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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초제 판소리

"제자들 잘 가르쳐서 내놓는 것이 남은 의무예요.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지쳐서는 안 되죠."

 

오정숙 명창을 만난 것은 2004년 여름더위가 절정을 이루었던 7월 한낮이었다.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동초각. 스승인 동초 김연수 명창의 소리 맥을 잇기 위해 20여 년 전에 마련했다는 대둔산 자락의 전수관이다. 그해 나이 칠십, 이어지는 공연요청으로 보자면 시골 생활이 불편했을법하지만 노 명창은 한 겨울만 빼고 봄 여름 가을을 그곳에서 났다.

 

동초제 판소리는 여러 바디 중에서도 판소리 다섯 바탕이 모두 전해지는 유일한 바디다. 오정숙은 이 동초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익혔다. 한 가지 바디의 다섯 바탕이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그는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동안 일곱 차례의 백일공부를 거쳤다. 언제나 스승을 모시고 들어간 수련이었다. 백일공부가 시작되면 스승은 더 엄해졌다. 제 감정을 살리지 못한다 며 북채로 발을 들이차이기도 했고, 쌀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도 예사였다. 그 역시 제자들에게 엄한 스승이었다. 공부를 등한히 하면 여지없이 종아리를 쳤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편하고 쉬운 것만 취하려는 아이들에게 이 힘든 소리를 전해줄 수 없다'고 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은 그 스스로의 수련이기도 했다. '칠십 평생에 이렇게 덥기는 처음'인 그해 여름에도 매일 두세 시간의 소리공부를 미루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 '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대부분이 오늘의 판소리 판을 지켜가는 명창들이다. 그들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동초제는 판소리 양대 산맥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초 김연수가 작고한 후에 오히려 소리의 세력을 키워 마침내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가 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판소리연구가 최동현 교수의 평가처럼 김연수보다 인기가 높았던 임방울의 소리가 정작 그의 사후에는 전승이 끊어지다시피 한데 비하면 대단한 일이다. 오정숙은 1991년 동초제 춘향가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그런데 동초제는 이제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아니다. 그가 작고한 이후 기능보유자 지정이 중단된 탓이다. 지방무형문화재로 동초제 판소리가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국가 보호로 전수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니 전북을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내세우는 일은 이제 부끄러운 일이 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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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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