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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6. 보물이 된 연동리 석불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과 석불사와 고지도(1872년 지방지도 부분도).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과 석불사와 고지도(1872년 지방지도 부분도).

익산 미륵사지에서 3km 떨어진 삼기면 연동리에는 석불 사거리가 있다. 오래전부터 인근 태봉사의 삼존석불과 더불어 유명한 석불이 있어서인지 조선 시기 고지도에도 석불 관련 표기를 찾아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곳 석불 사거리에 자리한 ‘석불사’에는 특별한 모습과 사연을 지닌 백제의 석불이 모셔져 있다.

비교적 일찍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연동리 석불은 1934년 일제가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선정한 보물 153건 중 제60호로 지정된 보물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보물 제60호 익산 석불리 석불좌상’이었지만,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뒤 일제가 지정한 보물들을 재분류하며 이듬해에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바뀌었다.

보물이 된 석불은 한눈에 봐도 원래의 불두(불상의 머리)가 아니라 후대에 새로 만들어 붙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불두는 사라졌지만 일제도 보물로 인정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7세기경의 현존하는 백제 최대의 환조(丸彫)석불로 몸체와 불상을 올려놓는 대좌와 아름답고 거대한 광배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석불이 품은 사연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불두가 없는 불상은 많이 있다. 불두가 사라진 것에는 여러 상황이 추측되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며 사찰이 폐사가 된 까닭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 시기 불교의 탄압으로 훼손되었고 더러는 6.25전쟁을 겪으며 파손되기도 했다. 연동리 석불의 불두도 언제 사라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역에는 불두가 잘린 사연이 전해진다.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부분 사진.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부분 사진.

1597년 정유재란 때 지금의 익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이 금마에 들어서자마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일어나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근처의 석불로 사람들이 몰려가 왜군이 빨리 물러가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석불에서 밤인데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나자 당시 왜군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안개의 조화를 빛나는 석불의 탓이라 여겨 석불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내려 조총과 화약이 비에 젖어 적들의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때 의병들이 습격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굳건하게 믿는 석불의 호국전설은 전해져 내려왔지만 그 이후 석불은 사라졌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의 꿈에 “나를 꺼내 달라”며 부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점지받은 땅을 파보니 석불이 발견되었고, 그곳에 보호각을 세워 석불을 보호하다가 1963년 석불사라는 절을 지으면서 쓰러진 광배를 일으키고 석불을 법당에 모셨다. 석불사의 옛 사찰명은 봉림사로 백제 시기인 600년경에 창건되어 고려 중기인 12~13세기 무렵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불두는 대략 1900년대 제작하여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간 보아온 불상의 자애로운 모습이나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동시대의 얼굴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친근한 스님을 닮은 것도 같은 석불의 얼굴은 몸체와 다소 이질적일지라도 사라진 불두를 안타까워하며 만든 불심과 투박한 돌을 징끝에 정성을 담아 새긴 석공과 불자들의 깃든 마음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후대에 만든 불두와 몸체를 붙인 자국이 선명하고 여기저기 마모된 흔적들이 보이지만, 불두를 제외한 156cm의 높이의 균형 잡힌 몸체에 양어깨를 감싸고 대좌까지 길게 내려진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유려한 옷자락이 우아하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중지와 무명지를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거기에 결가부좌한 무릎 아래 옷자락이 세련되게 새겨진 대좌는 백제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 대좌가 불단에 가려져 있던 것을 정비하고 있는데 불단정비 이후에는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의 석불을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광배 부분 사진과 조선고적도보(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담긴 광배 유리도판.
광배 부분 사진과 조선고적도보(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담긴 광배 유리도판.

광배는 상부에 파손된 흔적이 보이지만 지면기준 높이 448cm에 최대폭 226cm의 연잎형으로 현존하는 광배 중 가장 크다. 불두의 바로 뒤 광배의 중앙에 원형의 두광을 두고 열여섯 개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구의 작은 화불을 새겼다. 연동리 석불에 나타난 전형적인 백제의 광배 형식은 일본 아스카시대 불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 일제가 일찍이 조선의 보물로 인정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영험함은 ‘땀 흘리는 석불’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국가의 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석불이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석불이 처음 땀을 흘린 것은 과거 6.25전쟁 전이라 알려져 있는데, IMF 외환위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등 나라에 큰 위기가 오면 땀을 흘렸다고 한다.

연동리 석불을 올려다보니 우리를 품어주는 순전한 자비의 모습이 지긋하다. 천 오백여 년의 시간을 품고 수많은 중생의 염원을 받아주고 다독여준 단단한 믿음들이 투박한 돌에서 묵묵히 피어난다. 신비한 이야기를 과학으로 증명해도 애초의 모습을 찾아 추정하며 다른 형상을 투영해도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 2020년 예상치 못한 전염병의 유행으로 우리의 일상이 사라진 지금에도 봄꽃은 피어나 열매를 맺어 주듯이, 다가오는 부처님 오신 날에는 백제의 향기 그윽한 석불사를 찾아 위안을 받고 희망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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