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는 조선의 26대 임금이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고종의 이미지는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인 민비 사이에서 자기 목소리를 못낸 무능력한 임금이다. 가정 구조상 강한 성격의 시아버지와 영민한 며느리의 갈등은 고종의 처신을 어렵게 했을것이고 국내적으로는 오랫동안 이어왔던 신분제의 변동과 국제적으로는 근대화된 여려 선진 강대국들의 식민지 쟁탈전 의 격동의 한가운데서의 고종의 처신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발견된 문서는 고종은 결코 나약한 군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고 일제의 통감부 설치를 결정한 '을사 늑약 '체결당시 서울 주재 외국공사가 그 조약의 강제성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처음 발견됐다고 한다.
1905년 11월 20일 독일 공사(公使) 잘데른이 보낸 보고서는 고종이 끝까지 조약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서가 소장하고 있다고 하며 2005년 국사 편찬위원회가 복사 정리한 1만8000쪽 분량의 한국 관련 독일 외교 문서에서 모 교수가 찾아냈다고 한다.
12쪽 분량의 '잘데른 보고서'는 고종에 대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적을 두려워 하지않는 황제"라고 평가했다고 하며 또 괄목할만한 대목은 고종이 미국 대통령의 딸과 황태자(순종)의 결혼을 통해 국면을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고 한다. 이 문서를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그 당시 일본과 맺은 을사보호 조약(乙巳保護條約)이란 일본의 강제에 의해서 맺어진 "을사늑약"인 것이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욕이 강했다. 개혁가 다산(茶山)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라는 책을 수시로 꺼내 읽기도 했고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일본으로 수신사를 보내고 귀국한 그들에게 일본의 앞서간 문명을 자세히 듣고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을 개혁하려고 해도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명분하에 '최익현'같은 고루한 유림 세력들의 완강한 반대는 개혁의 엄청난 걸림돌이었다. 왕권시대라고 해서 어찌 고종 혼자 개혁할 수 있었겠는가?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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