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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때 생명의 恩人 찾아서 기뻐요"

첫 총상자 김영찬씨, 원광대 정은택 교수와 특별한 만남

지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첫번째 총사자 김영찬씨(왼쪽)과 원광대 정은택 의과대 교수가 17년만에 해후하고 있다. (desk@jjan.kr)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당시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꺼야.”

 

지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첫번째 총상자 김영찬씨(44)와 귀가하다 이를 발견하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겨 생명을 구한 원광대학교 의과대학병원 호흡기내과 정은택 과장(50·원광대 의과대 교수))이 11일 오전 정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 옛 추억을 담아냈다.

 

이들의 만남은 지난 89년 2월 광주특위 참고인 자격으로 만난 뒤 17년만에 해후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듯 서먹해하던 김씨에게 먼저 악수를 청한 정 교수가 돌이키기조차 싫은 옛 이야기를 또렷하게 엮어갔다.

 

1980년 2월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정 교수는 두달여 동안 경북 영천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받은 후 전남 신안군 증도면 공중보건의로 배치받아 사령장을 받기 위해 전남도청을 다녀 오는 길이었다.

 

정 교수는 당시 시위로 차량운행이 중단되자 동구 계림동까지 걸어서 귀가하던 오후 3시께 계림동 광주고 앞 길을 지나다 고장난 듯 인도에 한 쪽 바퀴를 올리고 서 있는 장갑차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이었던 김씨도 친구들과 함께 북구 중흥동 집까지 걸어서 귀가하던중 짚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봤다.

 

전날부터 무고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맞는 장면을 목격했던 김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들 군중틈에 끼어 맨 앞에 나서게 됐다.

 

이 때 장갑차의 뚜껑이 열리고 총부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공중을 향한 공포탄이 발사됐다. 이어 곧바로 땅을 향해 실탄이 난사됐고 김씨는 아스팔트를 맞고 튀어오른 실탄 5∼6발을 맞고 오른쪽 하복부 및 골반을 다쳐 쓰러졌다.

 

검은 교복 차림의 김씨를 발견한 정 교수는 사람을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입고 있던 흰 점퍼를 벗어 돌리며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군인들은 더 이상 사격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하늘을 향해 총을 세우고 빙빙 돌렸다.

 

정 교수는 김씨를 등에 업은채 50m 가량 떨어진 외과병원으로 들어갔지만 모두 대피하고 간호보조원만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정 교수는 간호보조원과 함께 침착하게 김씨의 배에서 실탄 5∼6발을 빼낸 뒤 상처난 부위를 꿰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인근 목재소에서 남색 포니 승용차가 한 대 나타나 정 교수는 간호보조원과 목재소 사장으로 추정되는 운전자와 함께 김씨를 태워 전남대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김씨는 이틀 뒤 의식에서 깨어났지만 9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김씨는 장 2m 가량과 방광 3분의1을 도려내는 등 7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거듭한 탓에 19일 이후 80년 5월의 기억은 없다.

 

김씨는 1989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현재 전남곡성지점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내와 3자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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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용 jangs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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