예측한다.이제 광고의 자리가 MPR로 대체된다면 무슨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기업들로서는 한 없이 늘어난 미디어의 지면과 프로그램을 직접 공략해서 자신들의 회사나 브랜드, 제품의 이름이 나타나도록 한다. 영화는 PPL (영화 속에 특정 제품이 등장하게 만드는 마케팅 기법)로 가득 찬다. 경제지의 경우 아예 제품 소개난을 기사처럼 버젓이 운영하고 있다. 이제 공중파와는 달리 규제가 약한 케이블 TV의 종합편성채널에는 여러 형태의 MPR이 난무할 것이다. 기업 스폰서를 받는 프로그램이 늘고 신문은 기업의 소개기사로 가득찰 것이다. 인기 있는 잡지사의 편집권을 기업이 비밀리에 인수하는 사태도 있다. 몇 년간 계약을 하고 그간의 모든 기사와 광고를 그 기업이 마음대로 하기도 한다. 내막을 모르는 독자들로서는 교묘한 홍보기사를 억지로 읽는 겪이다. 광고가 부족해 재원이 약해진 신문과 방송은 정부와 기업이 제공하는 퍼블리시티 (보도자료)에 크게 의존한다. 자연스럽게 기업이나 정부의 홍보지나 홍보방송으로 전락한다.MPR 시대의 도래는 마케팅에게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저널리즘에는 큰 위기를 초래한다. 워치독 (watchdog)으로서의 언론의 기능은 약해지고 기업과 단체들의 보이지 않는 홍보 미디어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이는 MPR 시대에 국민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다. 무엇이 광고이고 기사이고 프로그램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미국의 경우 실제 히트를 친 연애소설에 유명기업의 광고카피가 연인간의 대화 대사로 그대로 실리기도 했다. 이는 처음부터 작가와 계약을 맺은 광고소설인 것이다. 어떤 영화는 재벌사로부터 수십억의 협찬을 받고 그것이 기획에 포함되어 PPL로 나타나 마치 기업홍보연화를 방불케 한다. 미디어의 뉴스거리를 만들기 위한 고의적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이 MPR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교묘하게 기획, 제작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러한 MPR 시대가 도래하면 독자들과 시청자들의 지위는 약해지고 일개 소비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광고와 신문기사의 차이가 없어지고 방송의 프로그램 또 한 스폰서 기업의 홍보채널이 된다. 미국의 유수한 기업의 한 마케팅 담당자는 "사방이 온통 직접 홍보뉴스를 전달할 미디어로 깔려있는데 왜 돈 주고 광고를 하느냐"고 반문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유료광고는 무료 기사형광고로 바뀌는 셈이다.이러한 환경에서는 엘리트 신문이나 공영방송의 출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기업과 신문사가 컨소시움을 이루어 만든 방송사가 재원의 창출을 위해 기업의 MPR 전략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에 대한 댓가를 공공연하게 받을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모든 기업들이 MPR을 하면 기업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디어의 발전은 그에 상응하는 광고의 공급을 전재로 해야 하며 기사와 광고, 프로그램과 광고는 엄연히 분리되고 미디어의 편집과 영업이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금의 국내 형편으로 볼 때 미디어의 대폭발은 MPR의 발전과 함께 홍보성 기사와 프로그램의 난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한정호 (연세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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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11 23:02

