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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로스쿨, 로와 스쿨 사이 - 한승헌

지난 7월 3일 오후, 여야 로스쿨법 처리 합의 - 라는 긴급 뉴스가 나오자 성급한 축하전화가 몇 군데서 왔다. 내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이끌고 로스쿨법의 성안, 입법에 힘을 기울여 온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번 회기에는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는 뒤집기 뉴스가 나왔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만일 이번에 또 미루어지면 여러 대학과 학생, 수험생들의 낭패와 손실이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나의 이런 조바심과는 달리, 밤 11시가 넘고 30분이 지나도 고대하는 뉴스는 뜨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뉴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 회기가 끝나는 자정 3분 전에 로스쿨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긴급 뉴스. -심야인데도 여기저기서 축하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이로써 사개추위가 2년 동안 역동적으로 추진해온 사법개혁 작업은 대체로 마무리가 된 셈이다. 되돌아보건대, 사법개혁의 여러 과제 중에서. 국민이 형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배심재판제의 도입, 수사기관 조서 중심 재판의 폐단을 바로잡는 공판중심주의 확립 등이 유난히 힘들었지만, 학계와 법조계, 시민단체의 찬반양론이 뜨겁기로는 로스쿨법이 단연 으뜸이었다. 이 법안을 눈 흘겨보는 국회의 늑장부리기 또한 메달 감이었다.10여년 논란 끝의 만성(晩成)이라고 해서 꼭 대기(大器)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국회가 직권상정 처리라는 비상절차를 밟았는데도 별다른 비판, 비난이 없는 것은 입법 내용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로스쿨 입학 총 정원의 책정은 그동안 큰 관심사가 되어왔다. 그렇다고 로스쿨 논의가 이 문제에만 묶여 있다시피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법학계나 법조계에서도 입학정원 논의에만 매달리지 말고, 어떤 사람을 뽑아서 무엇을 어떻게 잘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법학적성시험, 교육과정, 강의방식 등에 관해서도 심도 있게 연구 개발을 해서 정부와 학교 그리고 교수들이 서로의 숙제를 함께 풀어가야 할 것이다.로스쿨에서는 지금의 법대(학부) 교육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납득할만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실무교육을 병행한다는 정도의 말은 정답이 되지 못한다. 학부 4년의 법학전공자와 비법학전공자를 어떻게 같은 수준에 놓고 강의를 할 수가 있을까 - 이 점도 난제 중의 하나다.물론, 지금 교육인적자원부 당국이나 각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고 있겠지만, 로스쿨 교육의 본질문제에 맞닿아 있는 사안들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은 채 단지 입학 정원을 둘러싼 격론만 되풀이하는 것은 교육자나 법조인의 양식에 합당한 일이 아니다. 대학사회의 로스쿨 과열을 이해는 하면서도 그 정도와 행태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민주사회에서는 사법부를 포함한 법조계도 여러 직역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그 직분이 다소 중요시된다고 해서 로스쿨을 놓고 사생결단이라도 할 듯이 나서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 정부는 로스쿨(법학대학원) 설립을 원하는 모든 대학에 인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졸업생이 나온 작년의 사법시험 합격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학교 측이나 수험생, 재학생 모두가 난감해졌다. 낙방생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입학 정원 및 인가 학교 수의 적정 여부와 함수관계가 있다. 그것은 낙방생 개개인의 불운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책 실패의 탓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일본의 한 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일본의 실패를 거울삼아 시행착오가 없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한승헌(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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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13 23:02

[금요칼럼] 6·25와 6·15 그리고 기억의 정치 - 이우영

지금도 그러하지만 과거에도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통일이나 북한과 관련된 책들이 그나마 관심을 끄는 시기가 6월이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625와 관련된 숙제를 하기 위해서 책을 구입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도 여전히 6월은 북한 및 통일관련 서적의 성수기인데 625에 더하여 2000년 615가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북한관련 책이 조금은 더 읽힌다는 사실이 바람직한 것 같으면서도, 그 이유가 민족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착잡하였지만, 요즈음은 그래도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는 615가 또 다른 배경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나아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일시적이나마 6월의 북한 관련 서적 판매에 도움을 주는 625와 615사이에는 1950년과 2000년의 시간적 간극 보다 더 큰 거리감이 존재한다. 625가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쟁이었다면, 615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남북한 최고지도자간의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625나 615가 무엇인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실보다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 특히 분단사에 대한 사고 방식은 지극히 편협하였다고 할 수 있다.625의 경우는 '상기하자'라는 구호아래 북한의 침략성, 김일성 집단의 무자비함,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로 기억되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김일성과 북한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불과 3년에 걸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들만 300만에서 400만 정도로 세계사적으로 비슷한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안되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사건으로 생각되기 보다는 증오를 확대하고, 그래서 새롭고 더 큰 전쟁을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와 달리 615의 경우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반세기동안 지속되었던 남북간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과 북한의 정교한 전략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있다. 양쪽의 생각들이 나름대로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 입장에 서 있건 남북관계의 변화나 그 속에 살고 있는 남북한 보통사람들의 변화보다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의 공과여부나 김대중정부의 이념 평가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615를 통하여 무엇을 얻었고, 무엇이 부족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관심은 뒷전에 밀리고 있다는 말이다. 615나 625가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가 분명히 다르지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이고, 민족구성원의 삶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현대사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지만, 남북관계와 관련된 사건들의 경우는 편향적이고 심지어 왜곡되어 있는 정도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냉전적 사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냉전적 사고가 단순히 '안보'를 굳건히 하거나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는 정상적 사고가 아닌 상처를 끊임없이 덧내고자 하는 비정상적 사고를 조장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이 아닌 투쟁과 갈등의 분열의식을 자극하고, 평화로운 삶이 아닌 전투적 삶의 확산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불행한 일상과 불안정한 심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정한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일정하게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615와 625의 기억의 정치는 누가 주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올바른 기억과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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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06 23:02

[금요칼럼] 야당 유력 경선후보간의 다툼 - 임동욱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한나라당 유력 대선후보간의 다툼이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유력 경선후보들은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약점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있고 쟁점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한술 더 떠 대통령을 중심으로 청와대까지 이 다툼에 끼어들어 재판관인 선거관리위원회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를 시발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국가정체성 등의 쟁점과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다시 대운하 평가보고서의 변조논란 등을 대하는 국민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할 것 같다. 반면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자유롭기는커녕 본질적으로 이를 즐기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국민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현재 당사자들은 개인 및 당파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면서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쁠 것이다. 주판을 튕기는 셈법은 간단하다. 공격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공격이 상대방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위해를 가해 반사이익을 얻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 공격이 허구라는 것을 반증함으로써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논의를 개인에서 조직으로 발전시키면 야당의 입장은 미리 매를 맞음으로써 내성이 생길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밝혀서 본선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할 것이다. 이 와중에 국민의 관심을 얻어 흥행의 성공이라는 효과까지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여당의 입장에서는 미리 유력후보들을 낙마시키거나 흠집을 잔뜩 내서 본선을 지금보다 쉬운 싸움으로 몰고 가고 싶을 것이다.정치는 출혈 없는 전쟁이라고 말한 마오쩌둥의 말이나 전쟁보다 위험한 게 정치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생각해보면 현재 청와대까지 개입하고 나선 야당의 유력 경선후보간의 다툼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이익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라의 발전과 내일을 잠시라도 고민해보면 지금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라도 국가의 이익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한국대통령학연구소의 연구(2002)는 개인적 차원에서 대통령이 지녀야 할 구체적 자질로 비전제시능력, 인사관리능력, 위기관리능력, 민주적 정책능력 및 실행능력, 도덕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 능력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이나 이 연구에 따르면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제시 능력이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비전제시 능력이 다른 어느 능력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국민통합과 직결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를 관리하고 싶으면 우선 등 따습게 배불리 먹으면서 밤에 편하게 자는 문제는 물론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 나라 전 분야에 대한 청사진을 밝고 분명하게 그려내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자질, 특히 도덕성을 중심으로 개인을 흠집 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고적(retrospective)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 봤을 때 문제가 있으면 결격사유가 되고 앞으로도 과오를 되풀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흠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겪은 지난 두 번의 대선패배는 바로 회고적 판단과 직결되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후보의 병역비리는 물론 산업화 시절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에 대한 반발심에 기초한 회고적 판단들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 회고적 판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망적(prospective) 판단이다. 이를 강조하면 미래를 바르게 끌고 나갈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회고적 판단은 전망적 판단의 보조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 비전제시 능력은 전망적 판단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하므로 이를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우에 그 정당성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회고적 판단과 전망적 판단의 접점에서 선택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바른 판단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과거는 사실이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불투명하다는 점에 있다. 흔히 선거공약을 전망적 판단의 근거로 들이대고 있지만 장밋빛 미래가 전망이 아니다. 우리 정치는 상대방을 흠집 내고 낙마시켜 상대적인 반사이익을 향유하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회고를 전망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취약하기만 하다. 개인이나 조직이 작은 상처나 흠집에 견뎌내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투구의 양상까지 전개된다. 지금보다 진화한 다툼 시스템이 만들어져 전망과 회고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 전망이 회고에서 나올 수 있을 때 후보가 겪어낸 삶의 역정을 짚어보는 회고가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질 및 능력이 있다는 전망과 직결될 수 있다. 그래야만 도스토옙스키가 정의한 것처럼 정치란 조국에 대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정치도 가능해진다./임동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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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29 23:02

