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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나의 독서 일기 - 장인순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으로 계절을 느끼는 가을은 농부들에게는 땀 흘려 일군 수확의 계절이며, 동시에 많은 수험생에게는 고통과 인고의 계절이기도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추석이라는 황금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 연휴에 조상의 묘를 찾는 것 외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황금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아름다운 연휴가 황금알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시간을 창조하는 삶 '독서'나는 일 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황금연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향이나 혹은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 생활 철학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 12시간이상을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다. 이런 연휴에 움직이면 많은 시간과 돈을 길에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만 아니라, 긴 연휴 후에는 심신이 피곤하여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씩 책을 읽으면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즐거움, 특히 연휴 끝자락에서 느끼는 지적포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감이다. 인생의 삶의 가치는 감격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는 글을 통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현재를 결단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 의미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독서는 간식 아닌 주식많은 사람들은 항상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바빠서 매끼니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많지 않듯이, 현대를 사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을 만드는 삶, 다시 말하면 숨어있는 시간을 찾고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한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작은 시공간에 갇혀 살지만, 책을 읽고 지적 배고픔을 채워가는 사람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지적 체력을 가짐으로서 담대하고 정직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선진 시민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독서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니고 우리 삶의 주식이 되어야 한다.독서가 곧 황금알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책 읽는 것 같이 쉽고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쉬운 책 읽기를 위해서 우선 책사는 연습을 열심히 하자. 나는 평소에 시간이 있거나 혹은 출장을 갔을 경우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미술관이나 특히 대형 서점에 들러서 책을 보고 많은 책을 산다. 그리고 출장 중에 남는 출장비는 모두 책을 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책을 선물 하는 것은 인격을 전하는 것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으로 가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독서의 중요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토마스 바트란 의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도 잠자며, 자연과학은 경직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바로 책이 없는 사회는 배만 부르면 행복한 동물의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황금연휴에 책을 읽어 황금알을 낳자./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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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2 23:02

[금요칼럼] 가을엔 '혼자'가 되자 - 박범신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가을이 주는 감성적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감수성도 깊은 가을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여름은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다.일광은 타오르고 녹음은 무섭게 뻗어나가고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걷는다. 문을 있는대로 열어젖혀야 하고 우두자국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게 여름이다. 한낮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아낌없이 열리고 불타오르니 우리들의 영혼은 작열하는 일광 밑에서 숨을 곳이 없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소리치면서도 그 소리의 메아리가 무엇을 울리고 되돌아오는지 가려보지 못한다. 영혼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내면의 뜰은 횡경막에 눌려 비지땀을 흘릴 뿐이다.그러나, 지금 돌아보라.낮에는 햇빛이 아직 뜨겁지만, 저물녘이 오면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흰옷을 찾아입고 창문을 하나씩 닫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소스라쳐 돌아보면 당신은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다.'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버려야겠다'선구적이었으나 고독하게 살았던 전혜린(田惠麟)의 문장이다. 가을이 주는 첫 번째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혼자'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 이제 머지않아 나뭇잎은 물들고 들녘의 곡식은 익고 하늘은 끝간데 없이 높아질 것이다. 그때가 돼도 천지간에 당신이 한 존재로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셈이 된다. 그것은 곧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지난 여름에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성숙한 가을에 '혼자'인 것을 깨닫고 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솟아날 수밖에 없다. '촛불'과 '올림픽'과 '고소영'같은 낱말들이 여름 복판을 관통하고 있는게 보일 것이다. 성숙을 통해 혼자가 된다는 것을 과거를 깊은 성찰로 뒤돌아본다는 것이고 동시에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뚜렷이 인식하고 포기할 수 없는 본원적인 꿈으로 앞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을은 그런 힘이 있다.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게 인지상정이다.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고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나를 덮칠 때, 그리하여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못한 내 삶의 물집들이 눈물겹게 시선 속으로 들어올 때, 바로 그런 가을에 이야말로, 마실나갔던 본성이 내 영혼 속으로 되돌아와 나를 깨우는 축복의 시간이다.가을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그리고 자신에게 묻자. "괜찮은가. 내 삶이 지금 이대로좋은가"/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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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05 23:02

[금요칼럼] 우포늪에서 띄우는 편지 - 정목일

창녕 우포늪에 오면 1억 4천년만 전 태고의 시공간을 만날 수 있다. 여름의 우포늪은 온통 개구리밥, 마름, 생이가래 등 수생식물들로 덮여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늪가엔 수양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늪은 꿈을 꾸는 듯 평화롭다. 여름의 늪은 왕성한 생명의 숨결로 차 있다. 자동차의 매연과 소음으로 하늘을 볼 수 없는 도시인에게 우포늪은 태고의 공간과 숨결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소벌(우포), 나무벌(목포), 모래벌(사지포), 쪽지벌 등 4개 늪을 총칭하는 우포늪은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의 230만㎡에 걸쳐 분포하는 국내 가장 큰 내륙습지이다.낙동강 유역 창녕, 함안지역은 늪지지역이 굉장히 넓었으나 대부분 매립되어 늪의 90%가 소실되었다. 그런데도 우포늪이 이나마 남아 있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우포늪이 시멘트 공간으로 변하지 않고, 대단위 공업단지나 아파트단지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딜 가서 우포늪 같은 태고의 공간을 찾으며, 생명의 보고(寶庫)를 볼 것인가.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사박물관이다.금년 1월에 세계적인 자연사박물관인 워싱톤국립자연사박물관에 가 본 적이 있다. 공룡연구소까지 갖춘 이 자연사박물관엔 과학적인 시설과 자연계와 인류 역사를 테마로 한 1억 2400만 점의 소장품이 있다. 선사시대 각종 동. 식물을 비롯해 전 세계 각국의 자연사 유물들이 전시돼 관람객을 압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연사박물관은 이미 '자연'과 '생명'을 상실했다. 거대한 야수에서부터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상실하여 표본과 박제품이 되어 진열돼 있을 뿐이다. 관람객들은 동물들의 주검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던 숲과 늪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자연사박물관을 메운 관람객 중에 6세의 소녀가 어머니 품속에서 울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소녀는 "이곳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죽어 있어요."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 자연사박물관엔 살아있는 게 없다. 거대한 생명체의 무덤, 아니 주검의 박제품을 보여주는 삭막한 공간에 불과할 뿐이다.우포늪은 얼마나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궁전인가. 1억년 생명의 유전자와 숨결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람사협약(습지보전 국제협약)에 등록된 세계적인 습지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삵, 고니, 가창오리, 가시연, 순채 등 1천여 종 동 .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우포늪에선 멸종 위기의 세계적인 희귀종인 가시연꽃이 피고 있다. 어찌 동물의 박제품을 진열한 자연사박물관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경남에선 우포늪에 따오기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고, 1970년 이전엔 흔한 겨울철새였으나 최근에 거의 멸종이 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가져와 정착시키려는 프로그램이다. 오래 전에 지리산에 곰을 방목한 일이 있지만, 먼저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부터 복원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포늪에 외래종인 베스와 황소개구리에 의해 고유종인 물고기가 멸종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오는 10월엔 창원에서 람사총회가 열린다. 람사협약은 '철새 서식지 보호'라는 것만을 협약하자는 게 아니다. 종(種) 다양성의 보존과 인류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습지를 보존하고 현명하게 이용하자는 데 있다.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총회를 앞두고 우리는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앞으로의 대책에 진지한 검토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전 인류의 반을 먹여 살리는 신의 은총인 쌀이 습지인 논에서 생산된다. 습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놀라운 생명성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우포늪 등 육지 습지와 낙동강 하구언의 을숙도 등 바다 습지를 생명의 자궁으로 인식하고 보존해야 한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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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9 23:02

