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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닭

▲ 복효근 전북작가회의 회장
시골생활의 불편함을 각오하고 들어온 터라 어지간하면 참고 살아가는데 특별히 참기 어려운 게 하나 있다. 앞집 닭 울음소리다. 닭 중에 수탉이 한 마리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집 수탉은 자정에도 울고 새벽 두 시에도 울고, 때가 없다. 가뜩이나 잠귀가 밝은 나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창문을 다 열어놓고 생활하는 여름날이면 수시로 잠을 깨곤 한다. 이웃 간이라 그저 아무 말 못하고 산다. 인근에 있는 가로등 때문에 새벽이 온 줄 알고 울어대는 것이겠지 생각도 했다. 아무러면 주인이 닭에게 아무 때나 울어라 하고 가르치기야 했겠느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봄날은 이 인내심이 요구되는 상황을 시로써 극복해보고자 시를 써보기도 하였다. 그 시를 여기에 옮겨본다.

 

앞집 장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서/ 날이 밝았겠거니 하고 일어나면/ 새벽 세 시도 되고/ 네 시가 되기도 했지요/ 유정란 먹겠다고 기르는 그 닭을/ 그러나 나는 모가지 비틀어/ 소주 안줏감으로나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요/ 밤꽃내 진동하는 6월 어느 날엔가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유난히도 울어쌓는 웬수 같은 그 놈 때문에/ 웬일이랴 깨어서/ 우리 내외/ 뒤척이다 궁시렁대다 그만/ 갑자기 뜨거워졌겠지요/ 가끔은 아닌 밤에 꼬끼오/ 닭이 울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밤꽃내는 왜 스멀스멀/ 온 동네에 기어댕기던지요

 

그런데 올 여름 더위가 얼마나 사납던지 이 시골마을에도 잠을 이루기 어려운 날이 많아졌다. 이 수탉은 예절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나보다. 아니면 저도 너무 더워 짜증이라도 난다는 듯 새벽이 오기도 전에 1분에 두 번씩은 우는 것 같다. 농사를 짓는 집 주인에게야 살아있는 알람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나에게는 꽃잠을 이룰 시간에 잠이 깨면 치오르는 짜증을 재울 수가 없다.

 

닭 울음소리도 나라마다 사람마다에게 달리 들리는 모양이다. 영어로는 'cock-a-doodle-doo' 로 표기한다 한다. 우리는 수탉 울음소리를 보통 "꼬끼오"로 적는다. 그런데 이 수탉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 '보쿄그~은' 하고 운다. 매번 들어도 그렇다. 아무리 '김철수'로 들으려 해도 그건 아니다. 나에게 무엇인지 채근하는 소리인 것 같다. 무언가 다그치고 나무라는 듯하다. 유치환은 1953년 『예루살렘의 닭』이라는 수상록을 펴냈다. 거기에 표제작으로 실린 글을 옮겨본다.

 

오늘도 너는 조소와 모멸로써 침 뱉고 뺨치며 위선이 선을 능욕하는 그 부정 앞에 오히려 외면하며 회피함으로써 악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성의 닭은 제 울음을 길게 홰쳐 울고 내 또한 무력한 그와 나의 비굴에 대하여 죽을상히 사무치는 분함과 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써 베개 적시우노니.

 

시국이 어지럽다. 위선이 선을 능욕하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악을 덮으려 온갖 거짓을 둘러대고 있다. 거리엔 촛불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악과 부정을 외면하고 회피함으로써 오히려 악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가?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정하고 닭 울음소리를 듣고야 크나큰 죄를 지었음을 깨달아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새벽에도 닭이 내 이름을 부르며 운다. 닭울음소리에 소소한 짜증에 몸을 바치는 대신 내가 외면한 정의와 나의 비굴에 대하여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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