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당내 자무기구인 국가혁신위원회가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회창 총재가 심혈을 기울여 출범시킨 기구라고 한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참여 인사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첫 모임장소를 비밀에 부치는 등, 운영이 영 투명하지 못하다. 국가혁신위라는 명칭의 과대 포장이야 어떻든, ‘21세기의 새로운 국가경영모델을 내놓기 위해 만든 조직’의 명쾌한 논리에 어긋난다.
의당 있을 수 있는 조직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기구라는 주장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것 조차 없다.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으나 당장의 혁신 방안을 마련하고 여세를 몰아 ‘준비된 대통령’을 전망한들 어떠리 싶다. 옹색하게 숨기고 감추는 모양이 오히려 민망하다.
‘일요신문’이 입수 공개한 위원회의 영입 대상 명단에 대해 한나라당은 ‘습작일 뿐’이라고 했지만 당초의 ‘안’은 꽤 구체적이다. 각계 각층 인사를 자문위원 및 7개분과 위원으로 나누어 포진시켰다.
한나라당이 작성한 문건에 포함된 이들의 반응은 물론 여러가지다. 일방적인 발표라고 부인하는가 하면 유보 조건을 달고 나온이도 있다. 통틀어 노출을 꺼리고 공개적으로 그런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점에 주목한다. 한나라당은 따라서 그들의 이름을 가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확답을 받았을 법한 사람마저 대외비로 숨기는 바람에 모처럼의 공조직 부상이 익명의 조직으로 다시 내려앉아 잠행중인 셈이다.
하고 보면 일신의 정치적 소신을 더 좀 확신하고 분명히 천명한 사람이 이제나 저제나 참 드물다. 낮은 단계의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못이기는 척 나서는 지식인의 이중적 속성을 불바불 떠올리게 만든다. 인재풀이 되었건 싱크탱크가 되었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적극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좋은데 말이다.
뒤에서 돕는다면 모를까 앞장 서기는 싫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정치적이다. 정가의 불투명한 밀실정치를 그토록 비난하다가 스스로 그런 자리로 숨어드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당당한 태도가 소망스럽다. 그렇지 못할 바엔 애초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거나 얼씬대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또 새삼 느낀 것은 정치세력이 도움 받기를 원하는 대학교수가 무던히 많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이 희망하는 외부 인사 2백5명중 대학교수가 1백15명(56.1%)이다. 국책연구소 연구원 36명(17.6%)까지 합치면 광의의 학계 인사가 모두 1백51명으로 전체의 73.7%를 차지한다.(일요신문 집계)
이 가운데 호남·충청권 대학에 적을 둔 교수는 전무하다는 것도 특이하다. 서울과 수도권 중심이기 때문에 지방대학은 경북·강원대 등 일부만 포함되었다. 교수 개개인의 전문성을 빌려, 국가비전, 미래경쟁력, 민생복지, 교육발전, 정치발전, 통일외교, 문화예술 등에 관한 정책을 세우기 위한 두뇌집단을 그렇게 골랐다.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다. 역대 정권들이 다투어 그들의 전문성에 힘입어 시책을 꾸려나갔다. 마침 엊그제 발표된 대통령자문 정책위원도 6개분과 52명 가운데 40명이 대학교수였다. 그밖의 각부문에도 일일이 예를 들기 힘들 정도로 교수들의 전방위(全方位)진출이 왕성하다. 모든 사회 구조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 갈고 닦은 전문성을 현실에 접목시키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교수들의 정책 참여 추세가 이토록 활발하고 절실할까 5·16이후부터 두드러진 현상인데 다 늦게 그 연원을 따질 것이 없다. 그보다는 팍팍하고 고달픈 일에 전력 투구하는 소수 교수들의 다양한 활약에 고무된다.
이런 자리에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기에는 미안한,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의 저런 집필활동이 대표적인 예의 하나다. 지식인의 위선을 끊임없이 들추고 파헤치는 그의 글쓰기에는 사서 고생하는 사람의 당찬 외로움이 때때로 어른거린다. 할 망정 미덥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건, 정당의 도움닫기 구실을 하던 안 하던 상관할 바 아니다. 다만 거취가 분명할수록 좋다는 명제를 이번에도 재삼 재사 확인한다.
/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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