[금요칼럼] 대선에 대한 희망사항 - 고원정

오는 12월 대통령선거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며 결국 누가 당선되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대선이라는 제도 자체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느냐는 점을 생각해보기로 하자.우선 4년 중임제를 채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국민의 지지도가 높지 않은 대통령이 하필 임기말에 추진한다는 점에서 역풍을 맞고 말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거론한 4년 중임제 개헌은 이론상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5년 단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87년 체제」는 이제 청산해야만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5년 단임제는 타협의 산물이었고 그 타협의 주역들은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5년 단임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려냈다. 줄줄이 실패한 대통령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난 20년의 정치사는 상당부분 이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은 취임 초기 과도한 의욕에 사로잡히기 쉽다. 5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도 짧고, 다시는 선거를 치르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평가를 받아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크다. 무언가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바심은 결국 많은 무리수를 두게 만든다. 더 이상의 표가 필요하지 않기에 국민들과 함께 가려 하지 않고 앞서가거나 가르치려 든다. 다행히 잘 나갈 때는 좋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랬듯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지지도가 하락하면 5년 단임제는 최악의 상황을 빚어낸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식물대통령이 되거나 「역사가 평가한다」는 식의 독선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넘겨주어야할 것은 넘겨줄 준비를 해야 할 임기말이 이전투구의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5년단임제는 당사자에게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흔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대통령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근거인 「경험」을 단임제의 대통령은 혼자 가슴에 한으로 물러나야만 한다.다음으로 내각제가 아닌 순수 대통령제를 고수할 생각이라면 부통령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국무총리는 대통령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 위상에 너무 차이가 난다. 만에 하나 대통령 유고시에 정치적으로 그 역할을 대행하기가 쉽지 않다. 가령 지난 1979년 10.26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국정의 2인자였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재의 총리로는 일단 유사시 국정의 연속성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부통령제는 차기 주자를 키울 수 있고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 출사표를 던졌거나 거론되고 있는 후보군들을 한 번 살펴 보자. 아직 대통령감은 아니지만 부통령이라면 적임자일 것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무모하게 대선가도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부통령 혹은 부통령 후보라는 중간단계를 거친다면 개인으로서는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고 국가로서는 더 많은 인재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마지막으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고려해보았으면 한다. 지금의 상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경선을 통해 후보가 가려지겠지만, 이른바 범여권의 경우 그 이름을 다 떠올리기도 힘든 군웅할거의 판도가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 아직 감이 잡히질 않는다. 과연 단일화가 가능할 지도 의문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도 있다. 소속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한 무대에 올려놓고 열에서 대여섯으로, 다시 두엇으로, 하나로 압축해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후보들이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겠는가? 선거만을 의식한 무리한 단일화가 화학적 결합에 이르지 못할 경우의 부작용 또한 우리는 많이 겪어보지 않았던가. 결선투표제는 이런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능력이 있고 나름대로 지지층이 있는 후보들은 모두 1차투표를 치르면 되는 것이다.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정치공작을 펼치고 담합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최종 당선자는 당연히 50% 이상의 지지를 받게 된다. 「4자 필승론」 따위의 해묵은 담론들도 효력을 잃게 된다. 생각해보자. 6월 항쟁으로 이루어낸 「87년 체제」가 4년 중임제에 정?부통령제, 그리고 결선투표제를 채택했다면? 늦었지만 다음 정권에서는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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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22 23:02

[금요칼럼] '롱테일 법칙'과 기초과학 - 김승환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상류층 20%가 국가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80/20'의 법칙을 찾아낸 후 소수 정예의 핵심 시장원리로서 또한 선택과 집중의 경영전략으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디지털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기에서 그동안 무시되었던 다수의 힘을 드러내는 '롱테일 (long tail) 법칙'이 새로운 대안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롱테일'은 2004년 이후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 시작한 키워드로 최근 이 개념의 창시자인 미국 인터넷 비즈니스 잡지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한국을 방문하며 국내에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롱테일 법칙'은 다수의 소액구매자의 매출이 상위 20%의 매출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역-파레토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판매량을 분석해보니, 안 팔리는 책도 모두 합치면 소수의 베스트셀러의 매출보다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른바 '롱테일 법칙'이 온라인 비즈니스의 새로운 전략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롱테일 경제학은 현재 위기에 처한 과학기술, 특히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의 전환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제한된 국가 자원 속에서 고속 경제성장을 위한 응용개발 연구와 국가 과학기술 로드맵에 따른 과도한 선택과 집중은 연구의 대형화집단화 추세와 산업 투자비중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전략 아래 오랫동안 '쏠림'이 조장된 결과 대학에서의 기초과학 분야와 창의적 소규모 개인 연구는 '정글의 법칙' 속에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한 예로 올해 과학재단의 핵심기초 연구비의 경우 2천여 명의 연구자가 신청했지만 그 중 87.2%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지방의 경우에는 연구비 신청 자체를 포기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부산 D 대학의 모 중견교수의 경우 1년에 SCI 논문을 6편씩 쓰는 연구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는 여전히 '하늘의 별따기'였다. 두뇌한국 (BK21)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도 해외에 수시로 보내면서, 막상 엄청난 투자를 통해 어렵게 배출된 고급 과학 인력은 실제 현장에서 손을 놓고 놀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의 대학 기초연구 지원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 풀뿌리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천500편의 SCI 논문을 창출해낸 것은 사뭇 눈물겨운 일이다.세계 선진 각국의 과학기술 총역량과 국력 간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SCI 논문으로 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은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브릭스(BRICs)를 넘어 G7 선진국의 추격 가시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기초과학 지원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롱테일 법칙의 적용을 통한 '풀뿌리 기초과학 생태계 살리기'를 들 수 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선택과 집중에서 더 나아가 다수 개인연구자에 대한 저변 투자를 크게 확대하여 연구역량의 총합을 획기적으로 증대하고 기초과학 생태계를 피라미드형으로 복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응용개발 대비 기초분야의 정부지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과학계와 머리를 맞대고 현장의 과학자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 전환과 가치 극대화를 위한 국가적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 클린턴의 '창의적 자본주의'처럼 '롱테일법칙' 전략에 따른 기초과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적극적인 국가 지원은 과학자의 사기진작을 넘어 미래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 문제 만큼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떠나 정부교육계과학계언론이 모두 힘을 합쳐서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김승환(포스텍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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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15 23:02

[금요칼럼] 군인들을 위한 기도 - 이해인

어떻게 님들을 잊을 수 있습니까/어떻게 님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꽃다운 나이에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함께 스러진 슬픈 님들이어/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이 조그만 나라 위해/목숨까지 바친 고마운 님들이어/지금은 이 낯선 땅/돌 위에 새겨진 님들의 이름을/바람과 파도가 기도처럼 불러줍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정다운 별로 살아오는 님들/지지 않는 그리움이여......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사랑으로 새깁니다/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감사로 새깁니다.......이 추모시의 일부가 부산 유엔기념공원 추모명비에 새겨 져 있다기에 얼마 전 일부러 보러 갔었다. 예전에 해외에서 손님들이 오면 유엔묘지를 꼭 참배하고 싶다고 하여 안내 해 준 일이 있지만 이번에 다시 가 보니 참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고 기뻤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40895명의 이름이 나라별로 새겨진 추모명비 앞에서 한참 동안 찡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2천여기의 유해가 안장 되어 있는 묘역을 방문한 유족들이 적어 놓고 간 그리움의 메모들도 바람에 실려 오는 장미향기 속에 애틋하고 눈물겨웠다. 어떤 유족들은 병사의 유골을 가져가려고 안 좋은 마음으로 왔다가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어 그대로 두고가며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고 한다.여중시절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거룩한 예식처럼 동작동 국군묘지를 참배하게 하고 군인들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쓰도록 가르쳤던 담임선생님들의 영향으로 나는 지금도 6월이 되면 전쟁터에서 희생된 군인들,지금도 곳곳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기로 지향을 갖는다. 어린 시절 전쟁을 직접 겪어서인가 지금도 종종 총소리에 놀라고 어둡고 퀴퀴한 냄새 나는 방공호에 숨어있거나 피난길에 쫓기는 꿈을 꾸기도 한다. 가족 친지들과 트럭을 타고 피난을 왔던 이곳 부산에서 일생을 봉헌하는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문득 신기하게 여겨질 적이 있다. 전시가 아닌 요즘은 상황이 매우 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나라를 지키며 수고하는 군인들에게 우리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새롭게 가져야 할 것이다. 이 6월만이라도 각별하게! 얼마전 강원도 춘천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 지난 2월에 입대한 조카애를 면회하러 갔는데 군부대에서 듣는 뻐꾹새 소리, 무더기로 피어 있는 패랭이꽃들이 유난히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아 백일 휴가를 나온다는 조카는 몸이 10킬로나 빠진 걸로 보아 그간의 훈련이 꽤 고되었던 모양이지만 집에 있을 때 보다 안팎으로 훨씬 성숙하고 정돈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엄마를 어머니로 호칭하고 모든 말을 다 '습니다' 체...로 바꾸어서 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음이 나에겐 새삼 놀랍고 대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학을 다녀 와 서른 다 된 나이에 현역으로 입대하니 적응 못하고 힘들어 하진 않을까 우려하던 바와는 달리 그는 한결 늠름하고 씩씩한 청년의 모습으로 멋지게 변해 있었다. 직속상관이 사실은 자기와 나이가 같지만 그래도 서로 잘 지낸다는 것, 입대 전에 듣던 것과는 달리 군 생활이 그렇게까지 힘든 것은 아니고 할만하다는 것, 예외적인 혜택을 누리기 보다는 그냥 남들하고 똑같이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떳떳하고 좋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말에 나는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며 그래도 한번 쯤은 뒤를 돌아보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 조카에게 나는 '그래. 잘 가라 권이병! 쿨한 군인답게 행동 해 주어 고맙다. 그렇게 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렴...'하며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다. '주님, 이 땅의 모든 군인들이 몸 마음 건강하게 성실하게 인내롭게 맡겨진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자신을 넘어서는 넓은 마음과 동료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나날이 새롭게 무장하는 투철한 투사이게 하소서. 그들의 가족인 우리 또한 변함없는 초록의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보고 싶고 걱정 되는 애틋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씩씩하고 용기 있고 절제있고 참을성 많은 '군인정신'으로 우리 또한 일상의 싸움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여 주소서. 아멘' /이해인(수녀시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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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08 23:02