[금요칼럼] 가을의 문턱에서 - 김용택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햇살은 지구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며, 지상에 따가운 햇볕을 내리 쬔다. 가을이 오고 있다. 인간들이 아무리 '철'없이 곡식을 가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생태와 순환을 조정하려 해도 오고 가는 여름과 오는 가을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어김없는 저 가을 앞에, 계절 앞에 고개 숙여라. 저 위대한 자연의 질서와 순환 앞에 무릎 끓어라.올해는 소낙비가 유독 많았다. 비가 하도 국지적으로 그것도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기상청도 두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기상청의 날씨 오보를 가지고 말도 많았다. 그러나 기상청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우리 인간이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버린 것이다.뜨거운 여름날 소낙비는 모든 곡식에게 거름이고 약이다. 특히 벼가 동 베어가는 8월 중순을 넘어서서 소낙비가 쏟아지다가 날씨가 확 들어버리면 햇살은 정말 뜨겁게 대지를 내리쬔다. 어른들이 그런 날씨를 보며 "하따, 벼가 한 뼘씩은 커 불것다." 하시며 좋아 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소낙비가 뚝 그치고 난 후 벼를 보면 벼가 쑥쑥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1년 중 가장 늦게 씨를 뿌리는 배추와 무씨를 뿌리고 쪽파를 심을 때다. 대게의 곡식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을 하는데, 그 중에 무와 배추와 쪽파는 한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 늦게 거둔다.어렸을 때 어머니와 배추 씨를 땅에 묻으며 물었다. "어매, 왜 이렇게 한구덩이에 여러 개의 씨를 묻어?" "한 개는 날아가는 새들이 먹고, 한 개는 땅에 있는 벌레가 먹고 땅위로 솟은 싹은 사람들이 먹는다."고 하셨다. 이제 그 말도 옛말이 되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벌레와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고, 날짐승 들 짐승들이 곡식을 '공격'한다.농부들만큼 자연과 생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동네 앞 정자나무에 잎이 피는 것을 보고,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그해의 흉년과 풍년을 점친다. 달의 모양, 바람 부는 방향과 몸에 느껴지는 바람결로 비가 오는 것을 안다. 이 때 쯤 어디를 가면 강물에 다슬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짐승과 곤충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날씨를 점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것을 오랜 전통으로 전해 주었고, 그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이 가르쳐 준 교육내용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물려받았다.하늘이 높고 파랗다. 지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부지런히 가을을 준비한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자연의 약속을 농부들은 믿고 살았다. 그것이 농사였다. 농부들은 땅에 곡식을 심어 곡식을 키우고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 자기도 먹고 세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땅을 살리고 곡식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들, 그들의 저 오랜 삶을 우리들 삶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맑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 속에 자라는 벼와 곡식들을 보며 한탄한다. 우리들이 농사지은 것은 값이 땅이 꺼지게 떨어지고 우리가 사오는 것들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그러기를, 그런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농부들의 한숨이 우리 땅을 꺼지게 한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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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2 23:02

[금요칼럼] 어머니의 태극기 - 장인순

광복 63주년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은 8월이다. 연구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언덕의 대형 태극기는 하늘에 계신 어머님과 태극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와함께 태극마크를 단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삼 조국의 의미를 생각한다. 과거 우리나라는 수없는 외침으로 짓밟히고 갈갈이 찢겨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우리 국민 특유의 민족혼이 자유민주주의와 맞물려 그 많은 상처를 치유했다. 아직은 분단의 아픔은 있지만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이 된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보릿고개와 배고픔이 상식으로 통했고 국민소득 100불 시대였던 1960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 외국유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목표였다. 결핵으로 힘들었던 것을 털고 1969년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쥐어줄 100불(당시 정부에서 허용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힘들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아들의 유학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가난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삶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렵게 마련해주신 100불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였다.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았던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내방에 들어오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께서는 내게 눈물과 정감을 나누어 주시는 대신 하얀 종이에 곱게 싼 것을 건네주시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순간 내 손안에 들려진 무게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은 무엇일까? 평소에 말씀이 적으셨고, 아무리 힘들어도 7남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주신 종이를 풀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깨끗한 태극기' 한 장이 얌전히 접혀 있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펼쳐들고 오랫동안 어머니 마음 앞에서 가슴이 메는 통증을 느꼈다. 교육을 받지도 못한 어머니가 단돈 100불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신 태극기에는 어떤 의미와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십여 년 이상 일본에 사시면서 국가가 없는 국민의 슬픈 비애를 몸소 체험하셨던 어머니이기에, 더 큰 땅에 가서 공부 마치고 빨리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는 어머님의 민족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내가 학위를 받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머니! 그 후 일 년 만에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이 나이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란 언어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우리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단어이기 때문 아닐까!1999년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으로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연구원 입구 언덕 위에 12X9m짜리 대형 태극기를 걸 수 있는 국기 게양대를 만든 것이었다. 태극기는 지금도 1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대한민국의 얼과 함께 휘날리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을 유학 보낼 때 가방 속에 몰래 태극기를 하나씩 넣어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딸아이들이 머무른 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아이들 공부방 벽에 태극기가 걸려있지 않는가. 내가 그 시절 어머니께 전해 받았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그 곳에 걸려 있는 듯 숙연함에 목이 멨다.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의 선물은 무엇일까! 어느 시인의 "엄마는 눈물을 진주로 만든다"는 말처럼 여리면서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강한 우리들 어머니들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뜨거운 교육열이 있었기에 조국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태극기는 하나인데 왜 이렇게 분열되고 촛불집회 속에 반국가, 반민주주의 구호가 나오는 걸까. 참으로 안타깝다. 8월 광복절, 올림픽 경기장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는 우리 선수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이 땅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는, 그러면서 남을 배려하고 질서있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하나의 태극기 아래 힘을 합쳐서 작지만 강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면 한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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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15 23:02

[금요칼럼] '제3의 눈' - 박범신

티베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일대의 사원에 가면 사원꼭대기에 커다랗게 한개의 눈이 그려져 있는 걸 흔히 보게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이 외짝눈이 새겨진 T셔츠나 돌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원 입구에서 쭉 찢어진 커다란 눈을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마치 숨기고싶은 내 오장육부를 투사하는 듯한 눈빛이다.이 눈을 흔히 '제3의 눈'이라 부른다.이는 영혼의 눈이다. 티베트에서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본성을 똑바로 보는 정견이 그 첫째이고, 정견을 확고히 다져 끊이지 않는 체험으로 다지는 명상이 그 둘째이며, 그러한 정견과 명상을 우리의 실재, 또는 현실적인 삶 전체와 합일시키는 행위가 그 셋째이다. '제3의 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견을 위한 눈이다.사람에겐 눈이 두개 있다.좌우에 눈이 있는 것은 넓게 보자는 것보다 오히려 똑바로 보자는 뜻에 더 부합된다. 한쪽눈만 가지고선 아무래도 사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개의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믿는 현상에 불과하다. 객관적 현상을 똑바로 보자는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바로 이 두개의 눈에서 비롯된다.그렇다면 현상은 곧 진실인가.사실주의적 세계관의 문제는 진실이 항상 사실이나 현상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고약하게도 사람은 보는 데로만 알고 보는 데로만 느끼고 보는 데로만 삶을 운영하지 않는다. 사람은 두개의 눈으로 현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 제3의 눈' 으로 현상 너머의 다른 본질을 또 본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거창하게 본성을 꿰뚫는 영혼의 눈이라고까지 갖다 붙일 것도 없다. 문화적 인간과 야만적 인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제3의 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눈과 상상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사물을 볼 때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사람이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지만 은밀한 내적 통로를 통하여 그는 그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않고 기억과 상상력을 보태어 해석한다. 이를테면 숲을 보면서 수목장이란 장례문화를 생각하고, 장례문화를 통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를 통해 평생 나무꾼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가난한 생애에 닿는다. 가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기억의 총체성을 부과해서 그는 숲을 보고 해석하는 셈이 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뛸 수도 있다.상상력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숲을 보고 자연의 원리를 상상할 수 있고 자연의 원리를 짚어 우주를 내다볼 수도 있다. 지구조차 떠날 수 없는 인간이 신을 찬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조건은 따져보면 식욕과 성욕조차 이길 수 없는 동물의 층위에 놓여있지만, 그와 동시에 신적인간에 이를 수 있을 만큼 그 층위가 넓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어떤 이는 그 자신 부처가 된다. 인간이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토록 넓은 층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제3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각설하고.단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오로지 생물학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잘 먹고 어떻게 잘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비로소 기억과 눈과 상상력의 눈이 작동한다. 짐승의 층위로부터 하늘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대의 스펙트럼 앞에 존재하는 인간이 어떤 층위에다 자신의 삶은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요약되는 '제3의 눈'에 달려 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우리가 세계에서 최상의 정보화 국가를 이룬다고 해도 이 모든 정보가 오히려 기억과 상상력을 도태시키거나 감금시키는 방향으로만 확장된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성공'이라고 부르는 '신화'도 마찬가지다. '제3의 눈'을 감금시키는 정보화나 성공은 우리를 다만 물질의 감옥 속에 가둘 뿐이다./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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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08 23:02

