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多數決)은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서 의미가 있다. 첫째 과학적 지식이나 개념 등에는 적용할 수 없다. 둘째 모든 개인은 동등하다. 셋째 모든 개인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넷째 상대적 가치를 대상으로 한다.
다수결의 조건은 고매한 인격의 수양자나 고도의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대입 논술의 한 켠에 자리할 정도로 이미 보편화된 내용이고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의사결정 도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사용하다 보니 우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내용이 마치 절대적인 가치인 양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한다. 사실은 상대적인 가치판단의 한 결과일 뿐인데도 말이다. 만약 소수이기는 하지만 정당하고 올바른 의견이 배척된다면, 다수결의 원칙은 오직 숫자에만 의존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나 '다수의 횡포'로 전락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판에는 '여소야대'란 말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아마 처음 그리 되었을 때에는 국정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소야대'가 일상사가 되어 버렸고 급기야는 야당이 마음만 먹으면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숫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
이런 '여소야대'는 지난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소위 '발목잡기'의 양태를 통해서 다수결의 역기능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대선은 아마도 세계 정치사에도 길이 남을 희한한 선거로 기억된다. 경선을 통해서 후보를 뽑아 놓고도 지원은 커녕 오히려 사퇴 압력을 가하는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 다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다수가 항상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국민이 원하는 참신하고 유능한 선량이 국회로 진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쳐 놓은 진압장벽이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결권을 위임 받은 다수가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높여둔 장벽때문에 위임한 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의견도 얼마든지 진리를 일 수 있다는 다수결의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치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이 전제된 다수결이 더 절실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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