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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3)기억해야 할 코무덤

(왼쪽)코베는 왜군(신문수 화백) / (오른쪽)코베는 왜군과 숨은 조선인(박재동 화백)
(왼쪽)코베는 왜군(신문수 화백) / (오른쪽)코베는 왜군과 숨은 조선인(박재동 화백)

“에비! 에비야!” 위험한 것이나 더러운 것 등을 아이가 만지려고 할 때 사용한 경계의 말이다. 엄한 아버지나 무서운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 짐작할 수도 있지만, ‘귀와 코의 한자인 이비(耳鼻)’와 ‘귀와 코를 베어 가는 사람인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순사를 ‘에비’라 칭하기도 했다는데 그 말에는 무섭고도 애통한 선조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코를 벤다”는 무시무시한 말. 상상하기도 싫지만, 중국 고대부터 죄인의 코를 베는 형벌인 ‘비형(鼻刑)’이 존재했다. 얼굴의 기둥으로 자리한 코의 의미를 크게 두는 것으로 한자인 스스로 자(自)는 사람 코의 상형이며, 코가 비뚤면 생각도 바르지 못한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형벌 중에 코를 자르는 것은 얼굴 정중앙의 코를 훼손하여 그 사람의 형상을 말소시키고 심리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조선에는 형벌로 코가 베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죽은 병사는 물론이고 살아 있는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임환(1561-1608년)의 『습정유고』에는 ‘무비자(無鼻者)’ 즉 코 없는 사람이란 시구가 전해지는데 “코 없는 자 뉘 집 자식 인가 / 산기슭에 홀로 앉아 얼굴을 가리고 우네 / 적병이 날카로운 칼 휘둘러 바람이 이니 / 하나 베이고 둘 베이어 천 백인의 코가 달아났구나”라는 애달픈 구절이 남겨져 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남원을 비롯한 조선에서 왜군이 전리품이자 증거로 베어 간 코를 묻어 1597년 9월 조성한 무덤이다. 가로 폭이 약 49m 높이 약 7.2m인 봉분 위에는 불교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지·수·화·풍·공을 상징해서 쌓아 올린 석탑인 오륜탑(五輪塔, 고린토)이 세워져 있다. 놀이터가 있는 귀무덤 공원이 옆에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받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큰길 건너에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코무덤’인 것을 귀무덤이라 한 것에는, 코를 자른 것은 야만적이니 귀무덤으로 바꾸었다는 기록과 코가 꽃의 일본어와 같은 ‘하나’라 발음되니 ‘꽃무덤’이라 칭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를 벤 수량에 따라 포상을 준다며 코영수증과 감사장까지 발행했다. 왜군은 코의 수를 늘리려 코를 잘라 담은 피투성이 대바구니를 허리춤에 차고 살아있는 조선인 코까지 베어 가져갔으며 더러는 코 베인 이를 인질로 데려갔다.

박수동 화백이 그린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수동 화백이 그린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금에 절여 온 코는 일본 각지에 묻혔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학자 강항(1567-1618년)은 교토 코무덤을 보고는 코를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을 이뤘다 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사람들이 코무덤에 제사 지내려 제문을 강항에게 부탁하자 “코와 귀는 서쪽에 묻혀 언덕을 이루었고, 큰 뱀은 동쪽에 묻혀 있다”하고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숨기려고 부하들이 그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한 달간이나 앉혀 둔 것을 빗대어 “소금에 절여 감추었지만 향기롭지 못하다”라고 써준 제문이 『간양록』에 남아 있다.

교토명소로 소개한 코무덤그림(1799년)과 엽서
교토명소로 소개한 코무덤그림(1799년)과 엽서

하지만, 일본은 ‘코무덤’을 적병의 신체를 잘 묻어주어 자비를 베푼 것으로 미화하고 힘을 과시하는 선전 장소로 활용했다. 코무덤 비석에는 “조선군의 코를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그는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여워하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교토 코무덤과 구글위치 사진
교토 코무덤과 구글위치 사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도 ‘코무덤’에 들르게 하였으며, 1799년 간행된 책 속 교토명소를 그린 그림에는 ‘코무덤’을 구경하는 서양인과 일본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개선했으며 태평성대에 공헌했다고 적었다. 19세기 그림과 다양한 교토명소 엽서에도 코무덤이 등장한다. 히데요시의 대표 유적 중 하나가 된 코무덤 석탑은 1969년에 호코지 절 석축과 함께 일본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고 문화재가 되었다. 이후 2003년 교토시에서는 귀무덤과 코무덤을 함께 표기해 놓고 다음과 같은 안내판을 세웠다.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목 대신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중략)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왜곡된 내용이 일부 수정되었지만, 코무덤 안에는 선조들의 원한이 그대로 봉인되어 있다.

남원 만인의 총 전경과 노래비(사진제공-남원시)
남원 만인의 총 전경과 노래비(사진제공-남원시)

남원에는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만여 명을 합장하여 모신 무덤으로 국가 사적인 만인의 총이 있다. 대부분 코가 잘린 채 수습되었을 것이다. 근처에는 왜군에게 끌려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망향의 그리움으로 불렀던 “조선가”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원광대학교 양은용(1947년생) 명예교수는 “코무덤을 찾아가 참배하고 남원 만인의 총으로 선조들의 코무덤과 넋을 봉안해 오고자 결심 한지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바람을 못 이루고 있지만, 모시도록 노력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해요”라고 하였다.

최근 엄숙하게 진행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귀환을 가슴 벅차게 보면서 모시지 못한 선조들의 넋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흔적으로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침략자의 사당 근처에 있는 선조들의 코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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