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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窓] 이영춘박사 유품, 함께 보존해야 - 안봉호

안봉호(군산본부장)

“하루는 눈이 잔뜩 내리는데도 왕진나간 박사님이 돌아 오지 않는 거예요. 잔뜩 화가 난 사모님이 집에 장작이 떨어졌는지, 쌀이 떨어졌는지 모르고 환자만 보러 다닌다고 바가지를 긁었는데 박사님은 태연히 당신 할 일만 하는 겁니다. 다음날 사모님의 심부름으로 미싱을 들고 전당포에 다녀와 그 돈으로 쌀과 장작을 샀습니다 ”

 

일제시대인 1932년 호남일대 1천여만평의 논을 소유한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인 진료소인 자혜진료소의 한 직원은 이같이 이영춘박사를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박사의 월급은 상당한 고액이었지만 왕진과정에서 영양실조로 병색이 완연한 수많은 소작농가에 주머니를 털어 식량을 사 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집에는 쌀이 떨어졌다고 한다.

 

1903년 평남 용강군 태생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과 무지및 질병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참상을 보게 된 그는 33세의 나이에 구마모토농장에 소속된 2만명의 소작농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진료의사로 부임, 자혜진료소를 통해 식민지 약탈에 피폐해 가는 동족의 아픔을 직접 치료한다.

 

국민학교등에 위생실을 신축 기증하고 양호교사를 채용, 우리나라 양호교사제도도입의 효시가 된 그는 해방후에도 오직 농촌보건진료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자혜의원을 개정중앙병원으로 확장하고 개정간호대학을 설립했다.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농민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1980년 운명을 달리한 쌍천(雙泉) 이영춘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 농촌의료활동의 선구자, 농민의 성자로 일컬어 졌으며 부인과 자녀에게 집한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무소유 삶’을 실천한 자였다.

 

그의 이같은 행적으로 지난 2003년에는 이박사 탄생 100주년 추모음악회와 추모비제막및 메모리얼홀 개관행사가 펼쳐지기도 했다.

 

해방이후 반평생을 살면서 그가 설립한 한국농촌위생연구소 소유로 해 놓았던 개정면 60평정도의 생가가 지난 2001년 개정병원이 경매로 넘어갈 때 함께 처분됨에 따라 최근 명도소송으로 생가에 거주하고 있는 이박사 아들은 집을 비워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됐다.

 

문제는 집을 비우게 될 경우 이 박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각종 유품들이 생가가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별도로 관리됨으로써 훼손되거나 분실될 우려가 높고 전북도 유형문화재인 이 박사 생가의 역사적가치가 크게 상실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이 박사의 생가와 유품은 일제시대 우리 민족였던 소작농들의 아픔을 통해 나라를 잃은 설움의 역사와 함께 무소유와 희생을 바탕으로 한 민족사랑의 봉사정신을 배울 수 있는 이 지역의 귀중한 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현재 이 박사의 유품 목록조차 정리돼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군산시가 이 박사의 유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문화재인 생가가 그의 유품과 함께 있을 때 역사 문화재가치로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은 이 문화적 자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 책무가 있다.

 

군산시가 떠들썩하게 수백억원씩을 들여 신규로 근대 역사문화관을 건립하는 것도 좋지만 군산에 이미 내재돼 있는 문화자산부터 제대로 관리해 나가는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

 

군산시민 모두 이영춘 생가와 함께 유품들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마련에 조속히 나서야 할 때다.

 

/안봉호(군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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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호 ahnb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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