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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향 황소들의 울음소리 - 조숙진

조숙진(전주 YWCA 회장)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꿈에도 잊지 못할 우리의 고향에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밴 실개천이 흐르고, 그 자락 어디에선가 선한 눈망울 끔벅이며 욕심 없이 풀을 뜯던 황소의 모습이 우리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향수를 수놓고 있다.

 

고향을 떠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귓전에 요즘 환청처럼 들리는 우리 황소들의 울음소리...

 

온 국민의 화두가 '경제'인 지금, 한반도에는 고향을 향한 발걸음이 분주하고 건강한 고향을 지키려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경제회생을 기대하며 잘 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담고 무던히도 자기최면을 걸었던 순진한 국민들의 가슴이 들끓고 있다. 얼마 전 한미정상회담 바로 직전 전격적으로 타결된 한미 소고기 협상이 그 불씨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문회도 열렸다. 논쟁이 뜨겁다.

 

무엇이 급해, 무엇에 쫓겨, 왜 이렇게 서둘러 협상을 하였는지 모두 궁금해 한다. 실용외교라는 거창한 간판 앞에서 우린 무엇을 얻고, 우린 무엇을 주었는가에 대해 민심은 냉정하게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0.1%의 광우병 가능성에도 마치 생명을 걸 듯 협상하고 통제하는 데 우리는 왜 크게 괜찮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그렇게 넘어가려 하는 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나타나고 미진한 분야가 드러나면 새로 협상하고 추가로 보완하면 되는데 무엇이 우리의 재협상을 가로 막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진정 실용외교의 기준과 잣대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묻고 싶다.

 

이러한 논쟁이 이제 촛불로 타오르고 있다.

 

서울 청계천 앞에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축사 앞에서 농부의 거친 손과 사대주의를 재단하는 청년의 가슴으로, 그리고 엄마를 따라 온 아이의 맑은 눈으로 촛농이 흘러내린다.

 

혹여 10년 이후에 다가올지도 모를 광우병(잠복기간이 10년 이상이라 함)에 대한 서로의 걱정이 무거운 한숨 속에서 건강한 미래를 향한 소망까지 태워버리는 것 같다.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가 들어오면 소비자에게 좋은 일 아니냐'는 어느 고위 공무원의 말은 시커멓게 멍든 축산농민의 깊은 시름의 화로에 비계 덩어리로 던져져 온 사방에 기름방울을 튕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소외된 가슴이 얼마나 더 외로움과 절망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 어린 미래 세대들에게 희망으로, 용기로 젖을 물리는 어미의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다.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출범한 지 두달도 채 안되어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채 非실용외교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방황하며 서로의 가슴을 부여잡고 논쟁해야 하는 지 안타까움으로 촛농이 떨어지고 있다.

 

타는 촛불을 바라만 볼 수도, 그렇다고 꺼질 때까지 놓아 둘 수도 없다. 이제 촛불 앞에서 경건해질 시간이다. 국민 앞에 모든 것을 꺼내 놓고 국민과 같이 걱정할 때다.

 

국민이 걱정하면 되돌아가야 한다. 국민이 원하면 다시 가야 한다. 국민이 불안해하면 괜찮다고 설득하기에 앞서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그리고 실용외교는 표방하기 위한 구호가 아님을 국민에게 실질로서, 실체로서, 실증으로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실용임을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는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은 실용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지표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제 모든 근심과 불안을 촛농으로 다 태워 버리고 서로 손을 잡고 가슴을 열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실개천 가에 노니는 누런 우리의 황소들을 위해, 그리고 그 황소들의 추억으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조숙진(전주 YWCA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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