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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역사속의 사관 - 허성배

허성배(수필가)

삼인행(三人行)에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이란 말이 있다.

 

세사람이 함께 가면 거긴 반드시 한사람의 스승이 있다는 논어의 가르침이다.

 

선행은 본받고 악행은 따라하지 않으니 그게 바로 선행이 아니냐는 뜻일게다.

 

남이 남긴 뒤를 보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려 행하라고 하는 이 평범한 교훈에서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의 그 숨겨진 뜻을 가늠해 본다.

 

역사란 있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보존해서 후세의 귀감이 되고자 하는데에 그 생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史實)을 사실대로 쓰거나 보존하는 일이 그리 쉬운 노릇인가? 그래서 우리조상들은 아예 사관(史官)의 기록은 임금도 고치지 못하도록 당대의 것을 볼 수 있도록 못밖아 엄격히 지켜왔다.

 

자신의 업적은 미화하되 자신의 치부는 내보이기를 꺼리는 사람의 본성을 잘 알고 취한 현명한 장치였다. 추한 과거를 은폐코자 사관의 기록을 고치거나 없애도록 강요했던 조선시대 영조나 연산의 행위조차도 조금의 가감없이 기록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상들의 신념과 의지의 덕분이 아닌가 한다.

 

치부를 속살까지 드러냄은 다시는 되풀이 안한다는 결의이며 목숨을 다해 그걸 사실대로 보존함은 후대에게 귀한 교훈이고자 하는데에 그 진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나라의 역사현장은 어떠한가? 무악재 고개밑길 한모퉁이로 밀려나 초라하게 쭈그리고 있는 독립문의 몰골이 가끔씩 처연해보이는 것은 나 하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청나라 사신에게 임금이 손수 나아가 영접하고 허리굽히던 영은문, 그 부끄러운 기억이 싫어서 헐어버린 자리에 독립의 의지를 담아 상징적으로 세운 독립문이 아닌가?

 

영은문외 자취가 없어진 것도 도로확장이라는 명분으로 저만치 자리를 옮겨 밀려나있는 독립문의 모습도 옛 사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비뚫어진 사실이요, 역사요, 진실이다.

 

10여년전에 해외여행중 잠깐들렸던 이태리의 사도(死都) 폼페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벼운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사치와 향락, 그리고 퇴폐의 극치로 상징되던 도시 폼페이, 신의 형벌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결코 그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조상들의 치부를 조금도 가리우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그 치부의 현장을 하나하나 파헤쳐 자신들의 교훈으로 기리고 있다. 비록 무너지다 남은 담장이지만 길모퉁이의 모습까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담장안의 깊숙한 방에 그려진 춘화도의 실상과 음행의 현장까지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말쑥해진 서울거리에 다방골의 일각대문 하나라도 남아있거나 6·25때 잔인하게 일그러진 건물의 잔해 하나만이라도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흔들리는 가치관 병든 이데올로기로 방향감각마져 잃고 좌왕·우왕하는 젊은이들이 봐야하는 안타까움은 좀 덜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독일의 옛성 하이델베르크는 그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전쟁이라는 가공할 죄 때문에 얼마나 흉한 상처를 받았는가를 지금껏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창공을 캔버스삼아 그린 그로데스크란 벽체의 미완성작품같이 깨어진 창문들이 지금도 하늘을 향해 고통스런 신음을 내뿜고 있다.

 

또한 뉴욕의 상징인 자유여인상 발밑에 자리한 미인박물관의 노예무역선 모형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굴비두릅처럼 엮어진채 몸통에 짓눌리는 흑인노예의 처참한 모습들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비록 흑인과의 인종적 갈등을 오늘도 안고사는 그들이지만 선은 선, 악은 악이라는 인간적인 솔직성과 참회의 마음은 살아숨쉬고 있다. 노예선의 수치를 그들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양심대로 역사대로 역사앞에 조각해놓고 매일처럼 바라다본다.

 

잠시 지나친 필자의 감상으로 얼마나 깊이 볼 수 있을까만은 지난 여행길에 들른 마닐라의 말라까냥궁의 모습 또한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필리핀의 대통령관저인 이 궁은 마르코스 전대통령의 실각후 이멜다의 수백켤레의 구두와 더불어 사치의 극치를 이루었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영조나 연산군의 치부를 실오라기하나 가리거나 덮지않고 그대로 기록한 우리 사관의 뜻이 연상되어 새삼 충격적이었다.

 

당시 새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끼노는 집무실과 관저를 궁 건너편에다가 조촐하게 마련해놓고 궁무회의나 국빈접대 등 공식행사만을 제외한 시간에 그 역사의 현장을 만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옛 왕조로부터 스페인의 4백여년 통치를 거쳐오면서 영욕을 함께한 궁은 필리핀 고유의 나무조각들로 장식 축조되어 하나의 커다란 민속박물관 같았다.

 

그 구석구석마다 오랫동안 독재와 사치를 만끽한 여인의 체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혁명군의 진압도가 그려진 칠판과 더불어 독재자의 숨가뿐 몰락의 현장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아끼노의 암살현장까지도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비록 주인 잃은 물건들과 사진들이지만 광기어린 한 여인의 오만과 독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연신 벗기우고 서있었다.

 

4·19때 끌어내린 살아있는 이승만의 동상이나 분노에 찬 시민들이 짓밟아 없애버린 이기붕의 저택과 축재의 실물들이 말라까냥궁처럼 지금도 제자리에 놓여있기만 하다면 그들의 참모습을 어렵지않게 심판대에 올려놓고 독재의 결말을 실감할터인데… 우리는 너무 성급했다.

 

너무 성급하게 단죄하고 너무 성급하게 역사의 현장을 인멸해버리는 졸속주의자가 돼버렸다.

 

그런중에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는 일제하의 정부청사(총독부 건물)가 그대로 남아있는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헐어버리자, 말자로 한때 말썽도 있었지만 다행이 그 자리에 남아주어 36년의 설움과 아픔을 되풀이 될 수 있는 민족의 결의를 볼때마다 굳히는건 얼마나 의미로운 일인가?

 

잊혀지고 덮어진 치부는 일체의 망각이지 삼인행에 필유아사언의 스승은 될 수가 없다. 오늘도 훌륭한 스승들을 낙엽처럼 쓸고 묻으면서 망각속에 살고있는 것은 아닌지 다같이 반성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

 

밤도오고 종도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나, 나는 여기 머물겠네.

 

G.아폴리네르의 시(詩)다. 필자의 나름의 해석일지는 모르나 세월이 흐르고 사랑은 가도 나는 여기 머물겠네의 의지야말로 가장 솔직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역사의식이 아닌가 싶다. 미라보 다리가 존재함으로만이 그 시인은 과거도 미래도 늘 현재와 같이 살아숨쉬는 듯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성배(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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