[금요칼럼] 40년 전 야당의 대통령 후보선정과 오늘 - 임동욱

1967년 2월 7일은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많지 않은 아름다운 날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은 당시 백낙준, 유진오, 윤보선, 그리고 이범석 등 야당의 거목 4인이 회담을 통해 신한당과 민중당을 신설합당의 방식으로 통합하여 신민당을 창당할 것을 합의하고, 통합신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윤보선을 선출한 날이다. 당시 야당의 거목들, 특히 백낙준 박사의 삶을 민족적 차원에서 평가하는 경우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자 회담 종결 후 백낙준 박사가 발표한 성명서를 읽어보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명력이 여전한 구절들이 있다.(전략)이제 국민제위의 절대적 지원과 신한민중 양당 수뇌부와 당원 제위의 협력과 재야유지(在野有志)의 독려가 집중하는 가운데 내가 야당통합운동을 추진하는 4인 회의에 참여하여 미성을 이바지할 수 있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제 통합이 완성됨에 있어 국민제위와 같이 이 기적적 성과를 경하한다...(중략).... 내 비록 적은 존재이나 평생을 지켜온 초당적 정신으로 국가민족에 보답하려는 정성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음을 국민 여러분에게 고(告)하는 바이다.성명서에 내포되어 있는 통합, 영광, 기적적 성과, 보답하려는 정성 등은 세월의 변화와 무관하게 정치인 모두가 지켜야 할 가치이자 정신이다. 우선 국민의 지원과 많은 이의 열망에 부합하도록 의사결정과정에서 반기를 들거나 심지어 뛰쳐나가는 세력 없이 대립하는 의견들을 통합하고 수렴해 나가는 정치가 필요하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에 정성과 노력을 쏟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현실 정치판의 유력자들이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정성을 다할 때 의사결정의 결과들은 기적적인 성과가 되고, 이것이 바로 조국과 국민에게 보답하는 길이 된다. 집권을 바라는 정치인에게 현실은 일종의 전쟁일 수밖에 없으니 다툼은 필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정치는 더욱 통합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치열하게 다투고 난 뒤에 상흔을 치유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게 흘러가야 국가와 국민에게 울림이 있고 감동을 주는 정치가 가능해진다. 집권을 해야 한다는 욕심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회 내 구성원들이 바라는 다양한 가치들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정치라는 고전적 정의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가치들은 다양하기에 대립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재원으로 서로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에 대립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고, 여기에 삶을 대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잣대나 방식이 상이하면 다툼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이 와중에서 조국과 민족에 보답하려는 정치인의 정성에 기초한 통합의 마술이 발휘되어 다툼의 결과물이 하나의 기적으로 여겨지는 순간 국민은 감동을 받고 울림이 있는 정치가 가능해진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경선 룰을 둘러싼 유력 대선후보간의 다툼이 봉합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금은 찜찜했던 이유도 감동과 울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벼랑 끝까지 가버린 대치가 아름다운 타협으로 결말이 난 것 같은데, 여전히 위태로워 보이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론만 보고서는 누가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박근혜 전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둘 다 서로 자기가 양보했다고 주장하는데, 설령 둘 다 양보한 것이 사실이라도 상대방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울림이 작을 수밖에 없다. 이래서는 앞으로 있을 야당의 대선후보 결정과정이 5년 전 당시 광주경선을 시발점으로 한 노무현 돌풍과 같은 울림과 감동을 줄 수 없다. 한나라당에서 잠정적으로 후보등록 기한으로 정한 6월 9일까지 예정된 후보들이 다 등록하더라도, 그 이후 진정 아름다운 경선이 되려면 여러 장애와 예상되는 다툼이 잘 봉합되어야 한다. 앞으로 치열한 다툼이 예상되는 부문은 후보검증과 여론조사이다. 공교롭게 이 둘은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각각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부문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는 후보검증은 박근혜 전대표가 여론조사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칼을 잡고 있고, 상대방은 칼날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로가 겨누고 있는 칼과 칼날이 분리되지 않은 채 갈무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은 후보는 물론 후보에 대한 민심을 있는 그대로 알아볼 수 있는 과학적인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연후 바른 대선후보를 제대로 선택함으로써 온 나라에 울림과 감동이 있는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임동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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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01 23:02

[금요칼럼] '지구의'를 보는 마음 - 고원정

해묵은 1970년대식 우스개를 소개하자. 한 장학사가 일선학교에 들렀다. 어느 교실에 들어가보니 마침 교탁 위에 둥근 지구의를 올려놓고 지리수업을 하고 있었다. 장학사는 23.5도 기울어진 지구의를 가리키며 맨 앞줄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왜 비뚤어져 있지? 학생이 대답했다. 제가 안그랬습니다 어이없어진 장학사가 이번엔 교사에게 질문했다.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래 사올 때부터 그랬습니다 장학사는 교장선생을 모셔오도록 했다. 전말을 듣고 난 교장선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말했다.원래 국산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우리 사회의 획일성관료주의자기비하 등을 뭉뚱그려 비꼰 농담으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내용이다. 그래도 이 농담 속의 교실은 상황이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지구의를 갖다놓고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우리들은 대부분 벽걸이 스타일의 평면지도를 갖다놓고 세계지리를 배웠다. 왼쪽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있고 아시아가 가운데,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이 오른쪽에 있는 지도가 우리에게는 상식이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쓰는 세계지도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들의 지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왼쪽이 아메리카이고 오른쪽이 아시아 대륙이다. 그 지도를 보면 이해가 간다. 왜 서양인들이 우리나라가 있는 지역을 두고 극동이니 동북아니 하고 부르는지를. 중동이 왜 중동인지를.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로 건너갔으며 어떤 경로로 잔인한 노예매매가 이루어졌는가를. 하지만 가장 큰 깨달음은 당연히 만국공통이라고 생각했던 세계지도가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우리 식 지도를, 서양인들은 서양식 지도를 가지고 있다니! 지금은 한 발 더 나아가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세계지도를 고안해낸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 어떤 도법으로도 평면 위에 둥근 지구의 형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은 부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도의 근본은 지구의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평면지도가 아닌 둥근 지구의를 놓고 세계를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평면지도에는 중심부와 변방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니치 자오선을 따르면서도 한사코 아시아를 가운데 앉힌 아시아식 세계지도에는 서세동점의 격류 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아시아인들의 의지가 배어 있다. 우리가 중심이라는 관점이다. 유럽인들은 또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위치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생각했다. 극동이니 동북아니 하는 호칭은 우리가 원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보아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들의 세계지도 속에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방일 따름이다. 지도의 오른쪽 끝이 왼쪽 끝과 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어느나라 사람이나 쉽게 깨닫지 못한다.둥근 지구의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심과 변방이 따로 있지 않다. 조금만 돌려서 보면 중심이 변방이 되고 변방이 중심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본래 생겨먹은 모양새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디디고 선 땅이 세계의 중심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모든 이들 또한 저마다 세계의 중심에 서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 중심이 다른 중심을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다. 변방이라 백안시할 권리도 근거도 찾을 수 없다.우리나라에 지구의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조선 인조 때의 소현세자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1645년에 귀국할 때 가져왔다는 것이다. 360여년이 지난 셈이다. 이제는 이 지구의를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글로벌리즘이 화두가 되고 FTA가 최대 현안이 되는 시대, 우리와 피부색깔이 다른 외국인들이 직장 동료가 되고 이웃집 며느리가 되는 시대다. 나만을 중심에 놓고 다른 이들의 자리를 변방이라 치부해버리는 평면지도식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모두가 중심이기에 모두가 소중하다는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어찌 지리공부에만 국한할 일이겠는가. 둥근 지구의를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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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5.25 23:02

