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전주 재선거를 앞두고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의 아버지인 고형곤(高亨坤) 박사의 말씀이 생각난다. 고 박사는 한국 철학계에서 서양 철학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 꼽힌다. 지난 2004년 백수(白壽)로 타계하기 전까지 학문적 업적을 크게 남겨 후학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옥구 임피가 고향인 그는 전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후 잠시 정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학문 연구에 일평생을 바쳤다.
고인이 공직 생활에 나서는 高 전 총리에게 '목민관 수칙 3계명'을 내렸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20대에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아들 건에게 공직자로서 이 계명을 좌우명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첫째 남의 돈을 받지 말고 둘째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말며 셋째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 전총리는 술에 관한 항목을 제외한다면 부친의 엄명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밝힌바 있다.
공직자는 항상 유혹이 뒤 따른다. 그만큼 권한과 재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술을 잘 마신다는 소문을 내지 말라는 말은 자칫 술을 마시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자 십회훈(朱子十悔訓)에 나오듯 술로 인해 행동거지가 풀어질 수 있다. 건강 해치는 것은 물론 자칫 명예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게 하라는 말은 철학자로서 그 혜안이 돋보일 뿐이다.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폐단은 줄서기 정치다. 대통령 선거부터 지방의원 선거에 이르기까지 줄서기로 시작해서 줄서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줄 서느냐가 고민거리다. 유권자보다는 공천권자에게 충성하고 사회 여론보다는 당 내부 논리에 초점을 두게 돼 있다. 공천권을 가진 정당은 의원과의 관계에서 항상 갑(甲)의 위치에 서 있다. 을(乙)인 지방의원들은 甲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게 관행이 돼버렸다.
정동영(鄭東泳) 전장관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민주당 덕진지구당 시도 의원 가운데 일부가 탈당계를 내고 정 전장관 쪽으로 줄 선다는 것. 요즘 지방의원들은 '정동영을 따르자니 민주당이 울고, 민주당을 따르자니 정동영이 운다'라는 현대판 심수일과 이순애의 절절한 울음소리를 느낄 것이다. 줄서지 말라는 고박사의 계명을 다시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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