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천천히 걷는 사람이 숨차지 않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느림을 찬미한 말이다. 또 한용운의 시에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는 대목이 나온다. 스피드가 미덕인 시대인지라 역설처럼 들린다. 하지만 둘은 통하는 말이다. 노자(老子) 풍으로 말하자면 빠르고 바쁜 것은 느림과 비움을 얻기 위한 것일테니까.
지난 50여 년동안 개발과 성장을 위해 바쁘게 살아온 한국인들은 유난히 '빨리 빨리'를 강조했다.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1등만이 대접받는 사회였다. 속도와 효율, 경쟁이 최고의 선(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그 반작용이랄까. 요즘은 오히려 느림과 한국적인 것이 더 각광을 받는다. 빨리 달리는 마라톤 보다 천천히 가는 걷기가 대세고 자전거 타기 열풍도 드세다. 예전에는 거들떠 보지 않았던 한옥값이 천정부지다.
어쩌면 느림에서 여유와 나눔, 더불어 사는 지혜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과 다르다. 부지런해야 느리게 살 수 있다. 느림(slow)은 단순히 빠름(fast)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과 자연, 시간을 존중하고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느긋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이문재 시인의 말을 빌면 "느림이 곧 미래로 가는 문"이다.
그런 뜻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슬로 시티(Slow City)로 지정된 것은 의미가 크다. 한옥마을은 세계에서 133번째, 국내에서 7번째로 지정되었다.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세계 최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뜻을 모아 발족한 국민행복 운동의 일종이다. 느리고 조용히 살아가는 공동체의 국제적 네트워크인 셈이다. 이 운동은 ▲철저한 자연생태 보호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 ▲천천히 만들어진 슬로푸드 농법 ▲지역특산품 공예품 지킴이 ▲지역민이 중심이 된 참여 등을 지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전남 완도의 청산도, 담양 창평 삼지내마을, 신안 증도, 장흥 유치면과 장평면, 경남 하동 악양(평사리)이, 그리고 2009년에 충남 예산이 가입되었다. 전주 한옥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한옥 700여 채와 골목길, 비빔밥, 한지, 판소리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급격한 상업화 등 숙제도 안고 있다.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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