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화 억누르지 못하는 '충돌 조절장애 범죄' 여전…성숙한 시민 의식 아쉬워
90년대 중반 현직에 있을 때 ‘입 거칠어지는 사회’라는 내용의 칼럼을 쓴 일이 있다.
당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각종 차량들로 인해 겪는 교통난과 인성(人性) 마저 변해 가는 세태를 비유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전주시내 모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30대 초반의 내과의사 H씨.
그는 자가용 승용차를 구매한 후부터 말투가 매우 거칠어졌다는 주위의 타박을 듣고 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상 대화 중 욕설이 쉽게 튀어 나오고 때로는 환자와 간호사에게까지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아 본의 아닌 실수를 범할 때도 많다. 의사 체면에 말이 아니라는 주위의 충고를 받고 내심 얼굴 붉힐 때가 없지 않으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아 고민이라는 하소연이다.
신망 받는 의사 H씨를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런 타락(?)을 날로 심해지는 도시 교통난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손수 운전하면서 자동차와 사람들에게 매일 시달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고 나면 늘어나는 차량, 답답하기만 한 도로사정, 마음대로 못 세우는 주차 시설, 여기에다 실종된 시민들의 질서의식까지 겹친 ‘짜증 유발성 교통피해 증상’이라는게 그의 그럴듯한 진단이다. 사실 H씨의 이런 푸념은 승용차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일들이다. 도심에서 운전하다 보면 교통법규를 무시한 채 끼어들기나 과속 추월을 일삼는 차량들 때문에 혼쭐이 나보지 않은 운전자가 없을 것이다. 사소한 접촉사고나 운전미숙으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렇다 치자.
시내버스나 대형 트럭, 일부 택시, 영업용 차량들의 난폭운전에는 그저 원초적인 욕설로라도 대항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게 벌써 20여 년 전 상황이다. 그렇다면 차량 2000만대 시대를 훌쩍 넘은 지금은 어떤가. 칼럼 내용 중 어디 한 대목 고쳐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판박이다. 아니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욕설을 주고받는 ‘입’만 거칠어 진 게 아니라 걸핏하면 주먹다짐이 앞서는 ‘행동’까지 거칠어 지고 있는 세태다. 시비가 생길 경우 ‘레이저 눈빛’(?)으로 상대방을 째려보거나 욕설을 주고 받는 정도로는 이미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주먹질, 발길질에 야구방망이까지 휘둘러 대는 마당이니 이런 폭력 현장에 공중도덕이나 법규 지키기 따위 고상한 시민의식은 실종 된지 오래다.
실제로 근래 들어 시·내외나 고속도로 등을 불문하고 자주 벌어지는 교통폭력 사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각종 언론 매체나 TV화면 등을 통해 비치는 사건 현장은 충격적이다. 대형 차량의 겁주기 난폭운전, 소형 차량의 겁 없는 끼어들기 방해운전은 아슬아슬한 정도를 넘어서 위험천만이다.
이 뿐이 아니다. 화를 참지 못한 운전자가 고속도로 주행선에 차를 세운 채 ‘너 죽고 나 죽자’ 식 막가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이 중 심각한 것이 바로 분노나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충돌 조절장애’에 의한 폭력이다. 자동차 폭력에 쉽게 전이되는 이 현상은 비단 교통사고 뿐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거나 다툼, 또는 마음의 불편함으로 인해 폭발하는 심리적 병증(病症)의 일종이라고 전문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 멈추고 패자부활전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거칠고 위험한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게 현재의 우리 상황이다. 좌절감과 불안감에서 우발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충돌조절 장애범죄’는 비단 교통폭력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지뢰밭처럼 깔려 있으니 더욱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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