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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어느 농민군과 유족의 삶

김기준 후손들 상흔 잔재로 고통받아…전북, 역사문화적 자산 적극 활용해야

고 김기준씨 손자 김병훈씨. (desk@jjan.kr)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원회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구성됐다. 위원회는 그간 '역적'으로 몰렸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에 관해 국가적 차원에서 명예 회복을 시켜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는 사실 확인이 안 돼 유족을 찾아가 이야기를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오랫동안 '동학란'으로 왜곡되고 평가절하됐던 동학농민혁명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잊혀질뻔했던 인물을 소개한다. 김기준씨는 가장 가슴 아픈 동학농민혁명 상흔의 주인공이다.

 

▲ 김기준, 동학농민혁명 아픔의 또다른 얼굴

 

1853년 김제 백구면 가전리에서 출생한 김기준(42)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뒤 집에 숨어 지냈다. 1895년 음력 4월 자신의 집 부엌에서 토벌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갔으나 그날 죽임을 당해 시신이 만경강에 던져졌다. 이상의 내용이 유족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김기준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서 몇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데 김기준이 참여한 지역이 김제이며 동학농민혁명 다음해인 1895년 4월 토벌군에 의해 처형됐다는 것이다. 김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많은 지역이며 1895년까지 토벌군의 활동이 계속 이루어졌다. 여기에 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기준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 김기준 후손으로 이어지는 상흔의 잔재들

 

당시 김기준에게는 2살된 아들과 아내(정씨)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그들의 삶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의 아내는 토벌군이 동학군 아내와 자식 등 가족까지 몰살시킨다는 말을 듣고 2살 아들 학룡을 데리고 밀밭으로 피신했다. 낮에는 밀밭에 숨고, 밤이 되면 집으로 몰래 돌아오는 피신 생활을 보름 남짓 하던 중 남편을 찾아준다는 장정에 의해 김제 백구면 유강리 우담마을 임씨 집안으로 보쌈을 당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선택의 여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 아들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내가 임씨 집안에 살게 되면서 아들은 남편 임씨의 아들 성으로 바뀌어 올려졌다. 시간이 흘러 아들 학룡은 결혼 해 1남 2녀를 낳았다.

 

▲ 역사로 인해 굴절된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

 

김기준의 아내는 자녀 손자녀 앞에서 김기준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과 비참한 죽음 등에 대해 자주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손자 김병훈씨는 지금은 비록 임씨 집안에서 살고 있지만 꼭 본래의 김씨를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즉 김기준의 아내 정씨는 뒤틀리고 굴절된 가족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보이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정씨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손자가 김씨를 되찾아야 한다는 아내의 기대와 임씨의 맏손자가 되어 재산상속의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을 꺼려했던 임씨 집안의 입장 등으로 김병훈씨는 군 입대 당시까지 호적 없이 생활했다. 이에 따라 손자 김병훈은 군 제대 후 본래의 김씨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드디어 1961년 김씨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들은 김씨를 되찾지 못했다.

 

▲ 아직도 계속되는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 사건이다. 얼핏 생각하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둘러보면 우리 자신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결정된 경우가 허다하다. 김기준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의 삶은 굴절되었으며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후손들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실로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만 벗어나는 것은 엄청난 댓가가 필요하였다. 후손들은 지금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혁명은 먼 옛날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전라도 특히 현재의 전북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체세력은 모두 전북 지역 출신이며 수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김기준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들은 그것으로 인해 삶의 내용이 고통과 고난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북지역이 침제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염두해 두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접근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역사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변혁운동의 최고봉으로 자주, 평등, 개혁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의의가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이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전북도가 적극 활용하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북도민들이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병규 문화전문시민기자(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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