[금요칼럼] 인터넷과 광장 - 정목일

도시엔 광장, 집에는 거실이란 소통 공간이 있다. 도시나 가정이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인터넷시대가 되자 광장, 거실이란 소통 공간이 퇴조하고 만다. 한 공간에 함께 모여 의사교환을 나누던 방법에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의사교환을 나누는 시대가 된 것이다.이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일찍이 상상할 수 없던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에게 가려지기 마련이었던 개인의 생각과 의견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론을 주도한다. 익명성을 지닌 인터넷이 온갖 의견과 생각을 쏟아 붓고, 성인이라면 거의 하나씩 휴대하고 있는 휴대폰과 디지털카메라가 순간을 포착하여 인터넷을 통해 유통시킨다.광장과 거실이란 소통 공간의 효용성이 차츰 줄어들게 되었지만,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소통의 양(量)은 증폭되고 시. 공간을 초월한다. 대표자를 뽑아서 민의를 반영하는 간접민주주의 제도에서, 인터넷시대의 도래는 소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대표자의 입 하나만을 바라보던 종전과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입이 생겨난 셈이다. 인터넷은 이제 소통의 광장이고 삶의 숨결이고 표정이다.그러나 인터넷은 사이버 광장이다. 직접 만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나누는 소통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통의 원활과 거리낌 없는 방법에도 불구하고 현장과 체감의 결핍을 느낀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교감과 소통에서 늘 부족감을 지녔던 직접 만남과 소통의 결여를 보완한 형태가 다름 아닌 '쇠고기 촛불 집회'이다.이번 촛불시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의 사회적인 문화적인 혁명의 조짐을 지닌 이 현상을 두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충돌이라고 보는 견해,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서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우리나라에 이 같은 현상이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인구밀도가 좁은 데다 인터넷 이용자가 많은 점, 정치 관심도가 높은 국민성, 보수와 진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이번 촛불집회의 시발로 앞으로 빈번하게 촛불이 시청 광화문 광장을 덮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요한 이슈나 국가적 사회적인 사안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이 제대로의 대안을 내놓지 못할 때, 촛불이 켜지게 될 것이다.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것이며, 민심을 전달하겠다는 의식으로 촛불을 들 것이다.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수록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질 전망이다. 인터넷과 광장이 결합된 새 소통장치로써 '촛불집회'가 나타난 이상,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안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광장의 촛불집회는 정부, 국회, 정치권이 제 몫을 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 만큼 지금부터라도 제 역할을 수행하고 신뢰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우리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매체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던 타고난 정보유전인자를 지닌 민족답게 인터넷과 광장을 결부시켜 새로운 소통 방법인 '촛불집회'를 창출해 냈다. 촛불집회가 그동안 시위, 항의, 부정의 함성을 토해냈지만, 이 새로운 소통장치를 긍정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어낸 붉은 악마의 응원집회처럼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신바람을 내게 된다면 국력은 활기를 띨 것이지만, 국정과 민생을 마비시키고 지루하게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면 피로감이 생기게 될 게 분명하다. 촛불집회가 민족의 단합과 결속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축제의 신바람으로 타올라 국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 돼야 한다.인터넷의 소통 방법과 광장을 연결시킨 촛불집회를 소통문화의 진화라고 볼 것인지, 우리는 이쯤에서 바람직한 방법과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에 출현한 이 소통장치가 건전하게 작동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새 동력이 돼야 한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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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01 23:02

[금요칼럼]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어간다 - 김용택

남도 쪽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앞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정자나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 정자를 짓기도 했기 때문이다.마을 앞에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의 앞을 지켜주고 마을 뒤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뒤를 지켜 준다. 마을 앞 들 가운데에도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 나무는 들을 지켜 주는 나무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나 산마루에도 느티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마을 앞 허전한 곳에 이 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기도 했고, 마을 강가에 심어 강물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준다. 작고 조촐하고 가난한 마을의 뒤나 앞에 심어진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 가고 또 모양이 풍성해 보여서 봄여름 가을 겨울 마을을 풍요롭게 가꾸어주기도 한다. 정자나무라고 하고 당산나무라고도 하는 이 나무의 종류는 대개 느티나무, 팽나무, 또는 서 나무가 많다. 어떤 마을은 소나무나 참나무로 정자나무나 당산 나무를 삼은 마을도 있다.우리 마을에는 네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 앞 강 언덕에 심어 가꾼 이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부른다. 이 정자나무는 한 15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평생을 홀로 사셨던 서춘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여름이 되면 마을의 모든 남자들은 점심을 먹고 다 이 나무 아래로 모여 들었다.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그늘이 넓고 짙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이 나무 아래 들면 바람이 일고 땀이 개었다. 나무 아래는 넓적한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편히 누워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지 않은 사람들은 짚신을 삼기도 했고, 장기를 두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래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고누를 두기도 했고, 또 어 떤 날은 마을의 일로 대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이 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오랜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 입줄에 오르내린 후 이 나무 아래에서 또 해결이 되었다.비유하기가 좀 '거시기' 하지만 이 나무는 마을의 '국회의사당'이었다. 우리 마을의 모든 역사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모든 비리를 다 알고 있을 이 나무 아래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 마을에 순창 양반이라고 부르는 분이 살았었다. 얼굴이 하얗고 걸음걸이가 무척 조심스러운 분이셨다. 정자나무에서 우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이 다 잠이 들어도 이 분은 늘 앉는 나무 가양자리 그 자리 그 그늘 아래 앉아 맑은 강물과 앞산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조를 하셨다. 청사안이이이이이이이, 으으으으으으, 이이이이이, 아아아아아아, 하시다가 한음을 낮추거나 높여 또 으으으으으으, 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 하셨다. 내가 듣기에는 참으로 지루한 아아나, 으으나, 이이이였다. 그 어른의 노래가 너무 단조롭고 지루했던 내가 어느 날 시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근데요, 할아버지 왜 맨 날 청산만 하세요?" 그랬더니, 그 어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시끄럽다. 이놈아!" 하시고 또 그 '청산이이아아아으으으' 였다.눈이 맑으신 분이셨다. 홀로 깨어 앉아 그렇게 청산을 찾다가 그 어른은 햇살 속으로 가만가만 걸어가 강변에서 소똥을 주워 바제기 가득 담아 짊어지고 집으로 가셨다. 그 시끄럽고 무덥던 여름날의 그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어가면서 농촌 공동체는 사라졌다.매미들만 무성한 정자 나뭇잎 속에서 귀가 따갑게 울고 있다.▲ 약력*1948년 전북임실 출생*1982년 '창비'로 등단*시집"섬진강. 맑은날. 나무,그여자네 집"등이 있고, 산문집 "섬진강 이야기"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등이 있다.*소월시 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고향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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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25 23:02

