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장성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된지 54년을 맞아, 당시 미군으로 인해 상반된 인생을 살게된 두명의 도민 가운데 한명이 아직도 생존해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군을 도운 주민 가운데 한사람은 유명한 반공투사로, 다른 사람은 밀고자라는 낙인 아래 쓸쓸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안군 상전면 비대치(鼻大峙·일명 코큰이재)에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체포된 딘소장의 일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지난 1950년 7월21일 무주군 적성면 고방마을에 사는 박종구씨(93)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탈진한 미군을 발견한다.
전날 대전부근에서 인민군에 맞서다 실종됐던 미 육군 24사단장 윌리엄·F 딘소장(작고).
박씨는 딘소장을 3일동안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돌봐준다. 9일이 지나고 체력이 회복된 딘소장은 박씨의 집을 떠나 당시 미군 주둔지였던 대구로 향하던 길에 비대치에서 한모씨(작고)를 만나게 되고, 한씨는 진안군 진안읍 운산리의 한 주막으로 딘소장을 안내한다. 그러나 식사중이던 딘소장은 갑자기 주막으로 들이닥친 무장청년들에게 체포됐다는 것.
결국 1950년 9월28일 서울이 수복된 이후 한씨는 딘소장을 인민군에 밀고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 5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한씨는 ‘나는 결코 딘소장을 밀고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수십년간 좌익으로 낙인찍혀 지난 1995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반면 박씨는 지난 1963년 군산비행장에서 근무하던 딘소장의 아들(당시 대령)이 찾아와 아버지를 대신하는 감사의 말을 전하는 등 주위에 유명한 반공투사로 알려진 뒤 평탄한 삶을 살게 된다.
박씨는 “딘소장은 수일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못해 탈진한 상태였지만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등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며 “헤어질 때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주며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념의 소용돌이와 미군과의 짧은 만남속에서 엇갈린 운명이 되어버린 두사람의 삶과 발자취는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한편 딘소장은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지난 1953년 9월4일 풀려나 미국으로 귀국해 81년 8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