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생긴 오기와 집념
전쟁 때문에 피란 온 임시분교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중앙대 이리분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중·고등학교만도 못한 시설에다 학생들은 만원이고, 교수진마저 부족하여 시간강사들에 의한 강의가 대부분이었다. 대학이나 학문에 대한 관심과 매력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불충분한데 또 다시 기차통학을 한다는 데 짜증이 났다.
자연스럽게 공부보다는 노는데 관심을 갖게 되는, 그야말로 그때 유행어처럼 ‘먹고 대학생’이 되었다.
휴전 직후라 사회도 어수선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따분한 대학생활이 되었다.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고는 하지만 일학년이라 교양과목 중심의 강의였기 때문에 마음을 휘어잡을 만한 새로운 내용도 없었다. 자연 출석도 점점 기피하게 되었다.
초·중·고 12년을 학교에 다니면서도 나는 친한 친구하나를 사귀지 못하는 샌님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강의보다는 영화보기에 바빴고, 놀기에 바빴고, 이곳 저곳 쏘다니며 구경하는 새로운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대학 2년 동안 벼락치기로 학점만 따고 노는 데 열중인 생활이었지만, 나는 스스로가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우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정을 통하여 사회를 알게 되었으며, 피란 온 시골대학을 다니는 초라한 자기의 위상도 알게 되었다. 이 같은 변화된 생활과 생각은 소극적이었던 나, 내성적이었던 나, 그리고 샌님이었던 나를 크게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휴전 직후의 혼란스런 시대에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을 지금은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3학년이 되어 자연스럽게 서울의 본교에 등록하면서 하숙생활이 시작되었다. 수복 이후의 서울은 어수선했으며 농촌 출신이 하숙생활을 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비장한 각오로 경제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고등학교 때 배우던 ‘경제원론’책이 바로 유명한 최호진박사님의 저서였는데, 바로 그분이 학장이신데다 두 과목을 담당하고 계셔서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첫 시간부터 시골 분교 출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고 차별하였기 때문에 학문적인 기대이전에 ‘공부해서 보여 주겠다’는 오기와 집념이 난생처음으로 생겨났다. 진짜 무서운 대학생이 된 것이다. 우리는 최호진학장님의 이름자 중 ‘호’자를 따서 호랑이선생이라고 불렀는데, 호랑이선생은 중간시험·기말시험 때마다 성적을 발표하여 칭찬과 망신을 함께 주셨다. 나는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한 학기 후에 처음으로 호랑이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50년이 된 지금까지도 매월 모시는 가까운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다.
최호진 선생님과의 학문적 인연으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자마자 조교가 되어 방황하지 않고 공부하면서 지도를 받게 되었으며, 이때 비로소 학자로서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의지를 갖고 열심히 살기 시작하였다. 금년에 94세인 최선생님을 매월 뵈면서 지금도 가르침을 받고 있으며, 그렇게 어려웠던 선생님이었지만 나이 들면서는 각별히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곧 시간강사가 되어 자연스럽게 학교생활을 하던 중에 4·19와 5·16의 사회적인 변혁을 맞아 또 다른 시련들에 봉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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