[금요칼럼] 인문서적외 과학책도 읽자 - 장인순

이 시대를 과학기술이 역사를 선도하는 시대라 한다. 다양한 과학기술의 빠른 발달은 일반 대중은 물론 때론 과학자들의 생각마저 앞질러 갈만큼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백 년 전에는 일상생활용품이 2백 여개였는데, 지금은 3만2천 개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불확실성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 불확실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모든 분야에서 균형감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 자원문제 등 모든 것은 인간의 욕심으로 야기된 균형감각의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 무지개는 아름다운가!어느 날 文史哲科 600이란 글을 읽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아쉬웠던 것은 과학기술이 역사를 선도하는 시대에 과학이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文史哲科 700을 권하고 싶다. 이는 문학서적 300권, 역사서적 100권, 철학서적 100권 그리고 과학서적 200권 프러스 좋은 시집들을 이삼십대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文史哲에서 문학은 언어의 보고, 역사는 체험의 보고, 철학은 초월의 보고라고 한다면 과학은 전적으로 자연의 오묘한 질서에 의한 것으로 신비의 보고 혹은 진리의 보고라고 하고 싶다. 모든 학문을 통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책들을 접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하듯이, 우리들의 생각도 다양한 지식을 통해서 균형감각을 가지며 우리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향상시켜,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혜는 지식보다 입체적이고 균형 감각이 있어 사물을 단순한 흑백논리보다도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논리로 판단하는 것이다. <참고로 빛은 작게는 7가지 색으로 많게는 수천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으며, 빛 속의 여러 가지 색으로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들의 생각에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을 칠하는 것으로 균형 감각이 있고 법과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성숙한 선진 시민이 되기 위해서이다. 무지개색깔이 흑백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무지개 색깔의 아름다운 심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하는 인격의 동반자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언론이 순화되어야 국민정서가 순화된다국가의 근본을 흔들어 놓은 촛불 시위를 보면서 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정치 논리가 아닌 과학적인 논리로 풀지 못할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흑백논리가 아니고 모든 것은 아우르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논리 말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시위현장에 나온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쇠파이프와 물대포가 난무하는 곳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까 하는 것이다. 언론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이런 것을 외면할 용기는 없는 것인지! 文史哲科 700을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이 책을 가까이 하고, 특히 국민을 고객으로 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들이 공부를 한다면 이런 사회논란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 있는 언론인이 되려면, 국민을 위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는 먼저 공부하는 언론인이 되어야하고,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자세, 흑백논리가 아닌 다양한 색깔을 가진 무지개논리로 무장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왜곡 했을 때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언론인 그가 바로 지혜 있고 용기가 있는 언론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론인은 언론이 순화되면 국민정서가 순화되고 선진시민이 된다는 것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기 바란다.▲ 시어가 가진 언어의 생명력내 서재에는 수백 권의 시집이 있다. 힘들었던 유학시절 시를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것은 시처럼 순수하고, 시처럼 아름답고, 시처럼 예리한 언어는 없다, 왜냐하면 시어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언어의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시를 많이 읽으면 작은 촛불은 있을 수 있어도 쇠파이프나 물대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이 땅에 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에게 文史哲科 700은 물론 시를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에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을 입히자. 왜냐하면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나기 때문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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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18 23:02

[금요칼럼] '보리밥' 에서 생각나는 것들 - 박범신

등산로 입구엔 '보리밥집'이 꼭 있다. 손님들은 주로 장년과 노년층이다. 그들은 보리밥이 꼭 좋아서 먹으러 온다기보다 보통 추억을 쫓아서 보리밥집에 온다. 절대빈곤의 시절 눈물로 비벼먹던 보리밥에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내게는 위로 누나들만 네 분이었다.어린시절, 어머니는 겉보리를 앉힌 무쇠 솥 한가운데 쌀을 한줌이나 될까 말까 하게 얹고 밥을 해서 쌀쪽만 푹 퍼내어 내 밥그릇에 담았다. 당연히 누나들은 모두 보리곱삶이 밥을 먹었고 나는 보리가 섞인 쌀밥을 먹었다. 한 번은 불만에 가득한 막내누나가 자신의 밥을 잿간에 내다버린 적도 있었다. 막내누나로선 억울한 분풀이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보리곱삶이래도, 복터진 줄 알아야지!"어머니는 종주먹을 들이대며 말하곤 했다. 방귀 한두 번 뀌고 나면 뱃속이 툭툭 가라앉고 마는 게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보리밥조차 배불리 못 먹을 땐 보리가루나 밀가루 등으로 풀떼기를 쑤어먹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맹물이나 마시며 끼니를 그냥 걸렀다. 어머니 젊었을 때는 왜인들이 거름으로 실어온 상한 깻묵으로 죽을 끓여먹기도 했다고 했다.나는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누나들한테 뒷통수를 쥐어 박히면서 쌀 섞인 보리밥을 먹고 컸지만, 어쨌든 보리밥은 여러모로 내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누구는 가난에 대한 상처 때문에 한사코 보리밥을 피하고, 또 누구는 일부러 그걸 사먹으러 등산로 밑에까지 간다. 이제 웬만하면 다 '쌀밥'을 먹고 사는 세상이 됐지만, 그러나 세계를 이끌고 가는 중?장년층의 심리 속엔 아직도 절대빈곤에서 겪었던 상처들이 남아있다. 남아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것들이 행동양식이나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행으르 미치기도 한다.식량폭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카메룬에선 식량문제에 따른 폭동으로 수십 명이 죽었고 아이티 역시 사람이 죽고 총리까지 해임됐다. 식량폭동은 중남미와 아랍지역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까지 도미노처럼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름값이 치솟는데 따라 식량 값은 더욱 더 오를 것이다. 식량 생산비의 90% 이상이 석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트랙터 운행은 물론이고 농약과 비료생산, 수확과 운송 저장 등 모든 생산과 유통과정에 기름이 필요하다. 오일쇼크는 보나마나 식량쇼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더구나 석유고갈에 대비해서 곡물을 발효시켜 자동차 등에 연료첨가제로 사용하는 마이오에탄올 개발에 선진국들은 이미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 곡물생산량의 40%를 선진국에서 가축들에게 이미 먹이고 있는 참인데, 이제 자동차가 사람이 먹어야 할 식량을 먹어치우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단기고수익을 목표로 움직이는 국제투기 자본들이 석유와 함께 식량이라는 먹잇감을 쫓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렬히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우리 먹거리의 70% 이상은 이미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치면, 식량생산에 천문학적 돈을 들이는 것보다 수출을 늘려 그 남은 이익으로 식량을 사다먹는 게 수지맞는 장사로 보인다. 지금까지 역대정권이 밀고나온 정책방향도 이런 계산속을 전제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과의 FTA도 농업에선 좀 손해 볼망정 자동차 등을 팔아먹는데 유리하도록 정부가 머리를 많이 썼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징후는 충분하다. 전문가들조차 머지않아 식량이 무기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나 중남미, 한때 식량수출국이었던 필리핀, 인도 등의 예를 보라. 그들의 농업기반은 최근 십여 년 사이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강대국의 식민지배 상태를 자동적으로 불러왔다.'보리밥'과 '풀떼기'의 상처는 모두 아문 것이 아니다. 쇠고기문제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검역주권'이 아니라 '식량주권'이다. 죽어도, 다시 '보리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안전한' 먹거리의 계속적인 보장이고 문화적인 식탁이다. '식량주권'을 튼튼히 확보하는 길을 하루빨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출생 1946년 8월 24일 (충청남도 논산) 소속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학력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수상 2005년 제11회 한무숙문학상 경력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2007년 1월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특이사항 블로그 연재소설 '촐라체'의 작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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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11 23:02

[금요칼럼] 촛불의 현상학 - 정목일

2008년의 우리 화두는 '촛불'로 집약된다. 한국에는 지금 촛불뿐인 듯하다. 촛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형국이다. 촛불 때문에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다.'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 보라'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가스똥 바슐라르(1884~1962)가 그의 저서 '촛불의 미학'에서 한 말이다. 촛불이 방안에 켜지는 순간, 촛불이 놓인 자리는 우주와 사색의 중심점이 된다. 촛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바라보도록 강요하고 있다. 촛불을 함께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이 순간 한 공간에 있음을 인식한다."창조에 있어서 '삶'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모든 형태, 모든 존재를 통하여 오직 하나의 동일한 정신, 즉 유일한 불꽃이다."바슐라르는 촛불을 보면서 몽상과 철학과 존재의 미학을 탐구했다.촛불은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든가, 누가 죽었을 때 추모하기 위해 밝혔다. 제의에서도 촛불은 사용된다. 초를 태워 빛을 만드는 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며 집중력과 정신의 심지에서 촛불이 되어 타오르는 걸 느끼게 된다.우리나라에서 촛불은 어느새 제의적이거나 미학적인 의미를 벗어나 항의, 저항, 농성의 시위행위로 바뀌었다. 큰 사건 때마다 촛불을 들고 모이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촛불문화나 촛불정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제 이러한 집단행동이 정당화되고 미화되고 있다. 무슨 일에나 촛불만 들고 나가면 정당하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현실이 놀랍다. 이 촛불행사는 '촛불시위' 또는 '촛불집회'라고 하다가 이제는 '촛불문화(제)' '촛불정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바람에 꺼질듯 가냘프고 여린 의미의 촛불이 한국에서 시위나 저항, 공격 등의 거친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한국인들의 강한 집단저항 성향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여 촛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많겠지만,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촛불시위의 소득으로는 미국과 재협상의 길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켤 것인가?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촛불은 이제 바람에 꺼질 듯한 약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듯한 거센 파도로 밀려들고 있다. 촛불집회라는 군중심리 속에는 개개인의 정체가 가려지게 되는 익명성이 도사리고 있다. 신속성과 보편성에 익명성이 곁들여진 인터넷이 한국인의 집단 쏠림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촛불 앞에 국회도 없고 정치도 없다. 중재도 조절도 없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적마다 성명서와 입장을 밝히던 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타오르는 촛불의 군중심리에 자신이 탈까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는 전진을 멈추고 방황과 혼동의 회오리 속에 빠져있다.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과 방안을 내놓기 위해 정치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한다. 지금은 각계각층이 앞서서 지혜의 촛불을 켜야 할 때다. 촛불의 군중심리에 눈치만 보지 말고 중의를 모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촛불집회는 소통의식의 일면이 있다. 인터넷상으로만 소통하던 행위에서 오는 체감적인 면의 부족감을 촛불집회를 통해 보충하고 확인하는 심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촛불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촛불에 가려져 있는 민생과 경제의 표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 분야에서 성찰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찾는 논의가 절실하며, 상생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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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04 23:02

