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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⑪꽃이 지고 새가 우는데 시와 술이 없어서야

서산대사 시 '惜春' (desk@jjan.kr)

꽃이 지고 새가 우는데 시와 술이 없어서야 -서산대사의 시

 

落花千萬片, 啼鳥兩三聲. 若無詩與酒, 應殺好風情.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지는 꽃, 이따금씩 들리는 새 울음소리.

 

만약 시와 술이 없다면 이 좋은 풍경과 이 좋은 느낌이 다 무슨 소용이람!

 

落;떨어질 락/ 花:꽃 화/ 片:조각 편/ 啼:(새가) 울 제/ 鳥:새 조/ 兩:두(2) 양/ 聲:소리 성/ 若:만일 약/ 詩:글 시/ 與:더불어 여(and)/ 酒:술 주/ 應:응할 응, 응당 응/ 殺:죽일 살, 감할 쇄/ 好:좋을 호/ 風:바람 풍/ 情:뜻 정

 

서산(西山)대사 휴정(休靜)이 지은'석춘(惜春:가는 봄이 아쉬워)'이라는 시이다. 휴정은 법명이고 서산은 호이다. 달리 청허(淸虛)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속성은 전주최씨이며 진사시에 낙방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당시의 고승 숭인(崇仁)의 문하에서 「전등록」, 「화엄경」, 「법화경」 등을 배우고 1552년(명종7년) 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전국의 불교 종파 16종을 총괄하는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을 맡아 승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제자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은 하나'라는 생각아래 불교 종파를 일원화하는데 노력하였고 유교와 불교, 도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일치한다고 여겨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서산대사는 여러 편의 불교관련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시문에도 뛰어나 「청어당집(淸虛堂集)」이라는 문집도 남겼다. 오늘 소개하는 이〈석춘(惜春)〉시도 「청어당집」에 수록되어 있다.

 

꽃은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지고, 그렇게 꽃이 진 자리에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연푸른 나뭇잎에 몸을 살짝 숨긴 채 새들이 이따금씩 한가롭게 우는 풍경!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그리고 이런 봄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또 얼마나 여리고 아름다운 마음인가?

 

꽃나무 아래서는 자동차 시동도 함부로 걸지 말아야 한다. '부르릉'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행여 꽃잎이 무더기로 더 떨어지면 어쩌랴. 꽃나무 아래서는 큰 소리로 떠들지도 말아야 한다. '왁자지껄' 떠드는 그 소리의 진동으로 인해 아까운 꽃잎 하나가 제 명(命)보다 일찍 지면 어쩌랴. 꽃나무 아래서는 그저 조용히 시를 짓고 또 읊어야 한다. 그리고 조용히 술 한 잔을 마셔야 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를 짓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며 꽃의 아름다운 삶을 축하하는 축배도 들고 다시 서럽게 지는 꽃잎을 애도하는 술잔도 기울여야 한다. 꽃이 지는데 그리고 새가 우는데 시도 없고 술도 없다면 이 아름다운 풍경과 이처럼 좋은 봄날의 느낌이 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수줍은 연분홍으로 피던 진달래도 지고, 선비의 꽃 매화와 봄의 선구자 목련도 지고, 그만한 티를 내느라 조금은 요란한 환성과 환호로 피던 벚꽃도 지고 있다. 이런 날, 시 한수와 술 한 잔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필자는 붓을 들고 서산대사의 이 시를 한 번 써 보았다. 이처럼 흥이 넘치는 시에는 역시 초서가 제격이다. 선인의 멋진 시를 초서로 일필휘지할 수 있는 필자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 봄 내내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글씨와 더불어 술 한 잔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 물론, 술은 꽃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마셔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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