[금요칼럼] 막스플랑크와 드레스덴의 교훈 - 김승환

지난 주 독일의 드레스덴에 소재한 세계적 기관인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 연구소의 피터 풀데 소장이 한국을 다녀갔다. 그의 방문 목적은 포항에 소재한 국제연구기관인 아태이론물리센터의 신임 소장으로서 새로 부임하여 동서간 국제공조를 통해 아?태 권역의 물리학과 기초과학의 글로벌경쟁력을 제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그는 첫 인터뷰에서 잠재적 역량을 가진 아태의 젊은 과학자들을 키우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태이론물리센터의 국제공동연구 그룹을 새로 구축을 위한 막스 플랑크 재단의 직접 투자라는 큼직한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막스 플랑크 재단 (Max Planck Gesellshaft)은 미래를 위한 연구를 목표로 탁월한 연구와 과학 진흥을 위한 비영리 기구이다. 막스플랑크 재단은 2006년 타임지에 의해 과학 분야 1위로 평가되고 창립이후 1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가진 기초 연구 네트워크이다. 이 재단은 1948년 창립된 이후 대학의 서포터를 자처하며, 소장과 대학교수의 겸직, 대학의 특성화 지원, 젊은 학자의 육성 등 연구소가 소재한 지역의 대학과 모범적인 윈윈 협력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독일 전역에 고루 퍼져있는 80개의 막스 플랑크 단위 연구소에서는 자연, 생명 더 나아가 사회 과학을 망라하는 대중적 관심 분야에서 하낙의 원리에 따라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중 물리 분야는 창립자인 막스플랑크의 영향으로 전체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창시자이자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는 등 음악적 재능도 매우 뛰어났지만 물리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첫 지도교수였던 필립 폰 졸리 교수는 이 분야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제 몇 개 구멍만 메우면 된다고 조언하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대 없이, 단지 이 분야의 기초를 이해하자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이론물리를 하다 보니 기대를 훨씬 넘게 되었다. 사실 우주는 자신의 비밀을 한꺼번에 보여주지는 않으며, 아직도 풀지 못한 자연의 신비가 쌓여 있는 것이다.노벨상에 견줄 수 있는 막스플랑크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막스플랑크재단을 만든 것이다. 막스 플랑크 재단과 연구소 시스템은 독일의 과학기술 뿐 아니라 경제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해왔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막스 플랑크 재단은 구 동독지역의 부흥을 위하여 동쪽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대표적 산업도시로 옛날에 명성을 날렸던 드레스덴은 엘베 강 밸리에 소재한 동부 색소니 지방의 수도이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화된 이후 지난 40년간의 동독체제에서 경제 산업적으로 쇠락을 거듭해왔다. 통독 이후 드레스덴은 국가적 재건 작업을 통해 독일의 실리콘 밸리이자 독일연방의 동부 과학, 문화, 정치, 경제 거점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이 엄청난 변화를 이끌고 있는 주역은 기초연구 분야의 3 개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응용기술 연구를 위주로 하는 10여개의 프라운호퍼 및 라이프니쯔 연구소 등 신규 첨단 연구소 네트워크이다. 이제 드레스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과대학인 드레스덴 공대, AMD, 토판, 인피니온, 폭스바겐 등 수 많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첨단 벤처 기업의 창업 및 이전, 그릭 지멘스의 테크노 파크 설립 등으로 이상적인 연구소, 대학, 기업, 테크노파크의 클러스터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에 부임한 피터 풀데 소장은 이 드레스덴 시스템의 핵심 연구소인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 연구소를 설립하여 오늘날의 세계적 연구소로 키워냈다. 막스플랑크와 드레스덴 시스템의 성공은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연구 시스템과 지원 방향에 대해 좋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194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오토 한은 발견은 보통 가장 쉬운 길이 아니라 가장 복잡한 길로부터 나온다. 처음 추구했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했다. 현재 답보상태의 우리나라의 과학 분야 국가경쟁력을 혁신적으로 제고하려면 미래를 위한 연구 차원에서 기초과학 지원의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승환(포스텍 교수물리학)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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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5.18 23:02

[금요칼럼] 가정의 달에 바치는 기도 - 이해인

우리집이라는 말에선/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은/음악처럼 즐겁다멀리 밖에 나와/우리집을 바라보면/잠시 낯설다가/오래 그리운 마음가족들과 함께 한 웃음과 눈물/서로 못마땅해서/ 언성을 높이던부끄러운 순간까지 그리워/눈물 글썽이는 마음/그래서 집은/고향이 되나 보다헤어지고 싶다가도/헤어지고 나면/금방 보고 싶은 사람들주고 받은 상처를/서로 다시 위로하며그래,그래 고개 끄덕이다/따뜻한 눈길로/하나 되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언제라도 문을 열어 반기는/우리집 우리집우리집이라는 말에선/늘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고마움 가득한/송진 향기가 난다 --이해인의 동시 '우리집' 전문5월의 햇살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나무들을 보면 가슴이 뜁니다. 나무 아래서 초록물이 든 가슴으로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며 오늘은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에서 섬세하게 표현하며 살 줄 알게 하소서. 서로 고마운 것은 고맙다 하고 잘 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기쁨인 것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서로의 결점과 허물을 감싸 안는 따뜻함과 너그러움으로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의 눈물이고 기도인 것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힘든 상황과 시련 중에도 서로를 내치지 않고 함께 목숨 바쳐 서로의 짐을 기꺼이 지고 나누는 '고통속의 축복'에 이르게 하소서.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아픔 속으로 들어가는 연민이고 용서이고 화해인 것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시선을 넓히고 마음을 넓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는 인류애를 실천하는데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함께 길을 가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의 나눔이고 봉사이고 헌신인것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우리가 밥을 먹을 때 일을 할 때 공부할 때 기도할 때 여행을 할 때 문득 문득 그리움 속에 떠올려 볼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종종 마음이 상했다가도 금방 화해하며 웃을 수 있는 가족이 있어 이 세상은 머물만한 사랑의 집이 되고 희망의 꿈터가 되고 일터가 되는 것이겠지요. 며칠 전에는 나에게 실컷 남편 흉을 보고나서도 그가 좋아한다며 토마토를 한 상자나 사가는 어느 주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수녀원내의 유치원에 행사가 있을적마다 아이들의 재롱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을 보면 그야말로 '환희의 극치'여서 나는 언제 저런 표정을 한 번 지어 본적이 있던가? 하며 수행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곤 하였습니다. 방황하는 소녀들과 임시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어느 엄마 수녀님의 부엌 일 하는 모습도 아름다워 보입니다.무의탁 노인들을 피붙이 못지 않은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노수녀님의 모습에서 하늘나라의 천사를 벌견합니다. 비록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가족으로 결속된 이 땅의 많은 가정들에도 5월의 신록처럼 싱싱한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면서 마더 데레사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사랑은 가족에서부터 시작합니다....우리 가족 안에 대단히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몰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미소를 지을 시간도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지냅니다. 먼저 우리 가정에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옵시다. 그러면 달라질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과 헌신과 봉사를 실천할 최초의 활동 분야입니다-/이해인(수녀.시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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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5.11 23:02

[금요칼럼] 조승희 사건이 남긴 교훈 - 임동욱

겨울이 있기에 만물이 약동하는 봄은 모든 것이 호사스러운 계절이다. 아침의 노래 혹은 봄의 노래라고 자주 인용되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극시 「피파가 지나간다(Pippa Passes)」를 읽으면 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극시에서 베니스의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 피파는 일년 중 단 하루뿐인 휴가 날 아침에 봄을 노래한다. 피파가 부르는 계절은 봄이고/ 하루 중 아침/ 아침은 일곱 시/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를 듣고 난 후, 마을의 못된 사람들은 회개하고 삶의 참 행복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편 T. S.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희망과 생명의 달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이 장편 서사시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워낸다/ 차라리 겨울은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라며 시작된다. 이 시를 읽다보면 만물이 소생한다는 것은 축복이고 희망이지만, 작고 연약한 새싹들이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은 잔인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대학 캠퍼스가 가장 예쁘고 활기찬 계절도 봄이다. 신입생들이 들어오니 새로운 기운이 넘치고, 다양한 꽃들과 신록들이 펼쳐내는 파스텔 톤의 캠퍼스는 향긋하기만 하고 때로는 신묘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봄이 펼쳐내는 자연의 향연에 걸맞게 전 세계 대학들의 공통정신인 자유와 진리 역시 한껏 기지개를 켜기 마련이다. 이처럼 예쁘고 좋은 계절에 자유의 상징이자 진리탐구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에서 잔인한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개인에게 내재된 악마성의 발현 때문에 고귀한 생명들이 죽음의 질조차 보장받지 못한 체 덧없이 스러졌다. 이것도 모자라 이스마엘 엑스로 대표되는 황당한 동영상이 전 세계 언론을 유린하고 말았다. 아마 역사는 2007년 4월을 또 다시 잔인한 달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잔인함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해맑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벌레를 서슴없이 밟아죽이고 잠자리 날개를 비트는 것만 보아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잔인함을 묘사한 예술 작품 역시 적지 않다. 단테의 신곡과 이를 표현한 로댕의 지옥의 문은 대표적인 예이다. 전함이 좌초된 후 물과 식량을 위해 동료들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으며 생존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메뒤즈 호의 뗏목을 보면 인간의 잔인성은 그 끝이 없다는 생각조차 든다.인간은 절망과 좌절을 할 때 잔인하고 난폭해진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새겨져 있다는 이 문을 들어가는 자 희망을 버리라는 말처럼 이미 지옥에 온 자들은 희망을 버린 자들이다. 조승희 사건은 바로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인간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택할 수 있는 행동의 극단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인간은 그 잔인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참사를 통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잃은 것 이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상징의 하나가 봄날의 캠퍼스에 마련된 33인의 추모석 앞에 잇따라 놓여 있는 편지들이다. 특히 너를 향한 사람들의 가슴 속 분노가 용서로 변하기를...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프다..."는 내용으로 조승희의 끔찍했던 삶을 용서하고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는 편지들은 성숙한 용서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전 세계를 뒤흔든 성난 지진은 용서와 사랑의 문화 때문에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잠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번 참사를 통해 사랑과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배워야 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5년 전의 미군 장갑차 사건처럼 사랑과 용서가 없었기에 온 나라를 증오와 혼란으로 몰고 가는 일들은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아울러 참사 초기에 우리가 보인 닫힌 민족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열린 민족주의로 가는 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물론 참사를 봉합하는 미국의 방식이 좋아 보인다고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이는 인종융합의 나라가 생존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나라마다 죽음을 대하는 문화가 다르고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굳이 희생자들을 위해 금식하자면 32일 대신에 33일간 금식하자고 했어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민족의 일이라며 사죄하는 것 대신에 같은 인류로서 애도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했어야 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 처참하게 유린당한 봄날의 캠퍼스에서 속절없이 스러진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임동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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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5.04 23:02