[금요칼럼] 다시, 유마거사를 생각하다 - 김탁환

촛불로 뜨거운 6월이다. 거리로 내려온 별무리처럼 총총 빛나는 불꽃을 따라, 어느 가난한 병자를 떠올린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작년 여름 인도를 떠돌 기회가 있어 바이샬리란 도시에 들렀다. 흙탕물 속을 헤엄치는 물소 곁에서 일분을, 한 시간을, 한 나절을 흘려 보냈다. 홍수 탓에 길이 끊긴 저 건너 마을이 바로 내가 꼭 방문하고 싶었던 참 맑은 영혼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1980년대 유마는, 종교적 색채와 무관하게,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마경> 곳곳에 보살의 대비심(大悲心)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들고 자식이 나으면 부모도 낫습니다.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을 마치 외아들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의 목소리는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에서 놀라운 사랑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같은 병을 앓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가슴 절절한 말이 있을까. 같이 '죽는' 일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앓는' 일은 서로를 품고 이해하는 제법 긴 '동안'이다. 그의 병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에 감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 흔히 사랑 이야기에 질병이 동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병이 결핵이든 암이든, 사랑 이야기에는 궁극적으로 함께 아파하고픈 갈망과 더 이상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절망이 교차한다. <늙어가는 아내에게>를 읽은 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펼쳐드는 것도 이 도저한 은유에 매혹된 탓이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 놓았는지 모르잖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질병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로부터 나왔고, 하여 그와 함께 앓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이보다 더 정직한 사랑의 자세를 나는 알지 못한다.2008년 6월, 대한민국의 화두는 '소통'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법을 이야기했고 관례를 거론했고 논리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잔칫상은 지루하고 식상하다. 소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국민과 같은 자세로 국민과 같은 병에 걸려 잠시라도 앓아보기를 권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말도 헛것이며 소통은 불가능하다.정부 대표단이 미국에 가서 추가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할 만큼 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계속 더 목소리를 높이자는 주장도 있다. 과연 정부는 이 난제를 어찌 풀어야 할까. 지금이야말로 유마거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는 중생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먼저 살피고, 중생을 그 지위나 능력의 단면에 따라 미리 예측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도(大道)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작은 길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사자후를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취급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집회의 사소한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바로 그 크나큰 기쁨[大喜]을 추구할 때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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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27 23:02

[금요칼럼] 장마를 기다리나? - 김민영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진 지 한참 지났다.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국민 열 명 가운데 한 두 사람만 지지하는 대통령이라면 이미 정상적인 통치행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듯하다. 국민들은 지난 한달 보름여 동안 촛불을 들고 미국산쇠고기의 전면수입을 반대하며 대통령의 성의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급기야 6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1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명박 대통령의 충심어린 사죄와 쇠고기 재협상, 반서민적 정책의 전면적 전환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제껏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한 달 보름, 그리고 연인원 수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이명박 대통령의 대답은 여전히 엇박자다. 예정되었던 국민과의 대화도 연기하고 내각과 청와대의 총사퇴도 미뤘다. 국민 앞에 머리 숙이며 대통령 스스로 내세우던 소통과 쇄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 사태를 정치적 좌우대결이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보고 있으며 보수의 결집을 통해 상황을 돌파해보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예컨대 친박연대, 자유선진당과의 정치적 딜을 추진하며 보수연합을 가시화하고 있다. 친박연대의 복당을 추진하고, 자유선진당에는 총리 자리를 내민 것이다. 이와 더불어 KBS에 대해서는 감사원 감사를 실시하고 정연주사장을 검찰이 소환하는 등 퇴진압력을 가하고 있다. YTN이나 MBC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방송장악 의도를 감추려 하지 않고 있다. 보수논객들은 이심전심으로 촛불집회를 좌우대결, 정치투쟁으로 몰아가고 촛불을 든 국민들을 조롱하며 강경진압을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있다.우선 보수적 정치세력과 적절한 권력나누기를 통해 보수지지층을 결집시킨 다음, 정부가 내세우는 것처럼 미국과 잘 협의하여 30개월이상 쇠고기만 당분간 안 들어오게 하고 이를 친정부적 신문들과 순치된 방송이 여론몰이를 해나간다면 상황을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조금만 더 버티면 장마가 다가오고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지 않겠는가? 장마에 촛불은 꺼지고 신문과 방송이 앵무새처럼 정부입장을 대변하면 하나로 뭉쳤던 시민들은 흩어지고 자포자기 하지 않겠느냐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이다.과연 그럴까? 원인 진단이 틀렸으니 그 대책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미국산쇠고기의 안전성 문제를 놓고 좌우, 진보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확실한 안전성에 대한 담보가 없다면 국민들이 쉽게 수긍할리 만무하다. 시민들은 누구나 쇠고기 문제는 이념적 정치적 문제를 떠나 나 자신,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라 생각하는데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일부 보수논객들만 이를 이념적, 정치적 문제로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이는 남의 다리 긁는 대책이라 하겠다. 또한 과거 권위주의 통치시대처럼 신문, 방송을 장악할 수 있다는 발상도 한심하다. 언론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적 비판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적 합의이자 원칙이라 할 것이다. 그 어떤 정당성도 없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보니 국민들의 저항만 커지고 있다. 나아가 인터넷 공간에서 거의 무제한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오고 가고 있으며 토론을 통해 진실과 왜곡을 갈라내는데 익숙한 네티즌들이 존재하는데 몇몇 대형 언론사를 장악하면 다 된다는 발상은 낡을 대로 낡은 것이다.시민들이 지쳐가고 장마가 겹치면 광장의 촛불은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도 오판이다. 지금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숨을 고르며 지켜보고 있다. 그 대책에 진정성이 담겨있으며 신뢰할 만 하다면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또다시 꼼수와 미봉책의 연속이라면 절대 스스로 촛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국민을 위한 정책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난 한 달 보름동안 촛불을 들고 밤을 세우며 몸으로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광장에 나온 국민들은 신뢰할 수 없으며 반서민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OUT'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이명박대통령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대책, 국정운영의 근본적 변화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보수세력을 결집시키고 홍보만 잘하면 된다는 발상 아니겠는가? 지금 상황을 좌우대결이라는 이념적 프레임으로 보는 한 이같은 황당한 대책 말고 내세울 게 없을 것이다./김민영(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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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20 23:02

