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현실, 장래에 대한 불안
자유당의 부정부패정치가 극에 달한지라 4.19는 이미 예고된 학생민주혁명이었으며, 그 희생 또한 엄청났다. 전교생이 데모에 가담했기 때문에 당시 조교였던 나는 최호진 학장님의 지시에 따라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이 한강다리를 막는 바람에 오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때마침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다른 대학보다 많은 학생들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엄청난 혼란과 살상을 자행하는 독재정치에 대해 분노했다.
그런데 그 꽃잎처럼 쓰러져간 대학생들의 값진 희생에 의해 이룩한 민주정치가 제대로 꽃피우기도 전에 무질서와 혼란이라는 구실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학생들이 피로 일궈놓은 민주혁명의 뜻이 좌절되고 헌정이 중단된 것은 역사의 후퇴였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가치관과 법치주의가 파괴되는 후유증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변혁과 혼란을 나는 짐작도 못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의 현실에 대한 무능함을 통감하면서 점차 정치문제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화려한 혁명공약이 정권창출의 구실이 되어가고 군사통치가 강화되면서 나는 군대문제(당시 면제였지만)로 무조건 대학에서 밀려나게 되어 대학원학생으로 공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살기 어려워져만 가는 농촌경제의 사정은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대가족의 생활비와 교육비문제로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고생이 심해지셨으나, 공부한다는 핑계로 전혀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신세였다. 다행히 한국경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생겨 연구원으로 취직했고, 겨우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군대를 필하지 않으면 대학강사도 할 수 없는 때라, 그저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일찍이 꿈꾸었던 외국유학도 군대문제 때문에 불가능해져서 현실도피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겨우 연명하는 정도였다. 희망도 없고 뚜렷한 직업도 없으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리 없었으나, 조부모님의 성화도 있고 해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결혼할 자신이 없었으나 때 마침 친척 교수분(이화여대 이영로 교수)과 선배교수(중앙대 박찬계 교수)가 동시에 현재의 아내(陸完貞 당시 이대강사, 현재 단국대명예교수)를 소개하여 서로 믿고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도 대학에 몸담은 교육자 집안(陸敏哲, 초대 전주여고 교장) 출신으로서 고향도 비슷하여(전주) 쉽게 가까워졌고, 무엇보다도 학문한다는 동업의식으로 어려운 결혼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는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빈곤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나 같은 시골출신이 뚜렷한 직업도 없이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려운 결혼생활 속에서도 아들(碩浩, 미국 택사스주립대 강사)과 딸(周殷, 연세대학교 강사)이 태어나 가정에 대한 따뜻함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손쉽게 생각했던 교수가 되기도 어려워진 현실에 대한 불만과 장래에 대한 불안이 쌓여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꿈꾸어오던 유학이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를 유학에서 찾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아들딸을 거느린 가장이 유학을 떠난다는 것도 쉽지 않아 새로운 고민과 갈등에 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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