[금요칼럼] 강원도가 뿔났다 - 전상국

강원도에 가면 당신도 자연이 된다.1998년 개봉된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란 영화는 그 제목부터가 달콤 섬뜩한 종래의 그것들에 비해 사뭇 낯설었다. 그러나 영화 내용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그 제목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강원도의 힘'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낙후와 불모의 땅, 무대접 푸대접으로 홀대 받았다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에 빠져 있던 강원도 땅 강원도 사람들이 비로소 강원도의 힘을 다양한 패러다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부터였을 것이다.강원도의 힘은 무엇일까. 영화 '강원도의 힘'은 결별의 상처를 가진 남녀가 각기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그네들이 지난 날 나눴던 사랑의 애틋함을 다소 칙칙한 톤으로 회상하는 내용으로, 인간 내면의 심리 흐름이 강원도를 배경으로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강원도의 자연을 통해서 피폐한 그네들의 가슴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자연은 인간 감성의 근원이다. 자연의 힘은 남들한테 뒤질세라 정신없이 내달리며 살던 대도시 사람들이 사시사철 주말만 되면 목숨을 걸고 도심을 탈출하는 그 차량행렬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잊고 산 질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욕구는 자연 앞에 서는 순간 숨김없이 드러난다. 오솔길에 들면 저절로 노래를 부르고 자연예찬의 삼행시를 짓는 다. 아이들은 환호하고, 어떤 이들은 자연의 신비를 스케치북에 옮기는 등 그 감동이 거침없다.자기 안에 감춰져 있던 아티스트 본능의 꿈틀거림이다. 자연 속에서의 이러한 문화충동이야말로 남들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기에 바빴던 도시적 삶의 각성이며 자기가 꿈꾸고 있는 자기 본래의 모습을 비로소 찾았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처럼 마음의 여유를 찾은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거대 괴물도시 예찬이 아닌 충청도의 힘,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산골 마을의 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얼마 전부터 강원도 사람들은 강원도의 새로운 힘으로 반세기 넘게 휴식을 한 DMZ(비무장지대)를 내세우고 있다. 분단 고통과 그 상흔의 상징인 DMZ가 버려진 땅에서 생명의 신비를 담은, 생태 자원의 보고로, 남북 화해 평화 통일의 전진 기지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강원도 사람들은 대도시 사람들의 생명의 원천인 상수원, 그 물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갖은 불이익을 감수해 왔듯 반세기 이상 살아 숨 쉬고 있는 공포의 그 지뢰밭 속에서 살아왔다. 함부로 발 들여 놓을 수 없는 그 무수한 선들에 의해 삶의 불편을 겪어온 접경지역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애증이 서서히 DMZ 에 대한 자긍심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지난 8월 14일 강원도 고성 명호리 민통선 안쪽에 비무장지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DMZ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9월 18일에는 인제군 서화면에 DMZ 평화생명동산이 비무장지대 가치의 전국화, 세계화를 향해 문을 연다.이제 DMZ는 강원도의 가장 매력 있는 관광 명소로서 떠오르고 있다. 여전히 긴장의 공간이지만 그만큼 환상과 동경의 땅으로, 축복받지 못한 그 땅이 우리의 미래를 여는 기회의 땅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로 지금 강원도 사람들은 많이 바쁘다.그런데 요즘 강원도 땅, 강원도 사람들이 몹시 화가 났다. 정부의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가 무산됐고 지지부진한 SOC확충,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지정 불투명 등 주요 현안이 실패하거다 답보상태다.이에 도민들은 첨복단지 재선정 촉구 상경집회를 하는 등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조선시대 윤행임이 '강원도 사람은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자기 할 일 해나간다' 라고 적은 그 암하노불들이 지금 팔을 걷어 부치고 일어선 것이다.모든 일을 정치판 그 꼼수로 풀어가는 일에 능한 거시기한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무뚝뚝 강원도 감자바위들이 왜 뿔났는지./전상국(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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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04 23:02

[금요칼럼] 전현직 대통령의 가족장 결의대회 - 윤방부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다. 대개 광복절이 지나면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신선함을 느꼈는데 최근에는 날씨와 더불어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과 이상하게도 '주검'이라는 단어가 일상생활을 압도하다 보니 더욱 지루하고 무덥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전남 광양에서 강연을 하고 나서 몇 명의 30대 청년들이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윤 교수 같은 분이 꼭 도와줘야 할게 있다고 한다. 얘기인 즉 슨 자기들은 한국의 장례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 민간운동을 벌이고 있는 단체의 회원이라고 하며 필자의 동참과 도움을 요청하였다. 우선 비행기 시간이 급하니 나중에 학교로 필요한 자료와 내가 할 역할을 적어 보내달라고 하였다. 간단한 인사편지와 왜 그들이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바꾸어야 하는지, 또 현재의 우리나라의 장례실태는 어떤지 등등을 기록된 자료가 운송되었다.지금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1년에 20만여 개의 묘지가 만들어 지며 면적으로 치면 여의도 면적의 1.2배가 잠식당하고 있으며 현재 전국의 분묘 수는 약 2천만 개로 학교용지의 4배, 공장용지의 2배, 국토의 1%, 서울특별시 면적의 1.6배다. 묘지당 평균 면적은 15평으로 주택면적 6평의 2배 반이다. 상가당 조의금은 평균 1천 9백 5만원으로 한해 평균사망자가 25만이라고 하면 약 2조 7천 4백억 원이다.중국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다. 안내인이 여러 얘기를 하는 중에 중국에는 봉분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처럼 유교문화를 숭상하는 나라가 이게 웬일이냐 싶었다. 풍수지리설의 원조인 나라! 龍의 발톱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떠드는 나라가! 중국은 연간 평균 사망자가 6백만 명에 달해 매년 엄청난 규모의 땅, 그 중에도 명당이라고 일컫는 요지가 묘지로 변했다고 한다.그러나 모택동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1956년 화장을 법으로 정하고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는 토장제도를 금지시키는 <장묘문화혁명>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중국 어디에서나 봉분들을 한 무덤은 거의 볼 수 없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북경 시에서는 장묘문화 제2혁명운동으로 94년부터 시작한 운동은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것이다.특히 1979년에 사망한 주은래 전 국무원 총리는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고 그 유골이 비행기로 전국에 뿌려졌고, 1989년 호요방 총서기가 사망했을 때 부인의 희망에 따라 화장된 유골이 강서척지에 뿌려졌다. 중국의 국립묘지인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묘" 는 지도자, 애국자, 과학자, 문학가, 예술가, 고급기술자 등 3.000여명이 묻혀있고 묘지크기는 1~2제곱 미터로 모두 납골묘다. 우리는 최근 2~3개월 사이에 두 前大統領의 운명을 경험하였다. 한 분은 "자살"로 운명하였고 또 한 분은 의학적으로 病死하였다.어린 시절 초대대통령의 생일날이 되면 경기여고와 함께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가 동원되어 서울운동장에서 생일을 찬양하는 합창을 하곤 하였다. 그 당시 그 분이 대통령이니 당연히 생일에 동원되어 합창을 하는 것으로 알았고, 또 그 분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훌륭하며, 우리가 存在케 하는 분 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4.19혁명으로 그 분이 下野할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필자는 모 신문사가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내가 믿었던 그 분이 최악의 지도자(?), 독재자(?)였기에 결국 下野해서 '하와이'로 망명하였다는 것을 언론보도를 접하고 어리둥절 하였다. 그 후 下野할 때 욕하고 비난하던 때와 달리 이곳 저곳에서 안타까워 우는 국민들을 보았고 운명했을 때 정말, 진정으로 슬퍼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과야 어떻든 그 분은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대통령이 운명했을 때 어떤 장례를 치러야 할까! 법률적으로 국장, 국민장, 가족장 등이 있다고 한다. 최근에 운명한 전직대통령 두분 중 한 분은 국민장으로, 화장하고 고향마을로 갔고, 또 한 분은 특별하니 국장으로 서울 현충원에 모셨다. 장례가 국장이냐! 국민장이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아직도 계속 대통령은 현재대로라면 5년에 한 명씩 나올 것이고, 또 그들이 인간인 이상 운명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전직이던 현직이던 대통령의 주검에 대한 장례형식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은 없으나 죽으면서까지 000대통령은 국민의 귀감이 됐다는 이 한마디는 듣고 싶다. 한국의 주은래, 호요방은 언제 오실까?그리고 광양에서 만났던 장례문화를 바꾸기를 원했던 그 젊은이들이 지향하고 희망하고 또 갈망하던 말,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했던 분이나 대통령이 정말 장례문화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던 그 바람들이 생각날 뿐이다. 현직이던 전직이던 대통령의 장례 형식에 대한 이러한 기사가 보고 싶다.영어로 한번 쓸까? "He deserved it, but he didn't."이 한마디를./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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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28 23:02