[금요칼럼] 위키경제와 촛불집회 - 전홍택

위키피디아(온라인 무료 백과사전)는 대규모 협업(collaboration)에 의한 혁신과 가치창출방식이라는 위키경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백과사전은 어느 한 기업이나 개인의 소유가 아니며, 열정을 가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다. 정규직원 다섯 명이 관리하는 위키피디아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열배 이상 방대하고, 정확도 면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개방된 백과사전의 본질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지식과 관점을 첨가할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오류와 지적 테러의 가능성, 그리고 의도적 방해에 영향 받을 위험이 있지만, 위키피디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성장하여 이용자수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웹에 기반을 둔 대규모 협업은 역동적인 사업모델과 혁신적 경영방식을 출현시킴으로써 이른바 위키경제라는 참여의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대규모 협력에 의한 가치창출이라는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기업은 참여의 시대가 성공의 기회를 넓혀 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화학 분야의 세계적 기업인 P&G(Procter and Gamble)사는 R&D 인력이 7,500명이나 되지만 화학업계의 혁신 가속화로 선두자리 유지가 벅차게 되었다. P&G사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구 인력을 늘리는 대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관련된 아이디어의 50%를 회사 밖에서 조달하는 방안을 채택함으로써 혁신경쟁에서 앞서가게 되었다. R&D의 아웃소싱은 기업에서 제시하는 R&D 과제와 전 세계 과학자들을 연결시켜주는 혁신적인 네트워크 시장으로 발전하고 있다.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전면개방을 반대하는 최근의 촛불집회는 이러한 대규모 협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위키경제"가 정치, 사회분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보인다. 촛불집회는 웹을 기반으로 자발적 조직화에 의한 대규모 협업이라는 위키경제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또한 독립적인 많은 시민기자들이 집회현장을 직접 취재하여 뉴스를 만들고 이것이 기성 미디어 뉴스를 대체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 것도 수평적인 자발적 조직화에 의한 대규모 협업이라는 위키경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웹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협업은 분명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위키피디아 같은 협업 커뮤니티가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 집단주의'를 대표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나라의 '개똥녀' 사건, 폭력전경의 신상공개, 그리고 광우병에 대한 일부 괴담의 급속한 전파와 같은 현상은 온라인 집단주의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그러나 이와 같은 일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협업에 기반을 둔 위키경제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집단주의는 기본적으로 물리적 강압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특성으로 한다.그러나 위키경제에서의 대규모 협업은 자유로운 자신의 선택과 자발적 연대의 결과이다. 따라서 과잉쏠림현상을 억제할 수 있는 적절한 메카니즘만 강구될 수 있다면 위키경제의 대규모 협업이 집단적인 우를 범할 가능성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자발적인 질서관리, 비폭력의 목소리가 일부 폭력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메카니즘의 예라고 하겠다.대규모 협업에 의한 가치창출이라는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우리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여 위키경제시대에 번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이는 비단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 정당 등 정치와 관련된 조직들도 리눅스와 같은 오픈 소스 방식을 통해 보다 나은 정책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도 오픈 소스 방식에 의한 대규모 협업으로 최상의 정책이 개발되어 지금과 같은 갈등재생산의 촛불집회가 사라지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기대해 본다./전홍택(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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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13 23:02

[금요칼럼] 자연재해 대응 바로 알기 - 이서항

지난 달 발생한 미얀마의 사이클론(인도양 태풍) 피해와 중국 쓰촨성의 지진 참상은 우리들 인간에게 자연재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생생한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4년전 동남아에서 발생했던 쓰나미의 사례가 보여 주었듯이 이같은 자연재해는 한 국가의 안보와 사회안정, 그리고 인간 개개인의 삶의 질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사스(SARS)나 조류 인플루엔자를 포함한 전염질병과 같이 새로운 '21세기형 안보위협'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자연재해와 전염질병 등은 해당 국가에게 미치는 피해의 대규모성과 발생의 돌발성으로 인해 군사위협 못지 않게 국가의 명운에 영향 미치는 심각한 안보위협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자연재해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인간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가 이에 대비하는 자세나 대책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물론 국가에 따라 예방조치 및 대비태세를 비교적 잘 갖춘 나라도 있지만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야 허겁지겁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대체로 언론보도를 통해 우리가 보아 온 형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우리가 자연재해와 전염질병 등을 단순히 '신(神)의 행위'가 아닌 새로운 21세기형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예방조치 마련과 대비책 설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최근에 나타나는 자연재해는 과거와 달리 인간에게 주는 피해 범위가 엄청나 과거의 사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라는 점이다. 이번에 미얀마를 덮친 사이클론이나 중국을 강타한 지진의 규모와 피해는 모두 세계 기록감이라고 할 수 있다.자연재해와 전염질병이 21세기형 안보위협으로 꼽히는 또다른 이유는 이들이 결국은 국가안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개개인 삶의 질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태풍과 중국의 지진으로 수만명이 직접적인 인명피해를 당했으며 또한 수백만명이 집을 잃고 생활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났다는 사실은 자연재해가 어떠한 재래식 전쟁이나 무력갈등 보다 더 인간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끝으로, 우리가 21세기형 안보위협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자연재해가 앞으로 더 자주, 그리고 더 큰 규모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미 일부 전문가 및 학자들은 이번에 중국과 미얀마를 강타한 지진과 태풍은 앞으로 지구에게 닥칠 더 큰 자연재해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 과거 오랫동안 과도한 산업활동으로 자연환경에 대해 저지른 기후변화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1985년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적인 영향평가회의에서도 산업활동에 따른 이산화탄소(CO₂)를 포함한 온실가스의 과다한 배출이 기후변화의 주범이며 기후변화는 해수면의 상승은 물론 초대형 폭풍이나 한발 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 경고된 바 있다.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경고와 예측을 사람들이 전혀 심각히 인정하지 않고 예방조치와 대비책의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는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므로 사람들이 즉각적인 관심을 쏟지 않고 다른 현실적인 문제에 우선 순위를 둔다는 것이다.이러한 점과 관련, 최근 발간된 해외언론 타임지는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에 소재한 웁살라 빙하의 76년전 사진과 오늘날의 모습을 비교해 실어 눈길을 끌고 있다. 즉, 76년전 찍힌 웁살라 빙하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뒤덮혀 있었으나 최근의 사진은 이 빙하가 완전히 녹아 호수로 변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변화 그리고 기후변화는 그동안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진행되었으나 이것이 장기간 축적될 경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의 기후변화는 이제 그 속도가 서서히가 아니라 급격히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지난 80년간의 변화는 이제 진행속도가 빨라져 똑같은 변화가 10년 또는 20년 이내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자연재해를 포함한 모든 새로운 21세기형 안보위협이 물론 전적으로 기후변화로부터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목격해 온 기록적인 지진과 태풍 등이 더 큰 자연재해를 시사하는 예고편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은 앞으로 환경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는 기본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이서항(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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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06 23:02

[금요칼럼] 이야기 산업의 미래 - 김탁환

베르나르 베르베르, 오르한 파묵, 요시모토 바나나 등 외국 유명 작가들의 방한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소설은 이미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자국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스크린 쿼터'는 있어도 자국 소설을 보호하기 위한 '스토리 쿼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나 민족 단위로 소설이 창작되고 유통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독자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며, 작가들은 적자생존의 냉혹한 시장에서 작품성으로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역시 국경을 넘어선 지 오래다. <올드보이>, <미녀는 괴로워>,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원작은 모두 일본 작품이다. 영화나 드라마 연출을 희망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일본 만화나 일본 소설 매니아란 사실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소설이나 한국만화의 판매가 저조한 상황에서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과 <신의 물방울>, <노다메 칸타빌레> 등의 일본만화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나날이 성장하는 뮤지컬 시장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뛰어난 소극작용 창작 뮤지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극장용 뮤지컬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 비싼 라이센스 비용을 내고 들여온 작품들이다.이야기 산업은 스토리텔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콘텐츠로 문화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기존 이야기 산업이 문학, 영화, 연극, 드라마 등 예술을 중심에 두었다면, 디지털 콘텐츠의 발달과 함께 21세기 이야기 산업은 예술 외적인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게임의 가공할 만한 문화적, 경제적 파급 효과는 이미 확인된 바 있으며, 제품 광고나 기업 광고, 기업 경영과 개인 경영에서도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아직 그 수준이 탁월하진 않지만 이야기를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도 만들어졌으며, 이야기를 단순히 보고 듣고 읽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을 통해 온몸으로 이야기 자체를 즐기는 가상현실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척 되었다. '이야기 말하기(story-telling)'의 수준을 넘어 '이야기 하기(story-doing)'의 차원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인터넷 공간은 이야기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웹사이트의 블로그나 게시판을 통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사라진다. 이들은 종이책을 통한 이야기와도 다르고 전자책에 담긴 이야기와도 다르다. 다양한 주제에 동시다발적으로 모여 떠들며, 댓글을 통해 그 이야기의 장단점을 같은 공간에서 논박하고, 또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혹자는 제2의 구술문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작가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독자가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받아들이던 단계를 벗어나 작가이면서 동시에 독자인 네티즌들이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의 출현을 확신하기도 한다. '세컨드 라이프'는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가꾸어가는 일이 가능함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현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거리를 두는 그 '틈'과 그 '사이'에서 낯선 이야기들이 명멸한다.이야기에 대한 미학적 가치가 우선시되던 시절도 지나갔다. 어떤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지만 어떤 이야기는 정보를 간명하게 전달하는 도구이며 어떤 이야기는 디지털 기술을 구현하는 작은 역할에 머무른다. 구조주의가 학술활동을 규정하는 하나의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인정받았듯이, 이야기도 개별 학문의 영역으로 쪼개져 논의될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을 포괄하고 융합하는 보편 영역으로 자리매김 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예술이나 공학이나 경영학이나 인문사회학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종횡으로 아우르는 크고 변화무쌍한 강줄기에 가깝다.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디지털은 소멸하는 이야기들을 더 오래 더 빨리 더 쉽게 만들고 간직하는 길을 터놓았다. 이야기로 과연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이야기산업의 미래를 전망하는 진지한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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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30 23:02

