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 정치부장
그랬다. 11월 29일 토요일의 부안읍내는 평온했다. 이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 반핵광장이라 불리는 부안수협 앞에서 열린 '7만 부안군민 결의대회'는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 평화로웠다.
'경찰계엄 규탄, 핵 폐기장 백지화'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날 대회는 수협앞 도로 1㎞가량이 노란색 물결을 이루었다. 핵 폐기장 반대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이며 모자, 머플러를 감은 군민 1만여 명이 연단을 향해 앉고, 일부는 그 주위를 감싸고 서 있었다. 뒷편에는 민주노총이며 전교조, 농민회 등의 깃발이 나부꼈다.
강희남 목사를 비롯 각 시민사회단체 연사들이 목청을 돋우고 '노무현정부 각성하라' '핵 폐기장 박살내자' '부안군민 승리한다'는 등의 구호가 연신 튀어나왔으나,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정말 놀랄 정도였다. 2만여명의 부안읍민과 8천여명의 경찰력이 붙어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며칠 전이, 언제였느냐는 듯 흐트러짐이 없었다.
독일과 일본의 반핵운동가들이 나서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고 정부의 핵정책과 경찰의 폭력진압을 성토하긴 했으나 평온을 깨뜨리지 못했다. 특히 5시 30분부터 1시간 남짓 진행된 촛불집회는 옷깃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노래공연과 기도 등, 평화 그 자체였다.
경찰의 이날 대응도 어느 때보다 유연했다. 경찰력을 외곽으로 빼낸 탓인지 집회장 근처에는 전경들이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 범부안군민대책위의 평화집회 약속에 대한 화답이었을까, 단계적 철수의 첫단추였을까.
그랬을 것이다. 중재단이 청와대에 대화재개를 위한 7개항의 중재안을 전달, 대화분위기가 무르익어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전날, 김지하 시인이 찾아와 평화시위를 당부하고 국가인권위 관계자들도 지켜보아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날 분위기는 독기가 올라있던 부안군민들의 마음이 상당히 누그러진 듯 보였다. 평화로운 집회가 보장되고 경찰이 최소한의 경력만 남기고 철수한다면 부안은 예전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범대위측의 정신적 지주인 문규현 신부가 말했듯 정부나 경찰의 대응에 분노가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한다면 문제는 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날 문신부가 예로 든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소금행진'은 인상적이었다. 1930년대 값싼 소금을 통해 식민지 인도를 지배하려 한 영국에 대항해, 간디는 소금행진을 벌여 영국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부안에서 전주까지의 3보1배가 그와 같으며, 문신부 자신이 생명을 걸고 하는 단식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정부나 부안주민 모두 지는 싸움을 해왔다. 양쪽 모두 상처로만 얼룩졌다. 정부는 국책사업에 대한 공신력을 잃어 버렸다. 현금보상설에서 지금의 주민투표에 이르기까지 갈팡질팡의 극치를 보여줬다. 주민설득 면에서는 제로에 가까운 정책능력을 보였다. 오직 위도에 핵폐기장을 설치해야 한다는 성급함이 앞 설뿐이었다.
반면 부안주민들도 너무나 큰 상처와 희생을 치렀다. 고속도로 시위를 비롯해 군수폭행, 공공기관 방화 등으로 30여 명이 구속되고 7명이 수배중이며 6백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상가가 연일 철시하는 등 상당수 군민들이 5개월 가까이 생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부안군민을 너무 무시했다. 이전까지는 절차적 정당성이나 핵의 안전성 문제가 쟁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부안사태에 있어 흘러간 레파토리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자존심의 회복이다.
그래야 한다. 부안주민들의 민주적 역량을 인정해줘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정부는 주민투표 시기를 실기(失機)해 버렸다. 중재단이 제안했던 연내 주민투표를 받았어야 했다.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는 게 그나마 찬성 가능성을 높여주는 일이었다. 그 대신 찬반 공청회 등을 요구했어야 했다.
늦기는 했어도 이제라도 중재단이 제시한 1,2월 주민투표를 받는 게 최선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싫다고 하면 못하는 것이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어쩔 수 없다지 않은가.
물론 국가적 이해가 걸린 국책사업을 특정지역 주민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부안현지에 가 보라. 이미 그 단계를 훨씬 넘어버렸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시일내 주민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정부에 대한 감정적 불신만 더욱 깊어질 것이다. 주민 스스로가 평화적 방법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귀한 경험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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