[금요칼럼] 옛날 이야기 - 고원정

1960년대 어느 지방에서의 일이다. 다섯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가 있었다. 교육에 관련해서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을 맡은 위원회였다. 그 위원회의 위원장은 당연히 욕심낼 만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위원 다섯명 중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다. 갑과 을이라고 하자. 남은 세명 가운데 둘은 갑의 제자였다. 그 두 사람은 스승인 갑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이 선생님을 찍고 선생님이 선생님을 찍으면 3대2로 우리가 이깁니다 그러나 투표를 마친 결과는 거꾸로였다. 3대 2로 오히려 을이 이겨서 위원장이 되어버렸다. 어이없어하는 제자들에게 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나를 찍나정말 옛날 이야기다. 그것이 그 시대의 정서였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 나선 어린이도 차마 제 이름을 써내지 못하던 무렵이었다.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모든 공직도 마찬가지였다. 속마음이야 어디에 있든 겉으로는 사양하고 자신의 능력부족을 공공연히 드려내며 마지 못한 듯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다른 적임자도 많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한 번 해보겠다,나한테 주어진 책임이라면 감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 그 시대의 출마의 변이요 취임사의 수사학이었다.지금 와서 그 시대의 그런 정서를 위선이요 이중성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그로 인해 빚어진 부작용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위선과 이중성은 그 시대의 개인과 사회가 모두 최소한의 도덕성, 최소한의 겸양과 절제와 분수를 지키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자신의 능력을 시장에 내다 팔기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세계에만 침잠하는 많은 은사들이 있었다. 정치나 시류와는 무관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학자,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이 그 어떤 권력자보다도 존경을 받곤 했다. 전국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그렇게 빛나는 이름들을 몇몇씩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반장선거에서 라이벌의 이름을 써내는 아이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모든 공직자들은 보는 이가 낯뜨거운 청문회석상에서도 자신이 적임자임을 끝까지 주장한다. 각종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무대로 나서야만 하는 시대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드러내야 하는 세태다.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가를 따진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처신과 변신이다. 자기 전공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지명도를 얻은 사람들이 무슨 정해진 코스처럼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한 흐름이 되고 말았다. 물론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학자 출신이라고, 전직 CEO라고, 시민운동가라고 해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고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인생의 마무리를 정치판에서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다. 왜 그들은 전문가로서의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제대로 성숙하고 민주화된 사회는 그 동력이 정치권력에 편중되지 않고 각 분야에 고르게 균분되어 있어야만 한다. 원로 학자, 예술가, 언론인, 시민운동가의 한 마디가 대통령의 한 마디와 맞먹는 비중을 가지는 사회라야만 제대로 살 맛이 나지 않겠는가? 말로는 탈정치의 시대요 프로들의 시대라는데 70년대나 80년대가 아닌 지금도 끊임없이 정치권으로 유입되어가는 전문가들의 행렬은 그래서 안타깝다.또 옛날 이야기를 하자. 문인단체의 회장은 커녕 대학의 학과장 자리까지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문화훈장 또한 본인 생전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은 생전의 어느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치권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막상 본인이 그런 제의를 받았을 때 거절하기가 쉽겠습니까?라는 제자의 우문에 대한 현답이었다. 그런 제의 자체가 오지 않도록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처신이다. 말 그대로 백가쟁명의 오늘을 바라보며 새삼 그런 선생들이 그립다. 그런 말씀들이 듣고 싶다. 아니다, 그런 분들을 기릴 줄 알던 옛날이 그립다./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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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4.27 23:02

[금요칼럼] 기초과학 투자없인 미래없다 - 김승환

현재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은 지난 세기 혁명적인 과학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무선전신, 비행기, 플라스틱, 자동차, TV와 페니실린의 발명은 세계적 대중잡지 라이프가 선정한 '역사를 뒤흔든 100대 사건'에 들었다. 이제 우리는 현재 전자혁명의 산물인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 MP3 등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TV는 80년 전, 컴퓨터는 60년 전, 반도체는 40년 전, PC는 30년 전, MP3와 웹은 15년 전, 한 세기가 안 되는 발명의 역사를 통해 문명의 이기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우리 생활 속에서 첨단기기들은 이제 당연한 듯 빠르게 수용되고 있지만, 이러한 놀라운 과학기술 혁명을 가능하게 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막상 소홀하기만 하다. 기초과학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로,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기초과학은 창의적 과학기술의 원천으로, 기초과학 없이 선진 과학강국이 될 수 없고,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세계적으로도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는 추세이다.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국가적 연구 지원이 주로 응용개발 및 목적 지향적 중대형 규모의 연구로 과도하게 집중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의 창의성이 힘을 발휘하는 개인 주도의 소규모 기초 연구가 소외되고, 수학물리 화학 등 순수 기초과학 분야의 다수 연구자들이 점차 고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중 대학에서의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개인소규모 기초연구 예산은 전체의 1%도 되지 않는다. 대학의 경우 연구 인력의 70% 이상이 집중해 있고, 기초 연구예산의 투자대비 연구효율이 월등하게 높다. 현재 대학에 소속된 기초과학 연구인력 중 단지 4.4.% 만이 개인 연구지원을 받고 있어, 절대 다수가 연구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특히 신진연구자와 지방에 소재한 연구자의 경우 진입 장벽과 높은 경쟁률 그리고 지원의 불연속성 때문에 연구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의 기초연구비 비율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 수준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 국가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고등교육의 국가경쟁력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대학에서의 기초연구 인력 지원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강국인 캐나다의 경우 전체 교수급 연구 인력의 3/4 이상에 대해 적정 수준의 기초연구비를 보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아직도 경제력 대비 과학의 질적 수준은 세계에서 평균 이하에 머물러 있다. 고등교육의 글로벌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가까운 미래에 과학기술의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기초연구 지원도 선진국형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기초과학 지원을 통해 연구효율이 높은 대학의 잠재 연구역량을 극대화하고, 기초과학 기반연구 인력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하여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 신청 후 지원이라는 수동적 방식을 탈피하여 과감하고 능동적인 선제 투자로 기초 연구 잠재역량을 대규모로 발굴 육성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초과학의 연구자들이 창출하는 창의적인 발명과 발견이 언젠가 미래 사회의 우리 생활 속으로 부메랑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최근 수학,물리,화학의 3대 학회가 '기초과학 학회협의체'를 새로 결성하고, 큰 위기에 빠진 '풀뿌리 기초과학'을 살리는 데 국가적인 힘을 결집하고자 나섰다. 기초과학에 대한 따뜻한 국민적 관심과 과감한 국가 지원을 통해 기초과학의 기반 연구인력망이 구축되면 창의적 기초 연구 생태계의 근간이자 선진과학강국으로 가는 성장 엔진이 될 것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가속화되는 글로벌 무한 경쟁의 격랑을 헤쳐 나갈 미래 세대를 위한 소중한 선물임을 명심해야 할 시점이다. /김승환(포항공대교수물리학)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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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4.20 23:02