[금요칼럼] 준비 안된 정권의 예정된 '위기' - 김민영

출범한지 100일도 안된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20%대로 폭락했다. 역대 정권 가운데 최악이라 한다. 집권 초기 이와 같은 급속한 지지율 하락은 아마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혹자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몇 달 동안 느꼈던 피로감이 과거 정권 5년 동안의 그것과 맞먹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뭐라 이야기하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몇 개월은 국민의 뜨거운 기대와는 달리 실망과 실패의 연속이다. 더욱이 때 아닌 미국쇠고기 파동으로 민심이반이 가속도가 붙은 형국이니 가히 정권의 위기라 부를만하다.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 게다가 여당의 총선압승으로 과반이 훌쩍 넘는 국회의석을 갖고 있는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정권이 도대체 왜 이런 위기에 직면했을까?우선 이명박 대통령의 안하무인적 인사행태가 국민들의 눈에 심하게 거슬렸다. 수십억 수백억의 자산가들로 가득 채운 내각과 청와대 진용, 게다가 땅투기, 위장전입 등으로 문제 있다는 국민여론에 대해 '부자가 뭐가 문제냐'며 응수하던 그 오만함을 국민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법을 어겼더라도, 도덕성에 하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신임하는 '자기 사람'이면 무조건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울화통을 터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마치 점령군마냥 법으로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공직자들마저 모조리 솎아냈다. 이러한 무리한 인사행태가 대통령이 '자기사람' 심기 위해 그러는 것을 국민들이 모를 리 있겠는가?또한 인수위부터 시작된 설익은 정책의 퍼레이드가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영어몰입교육을 추진한다고 했다가 국민적 반감이 커지니까 그런 정책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며 안면을 바꿨다. 0교시, 우열반을 부활시킨 소위 '학교 자율화 조치'로 학부모와 학생들을 너무 힘들게 하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는 어떤가? 언제는 이것이야말로 국운융성의 길이며 물류혁명을 통해 경제를 살리는 대안이라 주장하더니 그런 주장이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난 이후에는 수로를 만드는 것이니 운하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미국에서도 문제가 너무 많아 개혁논쟁이 붙어있는 소위 '미국식' 의료보험체계를 들여오겠다고 하다가 국민반발이 거세지니, 의료보험 '당연지정제'는 폐지하지 않겠다며 말을 바꾼다. 한마디로 충분히 준비도 안 된 정책을 마구잡이 꺼내놓고는 국민들의 우려와 비판이 거세지면 '아니면 말고'식의 꼬리 감추기를 하거나 뒷꽁무니에서 은밀하게 추진하는 일이 다반사다.이것만이 아니다. 지금 국민들이 가장 열 받는 것은 도대체 무슨 원칙과 기준으로 외교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민에게 아무런 언급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광우병위험소를 마구잡이로 들여오는 협정문에 사인을 해버리고는,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항의를 시작하니 '미국사람들 다 먹는 소고기가 뭐가 문제라는 것이냐'며 오히려 국민들에게 핀잔을 준다. 미국의 국익에 민감하다는 CNN조차도 미국의 쇠고기 검역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보도를 하는 판에 왜 한국정부가 미국 축산업자 홍보맨 노릇을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본과의 외교도 국민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는 잊자는 둥 일본정부가 쾌재를 부를 주장만 하고 돌아오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나서서 국익과 국민안전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미국정부, 일본정부 좋은 일만 하고 있으니 어느 국민이 이 정권에 고운 시선을 보내겠는가?또 하나 이명박정부의 정책노선이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해야겠다. 경제살리라고 뽑아준 대통령이 '부자경제' 살리는 데는 열과 성을 다하지만, 서민경제는 오히려 망치고 있다. 현재 정부가 취하고 있는 환율정책으로 인해 수출대기업은 호황인데 원자재를 수입해서 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거의 초죽음 상황이다. 국민들은 급등하는 물가에 신음하고 있다. 월급 빼고 모두 다 오르니 어찌 살라는 것이냐는 국민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부는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을 추진하면서 예산은 10%씩 일률적으로 깎겠다 한다. 예산삭감이 경제를 살리자는 명분이니 경제, 개발예산을 깎을 수는 없을 것이고 국민 복지와 관련된 예산이 뭉텅뭉텅 깎여나갈 것은 뻔한 일이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권의 위기상황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준비 안된 아무추어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과거정권탓, 괴담 탓, 언론 탓 그만하고, 그간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철저한 국정쇄신안을 내놓아야 한다. 우선 인사쇄신이 필요하다. 무능력하고 편향적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국익과 국민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람, 깨끗하고 능력 있는 인사들을 발탁해야 한다. 또한 경제정책을 바꿔야 한다. 재벌편향적 부자편향적 개발편향적 수도권편향적 경제정책을 중소기업 살리기, 국민생활 살리기, 지방경제 살리기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요구에 겸허히 귀 기울이는 민주적 국정방식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정권의 위기극복은 요원하다./김민영(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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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23 23:02

[금요칼럼] 광우병 논란, 사회적 자본 확충 계기로 - 전홍택

최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괴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사회적 자본의 부족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협력을 촉진시키는 제도, 규범, 네트워크, 신뢰 등 일체의 사회적 자산을 포괄하여 지침 하는 것으로서 이중 사회적 신뢰가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다.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선진민주사회에서는 사회적 이슈의 공론화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가 높은 전문가 집단, 언론, 정부 등이 여론을 걸러줌으로써 성숙한 토론과 합리적인 의견 수렴이 이루어진다.반면 사회적 신뢰가 낮은 사회일수록 돌발적 사건이나 대중매체의 피상적 분석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여론의 급격한 쏠림현상을 초래하기 쉽다.여론의 쏠림현상은 합리적인 정책대안 도출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켜 극단적인 경우 사회적 아노미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선진사회로의 도약을 위해 사회적 자본은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본은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회적 기반이다.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가 원활하게 거래되기 위해서는 판매자와 소비자간 신뢰가 전제되어야 된다. TV나 자동차를 살 때 품질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면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필요할 때 은행에서 언제든지 예금을 찾을 수 있다는 신뢰가 없다면 예금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이유로 예금자들의 은행에 대한 신뢰가 갑자기 붕괴한다면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가 예금 인출을 요구하는 공황상태까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에서는 거래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기 위해 품질인증, 성능보증, 예금보험, 주가조작 거래에 대한 처벌 등의 다양한 장치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거래비용'을 낮추어 거래를 활성화함으로써 생산적 경제활동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그러나 제도적인 신뢰증진장치만으로는 생산적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데 한계가 있다.지식기반경제에서 혁신은 성장의 주 원천이다. 그런데 혁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실리콘 밸리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디어와 기술, 자본과 경영노하우간의 결합과 협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와 같은 다양한 사람간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협력체결 계약의 법적 보호와 혁신에 대한 금융지원 등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들 간의 협력을 촉진시키는 네트워크와 상호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이와 같이 사회적 자본은 정치, 경제 등 한 사회의 전반적 선진화 추진에 필수적인 사회적 기반이다.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어떠할까?KDI가 실시한 "사회적 자본실태에 관한 종합적 조사"에 의하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 수준이 전반적으로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신뢰는 개인 간의 비공식적 관계에 대한 신뢰와 공식적 제도에 대한 신뢰로 구분된다.비공식적 관계에 대한 신뢰에 있어서 한국인은 혈연, 지연 등 연고자에 대한 신뢰는 높은 반면 연고가 없는 이웃, 낯선 사람 등에 대한 신뢰는 매우 낮았다. 한편 제도에 대한 신뢰 중 국회, 정당, 정부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보다도 낮았다. 따라서 우리사회의 전반적 선진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규제개혁, 교육개혁 등 전통적인 경제, 사회정책과 함께 사회적 자본 확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관습과 규범 등의 제약 속에서 자발적?자생적으로 형성되므로 상호신뢰가 형성될 수 있도록 사회적 관습과 규범을 개선시키려는 범사회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반면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정책적 노력에 의해 비교적 단기간 내에 높아질 수 있다. 특히 국회, 정당, 정부 등 사회적 신뢰가 낮은 부문은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사회적 신뢰를 쌓아가야 할 것 이다./전홍택(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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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16 23:02

