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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민간인으로 돌아가며 - 신균남

신균남(전 김제부시장)

 

강산도 네 번이나 변했을 38년1개월!.

 

시험과목도 모른 채 응시했다가 엉겁결에 공무원이 되어 내 젊음을 보내버린 세월이다. 정년을 1년 앞두고 명예퇴직제도를 빌어 지난 6월 말일자로 퇴직하였다. 평소 공로연수제를 없애고 정년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총액인건비제 시행에 보탬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무노동 유임금’의 쑥스러움과 공무원 비리가 터질 때마다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 굴레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시구의 의미를 되새기며 왠지 모를 아쉬움과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버리기 위해 펜을 들게 되었다. 짐작되기는 하나 드러낼 수 없는 이유로 말년을 갈등하게 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침묵으로 삭이고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이것도 다 내 업이고 인연이려니 마음을 달래 보니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 자연의 섭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전 후텁지근한 날 오후 명예퇴직신청서를 제출하고 전주천변 가로수 밑을 걸었다. 그동안의 기뻤던 일, 화났던 일, 슬펐던 일, 즐겁고 보람있었던 일, 후회스러웠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가장 기뻤던 일은 고향에서 재직할 때, 고질적인 행정의 병폐 중 하나인 법규 만능주의 때문에 8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못했던 다수민원을 문책을 무릅쓰고 해결해 주어 기뻐하던 주민들에게서 갈채를 받았던 때였다.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가장 화나고 자존심이 구겨졌던 사건은 나 자신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인사를 두고 특혜 대상으로 언론에 매도되었을 때였다. 그것도 학교 후배되는 기자가 사적인 서운함 때문에 썼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기사로 인해 원하지 않던 부단체장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잊혀지질 않는다.

 

가장 슬펐던 일은 조직내 갈등 때문에 동료 직원들이 사법처리 되었을 때다. 특히 독단에 빠진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직원들이 희생 당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무능함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동료직원들을 칭찬해주지 못하고 질책만 일삼아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은 지금도 후회스럽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머리 숙여 사과하고 싶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공무원교육원장시절 강사가 펑크 낸 시간마다 대강을 하면서 박봉과 격무에 찌든 후배 공무원들과 함께 농담 속에 진담을 섞어 웃으며 교감했던 일이다. 그 때 나는 생각했었다. 공무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주민들도 즐거워질거라고,

 

그리고 승용차로 학교 한 번 데려다주지 못하고 과외 한 번 시키지 못했음에도 자식들이 뒤지지 않고, 애비가 떳떳한 공무원임을 자랑스러워 하며 바르게 커 준 것은 그나마 인생의 보람이다.

 

이제 공직을 떠나면서도 “민선자치제 시행 후 직업공무원제를 퇴색시키고 있는 줄서기 인사와 엽관사례가 더 만연하고 있다”는 세평이 안타깝기만 하다.

 

민선자치제가 되면서 비록 표심이 능력이나 사람됨됨이보다 중요시되는 현실을 아주 무시할 수 없지만 상사에게서보다 주민과 동료에게서 박수받는 공무원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공직사회가 빨리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앞으로는 다산이 설한 목민관을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 지역사회와 나라의 발전에만 매진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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