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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상

칼레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항만도시다. 도버 해협을 끼고 있어 광석이나 목재 등의 수입항으로 발전한 이 도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일어났던 백년전쟁 초반, 영국군에게 함락되어 영국령이 되었다. 식민의 역사는 길었다. 1347년에 함락되었다가 1558년 탈환해 다시 프랑스령이 된 것이 1598년. 무려 251년 동안이나 다른 나라 땅으로 놓여있었던 셈이다.

 

칼레시의 비운의 역사를 오늘에까지 기억하게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있다.

 

백년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승리의 여세를 몰아가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9월, 칼레항을 포위했다. 그러나 칼레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고 1년 동안 저항하면서 칼레를 지켰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지고 더 이상 길이 없게 되자 결국 항복하고 만다. 영국왕은 칼레시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칼레시의 유지 여섯 명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칼레의 부자였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나섰다. 그러자 다른 유지 여섯 명도 목숨을 내놓겠다고 따라 나섰다. 모두 일곱 명이 되었던 셈인데, 이중 피에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바뀔 것을 염려해 교수대로 나서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남은 여섯 유지들도 죽음을 피하지 않고 교수대에 섰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순간, 영국 왕비의 간청으로 모두 살아나게 됐다.

 

이들의 이야기가 시대를 건너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조각가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 덕분이다. 로댕은 1894년 칼레시의 의뢰로 여섯 시민을 기리는 동상을 제작해 이듬해 헌정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시가 계획했던 대로 시청 광장 앞에 세워지지 못했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죽음 앞에 두려워하며 침통해하면서도 서로 격려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그러자 영웅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시민들의 반발이 컸다. 결국 이 조각상은 시청 광장 대신 한적한 바닷가에 세워져야 했다.

 

다행히 ‘칼레의 시민’은 1924년 시청으로 옮겨졌다. 이후 거푸집으로 다시 제작된 ‘칼레의 시민 ‘은 11개. 우리나라의 플라토미술관을 비롯해 세계적인 미술관과 런던의 국회의사당 등 세계 여러 곳에 전시되거나 세워져있다.

 

우리에게도 상징적인 기념조각상이 있다.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다. 소녀상은 국내는 물론 해외의 여러 곳에 세워졌다.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뜻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 이 또한 소중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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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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