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裡里)는 1899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주군(全州郡)의 일부였다. 만경강을 따라 펼쳐진 갈대밭은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巢 또는 沼)라 불릴만큼 갈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습지였다. 원래 이리는 '솜리' 곧 '솝말(속마을)'이란 뜻으로 지금 구(舊)시장 부근에서 주현동(구슬재) 갈산동에 걸쳐 인가라고는 10여 호에 불과했었다. 호안(護岸)공사가 있기 전까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감조(感潮)하천인 만경강의 범람이 잦아 사람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리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무엇보다 철도였다. 만경강 유역의 황무지 개척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이 1911년 호남선 철도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1912년 철도가 개통되자 한촌이었던 이리는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마에 있던 익산군청, 익산헌병분대, 익산우편소 등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1924년에는 원불교가 터를 잡아 세력을 키웠다. 이후 이리시는 1985년 익산군과 통합, 익산시로 거듭났다.
오늘날 익산시의 획기적 변모에는 '이리역 폭발사고'가 큰 몫을 했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에 일어난 이 사고는 인천에서 화약을 싣고 이리역에 정차중 일어난 우리나라 철도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당시 광주로 향하던 화약열차에는 다이나마이트와 폭약 등 40톤 가량이 실려 있었다.
이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이리역에 도착, 22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호송원 신무일(당시 38세)은 열차가 늦어지자 이리역앞 식당에서 저녁식사중 소주와 막갈리를 마셨다. 그리고 화차에 들어가 촛불을 켜 놓은채 침낭속에 몸을 묻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화약상자에 불이 옮겨 붙은 뒤였다. 신씨는 "불이야!"하고 뛰쳐 나왔고 이리역은 '꽈-광-'하는 폭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이 사고로 사망 59명, 중경상 1343명, 이재민 7873명(1674가구)을 냈다. 반경 4㎞까지 전쟁의 폐허를 방불케 했다. 당시 사창가였던 역 주변에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섰다. 익산역으로 이름을 바꾼 이리역은 호남고속철도(KTX) 정차역으로 역세권 개발의 꿈에 부풀어 있다.
마침 영화 '이리'가 개봉됐다.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이 이리역 폭발사고를 배경으로 만든 것이다. 이리 발전을 30년 앞당겼다는 폭발사고의 뒤 끝에 어떤 아픔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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