[금요칼럼] 불안과 의심 없는 세상을 꿈꾸며 - 이해인

서울 쪽에 몇군데 특강이 있어 약 열흘간 자리를 비웠다가 내가 머무는 부산 광안리 수녀원에 오니 그 새 살구꽃은 지고 복숭아꽃 벚꽃 자두꽃 모과꽃 자목련이 활짝 피어 나를 반기고 있었다.심한 황사바람이 우리를 놀라고 힘들게 하였지만 때로는 꽃구름을 만들며 피워오르는 봄꽃나무들이 곁에 있어 웃을 수 있었다. 꽃들이 다 지기 전에 밀린 편지를 써야지 마음 먹고 엊그제는 우선 급한 것부터 몇통 쓰고 해외에 갈 소포도 몇 개 준비 해 당장 우체국에 가려다가 약간의 몸살기가 느껴져 일단 미루고 평소보다 일찍 침방으로 올라왔다. 다음날 오전 사무실에 내려가 컴퓨터 옆 서랍장을 여니 내가 봉투에 넣어 둔 우편발송비 일체와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보관해 둔 도서상품권들 그리고 주교님과 스님으로부터 설날 받은 세뱃 돈봉투까지 몽땅 없어졌다. 내가 15년을 애용하던 소형 올림푸스 카메라까지 들고 가 버린 그 검은 손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얀조가비와 솔방울과 고운 편지지로 가득한 자그만 글방에 겁도 없이 들어와 지갑에 있던 동전과 천원짜리만 그대로 두고 간 그는 생계형 도둑일까, 단지 용돈이 귀해 실례를 범한 젊은이일까...아니면 평소에도 이 방에 곧잘 드나들었던 손님들 중의 한 사람일까. 나름대로 온갖 상상을 하며 우리 수녀님들에게 보고하니 '사람 안 다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고 위로하지만 마음이 내내 착잡하고 우울하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수녀님은 동정심이 많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으니 앞으로도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도 집중적으로 많이 듣는다. 평소에 문을 더 열심히 잠그고 다닐 걸,귀중품은 사무실에 두지 말고 침방에 둘 걸하고 자책 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얼마 전에는 어느 지인이 인터넷으로 보내 준 오십견의 아픔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한참 웃은 일도 있는데 하필 지금 왜 그 이야기가 생각 나는지 모르겠다.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 가 집 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해도 안 들어서 다그치니 오십견이라 못 든다고 했다. 마침 강도도 오십견이라 둘이 앉아 오십견 이야기만 하다가 강도질도 못하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서로 연락하여 함께 치료를 받으러 가서 치료비를 강도가 냈다고 한다 실화인지 꾸며낸 이야긴지 모르지만 무척 인상 깊고 따뜻한 이야기라며 우린 저마다 한마디씩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낭만적인 유머 조차 멀게만 느껴진다. 교묘하고 완벽한 각본으로 접근해오는 이들에게 내가 지금껏 크고 작게 사기를 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내가 매일 안심하고 일하던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무섭고 불안하여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문소리만 나도 놀라고 평소에 믿던 사람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의심병 또한 봄날의 도둑이 준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죄송합니다. 이래선 안 되는 줄 알지만 꼭 필요해서 잠시 빌려갑니다. 제가 갚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건강하시기를...이런 쪽지라도 하나 써놓고 가면 좋았을텐데....하고 혼자 웃어본다. 거짓말의 연속으로 나를 힘들게 하였던 어느 청년이 꼭 10년만에 교도소에서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일이 맘에 걸려서 용서를 구하지만 그 때 진 빚을 수녀님께는 갚을 길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으로 갚겠다면서....나는 잠시 감동하여 그렇게 하라고 답을 했던 것 같다.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방에는 책들만 있구나/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피천득님의 사랑스런 시 꽃씨와 도둑에 나오는 맘씨 고운 도둑을 그려 본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왔다가 아무것도 탐낼 것 없고 가져갈 것 없을만큼 청빈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고요히 다짐해 본다. 꽃도둑 책도둑은 쉽게 용서가 되지만 소임장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간 그 도둑은 쉽게 용서가 안 되는 요즘...가뜩이나 밤에는 불면증으로 고생인데 해외의 친지가 보내 준 라벤더향을 코에 발라도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지고 잠이 안 와 걱정이다. 부활시기에 입을 흰 옷을 다림질하며 기도한다. 부디 우리나라의 경제가 골고루 좋아져서 보통사람들도 나쁜 생각 안 하고 걱정없이 살 수 있기를...밤이나 낮이나 도둑이 들까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도 될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기를...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나눔과 공동선을 향한 노력에 최선을 다해 깨어 있고 투신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해 본다. /이해인(수녀.시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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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4.13 23:02

[금요칼럼] 샌드위치코리아와 한미FTA - 임동욱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은 미국 뉴욕 시립 발레단을 비롯한 세계적 발레단이 연말이면 단골로 공연하는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아끼고 특히 아이들을 환상과 희망의 나래로 이끄는 소위 명품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명곡으로 인간 정신을 상징하는 작품의 하나인 넛크래커가 태평양을 건너서는 우리의 약점과 치부를 단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된 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지났다.우리의 경우에 넛크래커는 미국의 컨설팅 기관인 부즈 앨런과 해밀턴의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연유한다. 1997년 우리에게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한참일 당시 부즈 앨런과 해밀턴 보고서는 한국경제는 저비용의 중국과 고효율의 일본의 협공을 받아 마치 넛크래커 속에 끼인 호두처럼 되었다고 지적하며, 변하지 않으면 넛크래커 속의 호두처럼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진단했다. 변하지 않으면 깨지기에 많은 진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구조개혁이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새틀짜기이자 지난 10년 동안의 개혁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그토록 줄기차게 추구해온 사회변혁의 대가 때문인지 10년 전에는 생경하기만 했던 신자유주의니 고용의 유연성 같은 말들이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아직도 세계문명표준에 걸맞지 못한 탓이겠지만 금년 들어서 대기업 총수가 화두로 삼은 샌드위치 코리아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샌드위치 코리아는 넛크래커 보다 범위가 넓고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니 사실 나쁘게 진화한 것이다. 1997년 당시 넛크래커는 우리나라 기업이 처한 수출환경을 지적하는 말이었는데 점차 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이 떨어지고 후발개발도상국에는 가격 경쟁력이 없는 나라 경제의 단점을 대변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샌드위치 코리아는 경제는 물론 외교, 안보, 문화, 사회 등 나라의 각 분야에 내재되어 있는 약점이나 한계를 부각하는 말이 되고 있다.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해석하기에 편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넛크래커나 샌드위치가 국내외의 여러 곤궁에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비유인 것은 틀림없다. 심지어 스포츠의 세계도 샌드위치론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세계 골프계를 호령하는 타이거 우즈의 선택적 출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 PGA의 현실도 PGA 정규투어를 후원하는 기업들과 골프 팬, 그리고 타이거 우즈 사이에 끼여 있는 샌드위치론으로 설명하면 설득력이 강해진다.넛크래커나 샌드위치 코리아를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법은 반도체, 가전제품, 휴대폰 등에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로 무장하여 각 분야에서 글로벌 톱 10으로 자리 잡은 기업들과 자동차, 제철, 조선, 항공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톱 10 후보군으로 약진하고 있는 기업들의 비전과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기업은 가격은 일본보다 낮고 기술은 중국보다 앞서고 있기에 이를 역(逆) 넛크래커 현상으로 부르기도 한다. 97년 이후 10년 세월동안 넛크래커가 잔존하고 샌드위치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역 넛크래커가 나타난 것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최근의 핫 이슈들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한나라당 탈당과 한미 FTA 협상 타결 역시 역 넛크래커나 역 샌드위치가 되어야 한다. 우선 정치인 손학규의 경우 탈당을 둘러싼 관념 대립 때문에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그리고 국민들 사이에서 현재 샌드위치가 되고 있다. 향후 정치역정에 관계없이 현재의 샌드위치 상황을 극복하여 역 샌드위치가 되는 지혜와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그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것이다. 한미 FTA 협상 타결 역시 넛크래커를 극복한 기업들에게서 향후 방향과 정책과제를 찾을 수 있다. 협상을 통해 양보한 것과 얻은 것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들을 역으로 샌드위치 시켜버리는 지혜와 비전, 그리고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조선말의 타의에 의한 개국과 1960년대의 수출입국에 의한 개국에 이어 한미 FTA 협상 타결이 명실상부한 제3의 개국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헤어날 수 없는 온갖 나쁜 것을 다 갖고 있는 판도라 상자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이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을 부둥켜안고 보통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을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넛크래커와 샌드위치가 나라의 현실이든 개인의 정치 역정이든 간에 이들을 역(逆) 넛크래커와 역 샌드위치로 만드는 비전과 전략, 그리고 희망을 보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 전체가 역 샌드위치가 되는 길이니까 말이다. /임동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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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4.06 23:02

