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힘을 송두리째 빼앗는 공포에 대한 유일 치료법은 그것을 제대로 바로보는 것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올해 1월에 작고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유동하는 공포> 에서 공포를 위와 같이 규정했다. 형태가 불분명하다 보니 오히려 정처 없는 공포는 증가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수단을 가진 권력은 오히려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한다. 80만명의 이민자를 추방한다는 내용의 DACA 프로그램 폐지를 발표한 트럼프 행정부를 멀리 볼 필요도 없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안보라는 공포를 위해 대추리, 강정,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주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추방해왔는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 광주항쟁도, 1975년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 최악의 사법살인 사례로 남은 인혁당 사건도 그랬다. 정처 없고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 공포를 가시화하기 위해 희생이 필요했다. 유동하는>
매년 9월이 되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인 1996년 9월의 일이다. 전주-에버랜드-강원도 코스의 수학여행이었다. 하필 수학여행 첫날 강릉 앞바다에 북한잠수함이 침투하였다. 지금이야 당장 취소를 하는 게 맞는데 그 땐 강행을 했다. 휴대폰은 고사하고 겨우 삐삐나 몇 명 갖고 있던 시절, 그렇게 떠난 수학여행에 초를 친 건 강원도 들어서자마자 검문을 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오던 군인들이었다. 실컷 춤추고 놀다가 마주한 군인들을 보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선 한 달 전 뉴스에서 주구장창 틀어대던 연세대 한총련 사태의 몽타쥬들과 수학여행을 위해 연습하던 판관 포청천 노래가 뒤섞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 때부터 내 안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고도의 훈련이 준비됐는지도 모르겠다. 3년 뒤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아쉽지만 IMF 여파로 또 다시 강원도로 가는 기쁨을 맞게 됐다.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단체 금강산 여행을 가게 됐는데 역시 강원도를 거쳐 갔다. 육로를 통해 남한 땅 끝에 잘생기고 우람한 헌병이 버스 속 우리에게 경례를 하는 데 나는 어떤 양가적 감정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하나는 오래 전 내가 느꼈던, 그러니깐 중학교 때 버스에 올라와 내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했던 헌병에 대한 공포심이 별게 아니구나 했던 안도감이었고, 또 하나는 남한 땅을 벗어나는 그 날 해병대로 입대하기 위해 포항으로 떠난 남동생이 떠올라서다. 그리고 바로 앞 왜소한 북한 군인이 경계의 눈초리로 버스 속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새까맣고 작은 체구의 나보다 어려보이는 군인이 북한 사람인가 보지? 우리랑 똑같이 생겼네. 이런 느낌으로 북한 땅을 통과하였다.
바우만에 의하면 공포는 시대와 지역을 망라하며 이리저리 유동했다. 그랬기에 우리는 비가시화된 공포에 순응했던 적도 있었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자각 한 후 광장에서 시민들이 많은 걸 바꿨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 혐오,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여성 혐오가 만연하다. 공포를 거세하지 않으면 배제와 혐오로 확장된다는 걸 인류는 20세기 두 차례 전쟁에서 겪었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