[금요칼럼] 시대를 앞서간 '행동하는 양심' - 전용배

지난 화요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永眠)했다. 사람들은 '영욕(榮辱)의 삶을 살다 갔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를 제대로 기억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가운데 가장 오해받았던 사람이 DJ였다. 아직도 그를 떠올리면 죄송한 마음부터 앞선다. 필자의 고향은 대구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고향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당시 나의 고향에서, DJ는 일부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빨갱이, 거짓말쟁이, 전라도' 프레임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생을 마친 지금도 이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대학시절 그의 저서인 '김대중 옥중서신',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을 읽었지만, 너무 '똑똑해서'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엔 정말 그랬다. 독서량이 풍부하지 못했던 20대 초반의 평범한 학생이 어떻게 본질을 볼 수 있었겠는가. 언론마저 통제되던 시절이었으니, 세상을 보는 창(窓)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진면목은 미국강의실에서 제대로 체험했다. 체육이 전공이었지만, 한국에서 전공한 행정학을 부전공 삼아 법대, MBA, 행정학 대학원생들의 토론을 경청하다 보니, 정치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보편적 가치'에 누가 가까운가가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990년대 당시 서구에서 바라보는 제 3세계 위대한 지도자는 아웅산 수지, 넬슨 만델라, 김대중으로 압축되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박정희, 김일성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일부 알고 있는 교수님들도 "독재자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나, 독재자들은 공통점이 너무 많아 서로" 정도에서 마무리했다. 당시에 받은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박정희와 김일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물론 조금은 유연한 입장이기에, 서구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미얀마의 군부가 아무리 총칼로 '국민적 지지'를 받아도 아웅산 수지를 극복하기는 힘들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관점을 적용하면, 김대중은 세계적인 지도자이다. 오천년의 우리역사에서 한국인 중에서 전 세계에 가장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유명한 사람 하나만 꼽으라면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DJ이다.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YS와의 경쟁구도는 국내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글로벌 인지도'만 적용하면, 한국정치인은 DJ와 나머지로 분류될 수 도 있다.DJ의 개인적인 영향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국민의 정부'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정책적으로도 1971년 DJ가 내놓은 4대국 보장론이나 통일정책은 당시로는 파격적이었지만, 지금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물론 DJ도 인간이기에 역사적 및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권위적이고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1987년 YS와 대통령후보를 놓고 타협하지 못한 사건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망자(亡者)에 대해서는 허물은 덮고, 공(功)만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이지만, DJ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은 공(功)과(過) 모두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DJ가 아무리 허물이 있다한들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역사적 가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DJ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지도자가 철학이 확고하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목도(目睹)하고 있지 않는가. DJ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서,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사이에 있어야 한다"가 정말 가슴에 와 닿았음을 고백하면서, 청년시절 오해에 대해 이제야 용서를 구한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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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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