[금요칼럼] '21세기형 안보위협'에 대비하자 - 이서항

지난 달 초순 전북지방에서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이제는 다른 지역으로까지 옮겨갈 기미를 보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이 높아가고 있다. 관련 축산업자는 애지중지 기르던 닭?오리 등을 모두 살처분 해야 하는 등 우리 사회 전체가 입을 경제적 손실도 만만치 않으니 피해 당사자들과 농정당국의 애타는 마음을 어찌 다 표현 할 수 있으리.사실 조류 인플루엔자는 과거에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가금류 전염병으로서 국가경제와 사회일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막대하다. 발생했다는 보고가 접수되면 급속한 전염 위험 때문에 수 km 반경 지역 내의 가금류는 모두 살처분 해야 하고 대외 수출마저 끊기니 경제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이랴. 인간에 대한 오염 가능성 때문에 닭과 오리등과 관련된 국내 소비도 큰 폭으로 떨어진다고 하니 우리 사회 전체가 입을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군사적 위협만이 우리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했으나 이제는 조류 인플루엔자와 같은 새로운 요인들도 경제?사회 불안에 한 몫하고 있으니 우리의 안보에 대한 위협요인은 매우 다양해 진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조류 인플루엔자와 같이 꼭 군사적 위협은 아니더라도 한 나라의 경제?사회적 안정에 해를 끼쳐 종국에는 국가의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우리는 '비전통적' 또는 '비재래적' 안보위협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동남아지역에서 창궐했던 '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SARS)와 같은 전염질병과 테러?마약 등이 이러한 '비전통적' 안보위협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또한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와 기후변화 등도 비전통적 안보위협 요인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다. 이들은 비록 군사적 위협의 형태는 띄지 않지만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막대하여 전통적인 군사적 위협만큼 한 나라의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21세기형 안보위협'으로 불린다. 전통적인 군사위협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들 21세기형 안보위협 요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가지의 특징을 지닌다.첫째, 행위주체와 발생 원인이 불분명하여 사전 대비가 힘들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도 발생 원인이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축산업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확산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방역도 어려운 점은 이러한 전염질병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둘째, 위협이 현실화 되었을 때 관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치유과정도 일회성이 아니며 장기적이라는 점이다. 즉, 21세기형 안보 위협들에 대해서는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 차원에서 근본원인을 규명하여 재발을 막을 수 있도록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셋째, 위협에 대한 대비나 실제 위협 발생 시 해결을 위한 대응은 국제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전염질병이나 테러?기후변화 등은 여러 국가의 국경을 넘나들며 발생하고 있으므로 원인규명이나 해결을 위해서는 여러 국가의 정보교환과 협력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러한 특징들 이외에도 새로운 21세기형 안보위협 요인이 던져주는 또 다른 중요한 시사점은 이들이 결국은 한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개별 인간의 안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삶의 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찍이 유엔개발계획(UNDP)은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안전과 삶의 질을 보호 할 수 있는 이른바 '인간안보'(human security)개념을 설정, 개인의 삶과 관련된 안전과 안보가 국가안보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즉, 최근 나타나고 있는 비전통적 안보위협 요인들은 결국 개인의 삶과 관련된 식량?건강?고용?환경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국가의 우선적 책무는 비전통적 형태의 새로운 위협들로부터 사회의 기본 구성원이 되는 개인-즉,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북한이나 이웃 국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조류 인플루엔자의 발생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즉, 인간의 안전과 삶의 질에 위험이 되는 모든 요인은 안보 문제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우리도 하루 빨리 전염성 질병 그리고 기후변화 등과 같은 새로운 21세기형 위협에 대해서는 국가 안보차원에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이서항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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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09 23:02

[금요칼럼] 두 미래 - 김탁환

대한민국에서도 첫 우주인이 나왔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된 이소연 씨가 우주비행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다. 우주에서 보낸 나날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과의 인터뷰를 모은 앤드루 스미스의 <문더스트(Moondust)>는 좋은 참고자료다.지구인 중에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은 열둘인데, 그 중 세 명이 죽고 아홉 명만 남았다. 우주복을 입고 달에 선 표지 그림부터 눈길을 끈다. 지구로 귀환한 후 지금은 우주에 관한 그림을 그리는 앨런 빈의 솜씨다. 1969년 아폴로 12호를 타고 달에 다녀온 그는 우주비행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300년 동안 망원경으로 우주를 살피고 탐사선을 머나먼 우주로 보내고 있는데도, 달 위를 걸으며 바라보던 지구만큼 아름다운 천체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저는 우주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미래에는 더 많은 이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우주비행을 즐기리라는 낙관적인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이 삶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다.역사소설가인 내가 이미 죽은 자들의 흔적을 찾아 책을 뒤지고 답사를 다니는 동안,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훗날 인류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가령 나노로봇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이 매우 작은 로봇을 인체에 넣어 병균을 모조리 퇴치하는 날을 꿈꾸고,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말이나 행동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고감도 센서가 인간 개개인의 업무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유비쿼터스 세상을 그린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막대한 산업쓰레기를 지구가 다치지 않도록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찾는 과학자도 있고 예술 활동을 더 많은 이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도록 뇌를 중심으로 인지 영역을 탐구하는 과학자도 있다. 과학자들이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펼쳐 보이는 미래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해결하고 있다.미래를 그린 소설가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어둡고 칙칙하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올해 우리나라 대표 SF 작가들의 단편선집인 <얼터너티브 드림>만 꺼내 펼쳐도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집에서 인간은 능동적인 활동을 디지털 기기에 빼앗겨버린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자유의지를 통해 무엇인가를 바꾸려는 노력 자체가 사라진 노예들의 사회인 것이다.과학자들의 미래와 소설가들의 미래는 왜 이렇듯 상반될까. 과학에 근거하지 않은 망상이라거나 전체를 살피지 못하고 부분의 발전만 따지는 아집이라는 식으로 서로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발전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리부터 면밀히 따져야 한다.존경하는 과학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연구에 관한 '시나리오'를 지어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좁게 본다면 그 시나리오는 연구가 활용되는 한정된 예시다. 가령 입는 컴퓨터가 점점 더 발전하면 미래의 교실은 이렇게 달라질 것이고 미래의 거리는 이렇게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과학기술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시간 순서대로 담아내는 작업인 것이다. 시야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면, 이 시나리오는 개별 기술이 사용되는 개별 환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단 하루의 짧은 삶을 조망한 시나리오에도 사회 전체의 변화된 모습이 총체적으로 담기기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 혹은 발명은 다층적인 맥락에서 새롭게 자리 잡아야 한다.과학자들과 소설가들이 제각기 상상하는 미래는 생각보다 다르지 않다. 이소연 씨를 우주로 쏘아올린 것이 과학기술이라면, 그녀가 그곳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 착안하여 이야기를 꾸미면 소설이 된다. 이때 사건을 정리하고 구체화시키는 시나리오는 과학자에게도 예술가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미래를 향한 시나리오를 과학자와 예술가가 같이 써야 한다. 언제까지 미래를 둘로 쪼갤 수는 없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이고 그 미래는 함께 꿈꾸는 자의 것이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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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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