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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남원 광한루원- 조상진

영원한'사랑의 지침서'인 춘향가는 서울서 내려온 이도령이 남원의 경치를 구경하는데서 시작한다. 나귀 안장에 올라 방자에게 묻는 것이다.

 

"이 애 방자야.""예.""너희 고을에 볼만한 경치가 있겠느냐?""소인의 고을에 별반 경치 없사오나 광한루라 하는데가 삼남 제일의 누각이라 하옵니다.""광한루가 있다면 오작교도 있겠구나.""오작교도 있거니와 누 옆에 영주각과 승사각이 좋사옵니다.""이 애, 그러면 남원이 곧 신선 사는 데로구나. 오늘 광한루 구경 가자."(정정렬 바디)

 

여기서 광한루(廣寒樓·보물 제281호)는 삼남(三南), 즉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제일 가는 누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어 이도령은 광한루에서 좋은 경치를 완상하며 술 두석잔 마신다. 곧 취흥이 올라 춘향 만날 시를 짓는다. '다리 이름이 오작이니 신선이 놀던 다리요(橋名烏鵲仙人橋)/ 누각 이름 광한이니 옥경루인가 하노라(樓號廣寒玉京樓)./ 묻노니 전생의 직녀가 그 누군고(借問前生誰織女)/ 알겠노라! 오늘의 견우는 나로구나(知應今日我牽牛).'여기서 옥경루는 하늘나라의 옥황상제가 산다는 누각이다.

 

춘향가는 숙종(재위 1674-1720) 즉위 초 얘기다. 그러나 광한루는 춘향가의 배경이 되기 훨씬 전부터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초 광한루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돼 왔을 때 광통루(廣通樓)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겼던 곳이다. 이후 세조 때 정인지가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38년 다시 지었다.

 

광한루에는 내노라하는 시인 묵객들의 한시 80여 편이 걸려 있어 조선 최고의 사교장이었음 말해준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고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3개의 섬이 있다. 봉래(蓬萊) 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州) 섬에는 완월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연못은 전라관찰사 정철이 확장한 것으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3000여 마리의 토종 및 비단잉어가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요즘 광한루원은 TV드라마 '공주의 남자'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또 남원시는 수문장 이벤트, 사랑의 언약판, 신관사또 부임행차 등 다양한 행사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풍류와 넉넉한 여유 공간으로 재인식되었으면 한다.

 

/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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