[금요칼럼] 2등을 보라 - 고원정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 한 분은 가끔 이런 말을 하시곤 했다. 선거에는 은메달이 없어. 청년시절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경력이 있다고 알려진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만 정작 본인의 표정은 늘 어떤 회한에 찬 것이었다.2등이라고 하면 어쩐지 맥빠지게 들리는 게 사실이지만 2등은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때로는 1등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선 글 쓰는 일에서도 그렇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이나 현상모집에서 가장 빼어난 자질을 보이는 작품은 2등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든지, 학생의 작품으로 믿기 어렵다든지 하는 심사평이 뒤따른다. 1등을 차지하는 작품은 내용부터가 학생다우면서 단정하게 완성도를 보인 쪽이기 십상이다. 훗날의 문사들은 1등보다도 「아까운」 2등들 중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기성문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나 각종 신인상도 다르지 않다. 남다른 소재에 남다른 기법을 구사하는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선이 되기보다는 최종심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역시 2등이다 .주목받는 작가들의 대부분은 약속이나 한듯 이 방면의 이력들이 만만치 않다.학교성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1등을 하려면 전과목에 걸쳐 우수한 성적을 내야 되지만 2등은 어딘가 한 부분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2등을 1등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월드컵 축구의 역사에도 위대한 2등팀들이 있다. 1954년 스위스 대회의 헝가리와 1974년 서독대회의 네덜란드가 그 팀들이다. 헝가리는 서독에게 우승컵을 넘겨줬지만 4-2-4라는 새로운 포메이션을 정착시켰고, 네덜란드 또한 서독에게 져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토털 사커의 원조로 명성을 얻었다.육상 장거리 경주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처음부터 선두를 달리는 주자보다는 2~3위를 유지하던 이가 막판 스퍼트로 우승을 차지하곤 하지 않던가.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가장 기록이 좋은 선수의 뒤를 발 뒤꿈치를 밟을 듯이쫓아가라고 자기 선수에게 가르치곤 한다. 무서운 2등들이다. 다시 은메달이 없다는 정치 쪽으로 돌아가보자. 역시 우리는 늘 1등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발휘할 것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선으로 말하자면 향후 5년은 1등한 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2등을 눈여겨 보아야만 한다. 2등이 누구이며 그가 낙선 후 어떤 행보를 보이는가는 다음 5년의 흐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무엇보다 2등을 할만 한 표를 준 지지층이 있기 때문이다. 1987년의 2등은 김영삼씨였다. 집권은 노태우 대통령이 했지만 정작 그 임기를 지배한 것은 민주화의 열기였다. 92년 대선에서 사실상 한 뿌리인 양김이 12등을 했다는 점은 민주화와 개혁이 계속되리란 예고라고 해도 좋았다. 97년과 2002년에 연거푸 2등을 한 이회창씨의 지지자들은 87년 이후 코너에 몰려있던 보수세력들을 되살려냈다. 이래도 2등이 중요하지 아니한가?물론 2등이란 본인에게는 불만스러운 자리다. 끝내 1등에 오르고 싶은 이들은 2등으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해야 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87년 대선에서 한계를 느낀 김영삼씨는 3당합당이라는 선택으로 1등이 될 수 있었다. 87년에 3등, 92년에 2등을 한 김대중씨와 97년에 1등을 한 김대중씨는 분명히 달랐다. 이른바 뉴D」다. 김종필씨와의 제휴도 마다하지 않았다. 2등에 그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회창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97년에 2등할 때나 2002년에 2등할 때나 변함이 없는 그 이회창이었다.그러므로 우리는 2등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2등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선거에는 은메달이 없다는 옛 선생님의 말은 절반밖에 맞지 않는다. 권력은 분명히 1등의 것이지만 시대의 흐름까지 그렇지는 않다. 2등을 보라. /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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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30 23:02

[금요칼럼] 과학기술 종교를 만나다 - 김승환

1966년 신은 죽었나?라는 표제가 저명 시사잡지 타임 지의 표지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과학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윤리와 생태환경 문제 등이 대두되며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로 증대되는 추세이다.작년 과학상식에 대한 한 설문에서 미국 국민의 62%가 진화를 믿지 않고, 53%가 지구 나이가 6,000 살이라고 믿는다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첨단과학과 독실한 신앙이 교차하는 미국의 경우 2004년 일부 공립학교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교육 시 진화론의 대안으로서 지적설계론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이 시도는, 1년 만에 학부모와 진보진영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하는 지적설계론 옹호그룹의 큰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하고, 새로운 예측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학계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인 망상의 신에서 과학저술가 리차드 도킨스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믿음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국가사회적 역할이 증대되며 과학기술과 종교와의 활동 영역이 점점 더 중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조주의적 종교와 맹목적 과학주의는 갈등과 충돌을 초래한다. 첫 해결 방향으로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통한 안정이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종교는 믿음과 권위, 과학은 사실과 검증 등 상호 차이를 부각하고 그 활동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상호 논리적 근거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 있다. 한편 과학과 종교의 섣부른 융합시도는 오랜 역사적 뿌리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자칫 지적설계론과 같이 대중을 오도할 수도 있다.한편 과학의 가치중립적이고 무신론적 측면과 일부 과학주의 주장으로 인해 종교계의 과학에 대한 오해와 우려도 큰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과학은 실제 작동하고 있는 체계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점점 더 자연의 많은 부분이 과학을 통해 설명되어지고 있다. 태양계와 은하의 발견을 통해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빅뱅과 멀티버스 (multiverse) 등 첨단 물리이론은 수많은 우주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한편 유전자, 카오스, 복잡계, 뇌과학의 발전으로 과 마음이란 미지의 영역이 개척되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상호교류와 보완협력을 추구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존 호트 방식으로 상호 겸허한 자세로 접촉을 시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과학자는 기본적으로 정직하게 측정과 재현이 가능한 영역에서 합리적 접근을 추구하지만, 개인적 신념도 포함된 과학의 코스가 반드시 직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종교인도 합리적 토론과 비판이 허용되는 지적 정직성을 통해 합리적 우주관의 형성과 체계적인 도그마의 극복 노력이 필요하다. 과학적 발견은 종교적 의미의 틀 안에서 해석되되, 반드시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과학적 신념이 종교의 지평을 넓혀주고 종교적 신념의 관점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최근 국내외에서 과학계와 종교계의 상호 대화와 교류 노력이 활발해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1987년 이후 티베트 승려와 과학자가 함께 정기적으로 모이는 마음과 인생에 대한 학술회의, 작년 11월 노벨상 수상자와 철학자 등이 치열한 토론을 벌인 신앙을 넘어, 그리고 지난 주 국내에서 과학기술부와 과학문화재단이 주최한 과학기술, 종교를 만나다라는 주제의 새로 보는 과학기술 포럼이 대표적 사례이다.최고의 천재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은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없는 종교는 눈이 멀었다라고 했다, 종교와 과학 모두가 인간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문에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달라이라마의 조언처럼 고대의 지혜와 현대과학이 함께 긴밀하게 협력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할 것이다./김승환(포항공대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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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23 23:02

[금요칼럼]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3월의 바람 속에/ 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아직은 시린 햇빛으로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당신을 만나는 길엔/ 늘상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살아있기에 바람이 좋고/ 바람이 좋아 살아 있는 세상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 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 당신이 계시기에나는 먼데서도/ 잠들 수 없는 당신의 바람/어둠의 벼랑 끝에서도/노래로 일어서는 3월의 바람입니다 --자작시'3월의 바람 속에'에서어느 해 봄 내가 받은 신학생의 편지에 3월의 강변에서 불러보는 나의 누이 같은 수녀님...으로 시작하는 시적인 표현이 맘에 들어 몹시 가슴이 뛴 적이 있습니다. 남쪽의 봄은 매화가 제일 먼저 알려주고 그 다음은 천리향이 핍니다. 바람 속에 향기가 먼저 말을 건네오면 '응. 알았어 벌써 꽃을 피웠다고? 정말 반가워!'하며 가까이 다가가서 향기를 맡곤 하였지요. 가을엔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지지만 봄에는 왠지 마음이 들뜨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어 싫어했는데 갈수록 봄이 좋아짐은 아무래도 나이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에겐 나도 덩달아서 그래요!'하고 맞장구 치지 않을수가 없답니다.나도 이제 봄이 좋아졌거든요.오늘 불쑥 처음으로 나를 찾아 온 젊은 독자인 그대와 함께 광안리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그대가 나에게 해 달라던 덕담을 이 편지로 보충할까 합니다. 날씨가 차갑고 바람 많이 부는 날은 하늘과 바다의 빛깔도 더욱 맑고 푸르고 투명함을 우리는 함께 체험했지요? 우리네 삶 역시 시련의 바람을 잘 이겨내야만 튼실한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 있음을 바닷 바람 속에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3월,내가 임의로 '봄비를 기다리며 첫 러브레터를 쓰는 달'이라고 명명한 3월을 나는 어느 달 보다도 좋아한답니다. 꽃샘바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네요. 시간을 아껴 써라. 하루 한 순간도 낭비하지 말고 소중하게 살아라. 잎샘바람은 또 말하네요.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넘어지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 죽지 말고 다시 부활하는 법을 배워라.그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의 우리는 절제와 인내와 기다림의 덕목을 많이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요. 식사시간이 관습상 더딘 프랑스의 식당가에서 후식을 끝까지 못 기다리고 자리를 뜨는 한국인관광객들의 '빨리 빨리' 병에 대해 풍자한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답니다. 어느새 이 빨리빨리 병은 도처에 스며들어 우리 삶의 일부가 된 듯합니다TV도 좀 더 지긋이 보지 못하고 쉴새없이 리모콘을 눌러대는 우리의 모습,인터넷의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초조해하고 불평하는 우리의 모습, 버스나 전철이 조금만 더디 와도 버럭 화를 내곤 우리의 모습에서 조그만 슬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나가서도 곧 그 다음에 이어 질 약속에 정신을 파느라 현재의 대화에 열중하지 못하는 모습, 한 집안의 가족들끼리도 예약을 해야만 한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만큼 바쁘게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숨차게 바쁜 것인지?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성급함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오늘 3월의 바람이 되어 그대와 나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에 본의 아니게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 질 적마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쉿! 아주 조금만 기다리세요.아직은 식별이 필요하니!'하고 어질게 달래줍니다. 절제의 미덕을 잃고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이 마구 튀어나오려고 할 적엔 '잠깐! 두고 두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니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해요'하고 슬기롭게 달래줍니다. 이리하다 보면 함부로 치닫던 마음도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길이 잘 들여져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거에요. 이 봄에 우리는 봄햇살 닮은 웃음으로 일상의 길을 부지런히 달려가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로 해요.많은 이들이 즐겨 읽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하는 글로 이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건강한 아이를 낳든/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사회 환경을 개선하든/자기가 태어나기 전 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만들어놓고 떠나는 것/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이해인(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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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16 23:02

