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2-29 07:39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오목대
일반기사

[오목대] 훈몽재(訓蒙齋) - 조상진

"쳥산도 졀로졀로 록수도 졀로졀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졀로 물도 졀로하니 산수간 나도 졀로 (山自然 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아마도 졀로 삼긴 인생이라 졀로졀로 늙사오려.(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가 지은 '자연가(自然歌)'다. 그의 문집인 '하서전집'에 실려 있다. 송시열 또는 이황이 지었다는 이설(異說)도 없지 않으나 하서의 작품이라는 게 통설이다.

 

하서가 이 시조를 지은 것은 그가 35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낙향했다 38살 되던 1548년 부모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점안촌(鮎岩村·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으로 옮겨서다. 그는 이곳에 초당을 지어 훈몽재(訓蒙齋)라 이름짓고 유유자적 자연을 즐기며 후학을 길렀다.

 

그에 앞서 하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 등과 같이 공부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인종)를 가르쳤다. 1546년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옥과현령으로 부임했으며 임금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가 점안촌에 든 것은 숱한 정쟁을 목격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하고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한다는 천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훈몽재의 훈(訓)은 가르칠 훈, 몽(蒙)은 어린 몽으로 후학을 가르치는 학숙이다. 이곳에서 기호학파의 핵심으로서 학문에 정진하며 정철 조희문 기효간 변성온 등 5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유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호남유림으로는 유일하게 공자 맹자 등과 함께 향교 문묘(文廟)에 모셔진 동방 18현에 올랐다.

 

훈몽재는 그의 5대손인 자연당(自然堂) 시서(時瑞)가 중흥시켰으며 정조는 훈몽재가 "잘 보존되고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6·25 전쟁때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소실되었다. 순창군이 2009년 17억 원을 들여 복원,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섬진강 상류 추령천과 백방산 등 주변 경관이 뛰어난데다 인근 복흥면 김병로 생가와 대법원 가인연수관, 낙덕정 등과 이웃하고 있다.

 

방학 때마다 원광대·전주대 한문학과, 상지대 한의학과 학생들이 합숙하며 한학을 배우고 있고 22일에는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와 교류협약식을 가졌다.

 

청산과 녹수속에, 온고지신의 명소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아 흐뭇하다.

 

/ 조상진 논설위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