[금요칼럼] 세계적 국가이벤트 유치 힘쓰자 - 임동욱

비교적 짧은 역사지만 부침이 있어왔던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국운이 괜찮았던 시절을 뽑으라면 1986년부터 1988년 동안의 3년 세월을 선택하고 싶다. 그 시절에 산업화를 넘어서 민주화 시대를 열었고 연유야 어찌됐든 건국 이후 최초로 국제수지 흑자달성에 성공했으며 주가가 1,000을 넘기도 했다. 이후 흑자관리 철학과 전략의 부재로 성장의 잠재력 배양 및 확충에 실패했고 부동산값만 폭등해 나라경제에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잔뜩 끼게 됐지만 말이다. 1986년부터 3년의 세월이 괜찮은 또 하나의 이유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라는 메가 국가 이벤트의 성공이 있기 때문이다. 86년에는 그간 넘지 못했던 일본을 뒤로 하고 세계의 스포츠 강국인 중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스포츠 국력이 발돋움 했다. 더 나아가 88년에는 이념대립으로 얼룩졌던 80년(모스크바)과 84년(LA)의 반쪽 올림픽을 전 세계인의 한마당 축제로 만들면서 4위를 차지하여 온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기억도 새롭다. 88년 이후 우리는 올림픽 때 금메달을 몇 개 정도 따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세계 10이내에는 들어야 국민이 그 성과를 인정하게 되었다. 굳이 아름다운 추억인 지난 일들을 들먹이는 이유는 최근 대구와 평창이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2011 세계육상선수권과 2014년의 동계올림픽 때문이다. 양 대회 유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유치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짚어보자. 먼저 지난 몇 차례의 메가 국가 이벤트의 성공을 통해 국가 이벤트 개최는 웬만하면 수지가 맞는 장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88 올림픽의 경우 경기장과 주변도로 건설 등 투자지출액(1조 8931억원)과 올림픽 조직위의 경상지출 등 소비지출액(5533억원)을 합친 지출총액(2조4464억원)의 2배 정도 되는 4조8784억원 규모의 생산유발효과를 얻었다. 부가가치 창출효과(1조8859억원)와 고용유발효과(삼십 사만여명)도 고려하면 88올림픽은 분명 흑자대회였다. 평창 동계 올림픽은 역대 최고의 흥행실적을 기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94년 릴르함메르부터 2006년 토리노 올림픽까지 최근의 동계올림픽은 모두 적게는 420억원부터 많게는 580억원 규모의 흑자를 낸 대회였다. 평창 올림픽의 경우 직접 투자지출액(4조1764억원)의 3.5배가 넘는 15조원 규모의 생산유발효과와 7조원의 부가가치 창출을 기대하고 있으며 고용유발효과는 22만명 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육상선수권 역시 예외가 아니라 선수촌 아파트 건립비 등 856억원 정도의 비교적 적은 투자로 35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와 1500억원의 부가가치 창출효과 등 총 50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가시적인 효과 외에도 메가 국가이벤트는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균형발전, 정보기술 및 산업발전, 국가와 지방의 브랜드 제고와 관광수입의 증대 등 정확하게 따질 수 없는 파급효과를 초래하는 것 역시 물론이다. 둘째로 비록 다른 나라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때로는 통치권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던 국가 이벤트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국가의 대사 앞에서는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장관을 경험해왔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힘이자 저력이다. 여기에는 영남은 물론 호남도 없었으며 세대간의 단절도 없었다. 그저 온 국민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대한민국만이 있었다. 이러한 메가 국가 이벤트의 정점에 2002년 월드컵이 있었다. 전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붉은 악마가 되어 펼친 대서사시의 향연에는 온 나라를 붉게 물들였던 사람의 물결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던 함성이 있었고, 그날의 감동은 여전히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대립과 분열의 시대를 종식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메가 국가이벤트의 개최가 더없는 묘약이기에 양 대회의 유치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86과 88은 서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단핵구조로 발전해온 중앙의 시대의 당연한 결과물이었고 당시의 시대조건이었다. 지금은 지방이 세계를 직접 상대하는 지방의 세계화(glocalization) 시대이다. 국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세계-국가-지방의 도식을 벗어나 세계와 지방이 직접 연결되어야 하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 국가 내지는 중앙정부는 세계를 상대하는 지방의 일이 국가 전체의 일이 되도록 후원해주고 지역인의 관심사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일이 되도록 뛰어야 한다. 국가 이벤트의 성공적 개최만이 아니라 유치 역시 정권의 역사적 위대성을 평가할 때 업적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이번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살려서 오는 2011과 2014년이 86과 88을 넘는 국운 융성기가 되어야 한다. /임동욱(충주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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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09 23:02

[금요칼럼] '원시인'의 변명 - 고원정

휴대전화도 없고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컴퓨터도 쓰지 않는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원시인이니 석기시대 인간이니 하고 놀리곤 한다. 현대인의 필수품이라 할 휴대전화, 자동차, 컴퓨터 없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이 셋 중 하나만 없어도 어떤 강박증에 가까운 불편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없이 살아보면 그런대로 살 만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에 변명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휴대전화는 애초부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삐삐라는 호출기가 나왔을 때부터, 영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든지 서로를 호출할 수 있다는 방식이 편리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삐삐, 삐삐 하고 다급한 신호음이 울리면 술자리에서도 들던 잔을 내려놓고 허리춤을 들춰보는 광경은 무슨 풍자극의 한 장면 같기만 했다. 휴대전화로 바뀐 지금도 마찬가지다. 차에 앉아서, 길을 걸어가면서, 심지어는 숨가쁜 산행길에서도 누군가와 중얼중얼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이 내게는 지금도 코미디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작은 송수신탑이 되어 있는 것만 같다. 24시간 내내 무언가를 송신하고 수신해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우울증에 빠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하니 나는 오히려 그 쪽이 걱정스럽다. 글쟁이로 살아가는 나날에 분초를 다투는 화급한 일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이렇게 지내기로 한다. 물론 한 달이면 한두 번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런 불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다.자동차 또한 나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아니, 술 마시는 일이 본업에 가까웠던 젊은 시절을 보내다 보니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자가용이 한창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90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아직 차가 없는 집이 더 많다, 나는 그 쪽이다라며 이상한 고집을 세우기도 했다. 그 고집 때문에 내 아내는 면허를 따놓고도 1년 이상을 숨겨야 했고, 또 1년 이상을 조른 끝에야 작은 차를 한 대 구입할 수 있었다. 차가 생긴 후에도 열이면 아홉 번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했으니 식구들이 머리를 흔들만도 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이미 10년 넘게 굴린 아내의 차를 얻어타는 일이 잦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가 가장 편안하다. 어줍잖은 아이디어들도 대개 그 안에서 건져내곤 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핸들을 잡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게 다 기계치이기 때문 아니냐고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곤 한다.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고민거리는 컴퓨터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일에서도 컴퓨터를 제쳐놓을 수는 없는 시대가 아닌가.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먼지 뒤집어쓴 책 속에서 자료를 찾는 데까지는 이해를 하겠다고들 한다. 하지만 편집자를 위해서라도 원고만은 온라인으로 보내줘야 하지 않느냐고들 한다. 동의하지만 결단은 쉽지 않다.사실 나는 대학시절부터 글쓰기의 기계화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로서는 거금을 주고 외제 타자기를 구입해서 한글 타자기로 개조해 사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원고지로 돌아왔다. 전업작가로 나선 90년대 초에는 최신 기종의 워드 프로세서를 사서 한동안 유용하게 써먹었지만 결국에는 다시 펜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창 의욕에 넘쳐 능률을 생각할 시기에는 기계를 찾았고, 어떤 한계에 다다라서 본질을 생각해야 할 무렵에는 수작업으로 복귀한 셈이다. 컴퓨터를 쓰던 펜을 쓰던 재능의 부족함이야 숨길 수가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원고지 위에서 무언가를 더 찾아볼 생각이다.휴대전화 없고, 운전 못하고, 컴퓨터도 쓰지 않는 나의 3무행각은 종종 술자리의 안주감이 되곤 한다. 언젠가 그런 자리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너 참, 골프도 안치지? 그건 또 이유가 뭐냐?골프를 치지 않는 데도 변명이 필요한 세상이다.사족을 달자. 이 원고는 딸아이의 손을 빌려 E-mail로 보내야 한다. /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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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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